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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섭 Oct 31. 2024

(소설) 모여드는 사람들(3)

현해탄보험에서 지펴 올린 사무직 노동운동의 불꽃

엘리베이터를 내려 사무실에 들어설 때까지 태수는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착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출근시간 직후부터 조금씩 비치던 눈발이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서는 축복 같은 함박눈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폭설이었다.

광화문 중앙통을 바라보는 건물들에서 쏟아져 나온 넥타이와 유니폼을 입은 산뜻한 깃의 젊은 직원의 탄성으로 인해 거리는 질척거리는 사람의 수렁이었다.

금방 어깨 위에 수북이 쌓인 눈을 떨며 들어선 책방은 대조적으로 한산하였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 전 점심시간부터 매일 출입했던 책방의 진열대 한쪽 구석에 눈에 띄는 대로 한 권을 집어드는 순간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석이는 아직 안 왔어요?”

순구였다. 순구는 태수의 대학교 1년 후배였고, 형석과 함께 그들 셋은 입사동기였다. 대학교 기숙사에 있으면서 고무신을 끌고 다니던 태수를 순구는 신입사원 연수교육 때 알아보았다.

“글쎄 말이야”

“방금 들어오다가 업무부 이 과장하고 만났거든. 완전히 까무러치는 줄 알았네. 그리고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아가씨도 아는 체를 하더라고”

“오늘이면 끝인데 뭐. 참 이 과장은 뭐래?”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 사람이야 뭐랄 것이 없지요. 나 참, 무슨 탐정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배도 고프고 속 타서 죽겠는데 이 놈은 왜 이렇게 안 와?”

“저기… 서류준비는 다 됐지?”

“예. 연맹 기획실장이 준 규약하고 회의록은 복사해 놨고, 오늘 저녁에 연맹사무실에 가서 준비할 것 외에는 다 됐어요. 문제는 오늘 총회에 모일 사람들이지 뭐.” 

“아까 아침에 형석이 하고 이야기를 좀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오늘은 확실히 약속한 사람들은 마지막 확인이나 하고, 평소 친분 있는 사람들을 저녁에 데려 오는 작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다가 총회장에 와서 자기는 참가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고?”

“그렇더라도 설마 회사에 말하지는 않을 거니까 밑져봐야 본전이지 뭐.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 하자는데 확실하게 반대할 사람도 없을 거라고.”

형석이 책방으로 들어섰다. 눈썹에까지 앉은 눈을 털면서 책방을 휙 둘러보는 형석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광철이가 오늘 결근했단다.”

책방을 나와 들어간 중국집에 앉으면서 뱉은 형석의 말이었다.

“왜 결근했는지는 모르고?”

다급한 순구의 물음에는 절망감이 묻어있었다.

“출근이 가끔 늦는 적이 많아서 처음에는 별 걱정을 안 했는데 열 시가 넘도록 안 오길래 집으로 전화를 했지. 그랬더니 광철이 마누라 말로는 아침에 출근을 했다는 거야.”

“아니 그러면 어디로 간 거야?”

“모르지. 부장은 오히려 나보고 광철이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더라고.”

“광철이가 연락하기로 한 고졸 신입사원들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관계는 광철이가 전적으로 혼자서 진행했기 때문에 광철이 없이는 연락이 좀 곤란할 텐데”

음식이 나왔지만 식욕이 나지 않았다. 한 동안 그들은 말을 잊었다.

“허허...”

주체하기 어려운 극도의 슬픔에 직면한 사람은 웃는다고 했던가. 음식이 까맣게 식어 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형석과 순구는 그냥 앉아 있기만 했다.

앉아있는 자리가 땅속으로 꺼져 가는 느낌을 겨우 억누르는 태수의 머릿속으로 처음 노동조합을 준비하던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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