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보험에서 지펴 올린 사무직 노동운동의 불꽃
순구가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 회사에 몇 통의 전화를 돌리던 태수는 절망에 빠졌다. 아무도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이다. 너무 추운 날씨 때문인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수는 순구와 형석을 불러내었다.
“3명이 부족한데 어떻게 하지?”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침착한 순구의 조용한 대답이었다.
“광철아, 광철아, 이 나쁜 놈아”
형석이 주문처럼 광철이 욕을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모여 있는 스물일곱 명의 인원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에 계산했던 인원에 거의 육박하는 숫자였던 것이다. 문제는 광철이 펑크 낸 숫자에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구두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리고 온몸이 눈으로 뒤덮인 채 튀어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광철이었다.
“야. 시작했냐?”
“광철아!”
“야, 너 지금 몇 시냐?”
“야!”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라움과 기쁨의 탄성이 터졌다.
“야, 시팔 놈들아 이 몸이 인천까지 갔다 와야 되냐?”
“지금이 어떤 땐대 인천을 갔다 와?”
“노동부에 신고하려면 인천 사람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야, 빨리 들어와”
역시 눈에 덮여 잔뜩 웅크리며 들어서는 사람들은 고졸 신입사원들이었다. 하나, 둘, 셋... 모두 다섯 명이었다.
“야, 광철이 너.”
태수의 눈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시간 없다, 빨리빨리 시작하자.”
광철은 혹시나 백종관이 못 올 것에 대비해서 하루 근무를 빠지고 인천에까지 가서 인천지점의 고졸사원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광철이 데리고 온 사람들을 합해서 참가자는 모두 서른세 명이었다. 드디어 동토의 왕국에 노동조합의 깃발이 꽂히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출현으로 총회장은 술렁이는 환성의 물결이 되었다.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신분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평생직장의 염원을 안고 노동조합의 결성을 선언한다. 주면 주는 데로, 시키면 시키는 데로의 의존의 시대를 청산하고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 하는 자주의 시대를 선언한다...”
태수는 서른세 명의 참가자 전원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순구가 부위원장, 광철이 회계감사였다.
“내일 돌아가면 오늘의 일을 일체 비밀로 하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가입원서를 받기로 합시다. 그리고 달리 연락이 없으면 매일 저녁 일곱 시 삼십 분에 별도로 정한 장소에서 모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신고증이 나오면 즉시 이를 공개하고 그때부터 정상적인 활동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총회를 끝내고 나왔을 때 밖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엄청나게 오는구먼.”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때 태수의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형석이었다. 형석은 결성대회를 하는 동안 내내 밖에 앉아있었다.
“넌 이제 유명인사가 됐어. 축하한다.”
태수는 형석의 새삼스러운 악수를 받았다. 묘한 말이었다.
“형석아. 고생했다.”
“위원장님 수고했어요.”
악수를 하는 모습을 보고 다가온 순구였다. 순구의 손을 잡으면서 태수는 순구의 진정 어린 말이 고마웠다. 그리고 ‘위원장님’이라는 말에 정말 자신이 처해있는 엄청난 변화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야, 위원장! 한 턱 내야지.”
광철이 큰 소리를 내었다.
태수는 턱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검은 눈이 자신을 향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태수는 무엇에겐가 모를 대상을 향해 타오르는 열정에 불타올랐다. 아버지의 얼굴도, 관리부장의 얼굴도 모두 그 속에 있었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미래의 설계도, 기미독립선언을 한 사람과 일치하는 결성총회 참가자 서른세 명의 얼굴도, 그리고 닥칠지도 모를 엄청난 탄압도 모두 모두 그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이제 자신의 어깨하나로 받아넘기리라 다짐했다.
“그래! 한 잔 신나게 먹자.”
쏟아지는 눈 속에, 그 위대한 겨울과 함께 태수의 인생은 거대한 변화의 한 단계에 서 있었다.('모여드는 사람들' 끝. '일어서는 작은 풀들'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