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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는 작은 풀들

현해탄보험에 울려 퍼진 딸들의 함성

by 정섭

노동조합을 설립한 지 20일 남짓 지난 2월 21일, 하루짜리 민속의 날(설) 휴일을 쉬고 출근한 목요일 점심시간이었다.

우당탕

집에서 가져온 설음식을 책상 위에 놓고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던 인사부 직원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장실 쪽이었다. 인사부장인 모부장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사장실 쪽으로 뛰었다. 커다란 통을 들거나 허리춤에 전산 용지 박스 따위를 든, 언뜻 보기에 십수 명 되는 남자들이 사장실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저거 뭐야.’

문은 뛰어가던 모부장의 코앞에서 쾅하고 닫혔다. 모부장은 몸을 날려 문을 향해 힘껏 발을 뻗었다.

'뻥'

사장실 나무문에 신발 크기의 커다란 구멍이 뚫렸을 뿐 문은 이미 안으로 걸어 잠긴 뒤였다. 한발 늦은 것이다. 놀란 인사부 직원들이 우르르 뒤따라 뛰어왔다. 평화로운 점심시간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노동조합 설립 다음 날, 태수는 휴가를 내고 아침 일찍 금융노련 사무실로 다시 갔다. 금융노련 위원장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금노 기획실장과 함께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류를 다시 검토했다.

"이 정도면 신고증 바로 나올 거야"

자칫 잘못되면 모두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획실징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33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설립신고서류였다. 신고서류에는 설립대회 참석자의 명단이 고스란히 있었다. 지장까지 찍힌 서류가 아닌가. 몇 번이고 다시 본 후에야 태수는 일어났다. 서울지방노동청은 소공동 서울상공회의소 건물에 있었다. 불과 5분 남짓한 거리였다. 신고서류를 접수하고 접수증을 받았다. 접수증을 받는 손이 떨렸다.

'처리기간, 10일'

10이라는 숫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때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날 저녁 태수는 형석, 순구, 광철, 이정애 씨와 중국집에서 다시 만났다. 형석이 제일 먼저 왔다.

"야, 접수했냐?"

"회사 분위기 어때?"

태수와 형석의 동시에 터진 말이었다.

"접수, 했지. 근데 회사 분위기 괜찮아?"

"분위기 별로 다른 거 없어, 아직은. 야, 접수증 좀 보자."

태수는 안도했다. 태수가 꺼내는 접수증을 보고 형석이 꺼꺼 웃었다.

"야, 이거 한 장 때문에 몇 달을 고생했냐."

순구, 광철, 그리고 이정애 씨까지 모두 신고증에 감격했다. 다들 고생했다는 인사들이 바빴다. 그때만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은 몰랐다. 설사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준비한다고 해서 피하거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은 정작 그때부터 그들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사장실 문이 쾅 닫히고 밖에서 문을 차면서 문에 구멍이 나자 태수와 형석이는 사람들과 함께 사장실의 대형 유리 책꽂이를 문 앞으로 끌고 왔다. 소위 바리케이드였다. 그 앞에 대형 책상까지 끌어다 놓고서야 모두들 서로를 확인했다. 12명이었다.

"다 들어온 거지?"

"그런 것 같네."

다들 긴장한 얼굴이었다. 시간은 막 12시 50분을 지나고 있었다.


설립신고증을 접수하고 난 다음날인 금요일. 태수는 아침 7시 반쯤 회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기분 탓인가,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9시가 지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인사과장이었다.

"나, 인사과장인데, 잠깐 봅시다."

뚝, 하고 끊긴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앞자리에 앉은 민희에게 '무슨 일 있었어?'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희는 2년 전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입사동기였다.

'별일 없는데, 왜, 무슨 일 있어요?'

되묻는 민희에게 '아냐' 하는,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내고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부가 있는 8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인사과장은 허리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앉는 자세가 이렇게 거만해 보인다는 말을 덧붙였다. 태수는 인사과장 옆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서 시답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인사과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께 저녁에 뭐 했어요?"

허리를 앞으로 당기면서 인사과장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저께면 노동조합 창립총회를 한 날이다. 무슨 낌새를 차린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낌새 정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태수의 머리에 지끈하는 통증이 지나갔다.

"동기들하고 저녁 식사했는데, 왜요?"

마치 준비한 것처럼 거침없이 나온 말이었다. 이제 이 말을 시작으로 그럴듯한 거짓말을 둘러내는 일만 남았다.

"어디서 먹었어요?"

잠깐 생각하는 척.

"또순이 동태탕 집이요."

"누구누구 있었어요?"

사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인사과장이 다른 부서 직원의 저녁 식사 자리에 누가 함께 했는지를 묻는 상황, 그러나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나쁜 짓'을 한 결과였다. 심리적으로는 일정한 동의가 전제된 대화였다. 동기들 이름을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그러자 인사과장은

"앉은자리 표시하고 이름 써봐요."

하면서 종이를 펼치고 볼펜을 내민다. 짧은 순간 태수는 생각했다.

'아, 이건 노동조합과 회사가 첫 번째로 대면하는 순간이구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태수는 벌떡 일어났다. 처음으로 뭔가에 저항하는 순간이었다.

"왜 이런 걸 해야 됩니까? 동기들하고 저녁 먹었다는데."

그러나 생각보다 말은 공손하게 나왔다. 인사과장은 물끄러미 태수를 바라보다가 그만 가 보라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회사가 노동조합 설립총회 참석자를 따로 불러 탈퇴서를 종용하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였다. 처음에는 입사 동기들부터 불려 가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창립총회에 참가한 태수의 입사 동기는 모두 13명이었다. 창립총회에서 위원장, 부위원장, 회계감사가 된 셋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무국장, 조직부장, 후생복지부장, 문화부장, 홍보부장, 교육부장 등 뭔지도 모르는 자리를 맡았고, 나머지는 무임소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들이 회사의 첫 타깃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누가 노동조합에 참가했는지 회사에서도 몰랐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태수에게 한 것처럼 개별적으로 불러서 윽박지르면서 이름이 하나둘씩 드러났고, 이름이 드러나면 인사과장은 담당 부장들에게 탈퇴서를 받을 것을 지시했다(보완).

저녁을 함께 먹은 광철이 담당 부장은 '네 탈퇴서에 우리 가족 목줄이 달렸다.'며 애원했다고 했다. 후생복지부장 정성이는 인사부장이 직접 찾아갔다고 했다. 집으로까지 부장들이 찾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집에 늦게 간 어느 날 새벽에 집으로 들어가던 정성이 아파트 계단에 앉은 인사부장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정성이는 발길을 돌려 그날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날 인사부장은 정성이에게 '니가 내 등에 칼을 꽂았다.'는 말을 했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큰 통을 들고 들어와 사장실 가장 구석에 놓고 전산 용지를 꺼내 놓던 광철이 매직을 찾는다.

"야 매직 누가 챙겼냐?"

순구가 호주머니에서 빨갛고 파랗고 까만 매직을 껴내 광철에게 건넨다. 광철은 전산 용지 한 장마다 크게 한 자씩을 써넣는다.

부, 당, 노. 동. 행. 위. 중. 단. 하. 라.

그렇게 쓰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광철이 다시 소리를 지른다.

"야, 태수야. 아니, 위원장. 또 무슨 구호를 써야 되냐?"

옆에 있던 형석이 '어이그' 하는 소리를 낸다. 주변에서 각자 가지고 온 것들을 꺼내서 정리하던 사람들이 낄낄거린다.

"한 시 다 됐다."

순구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하던 일손을 놓고 사장실 한가운데 둥그렇게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 나왔다. 한 시가 되자 순구의 선창으로 노래가 시작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생각지도 않게 노랫소리는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커다란 종소리가 났다.

정작 노래를 들은 것은 사장실 간이 벽 너머에 있는 인사부와 총무부 직원들이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와 앉아 오후 일을 준비하던 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건 순간이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직원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비어있는 형석의 자리는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만세'라는 가사가 끝날 즈음 인사부 여직원 하나가 '흑' 하며 흐느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옥 같은 날이라고 했지만 정작 지옥은 창립총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던 고졸 신입사원들에게 들이닥쳤다. 기존 보험회사의 일과 동떨어진 보상 업무를 맡기기 위해 뽑은 신입사원들이었다. 올해 뽑은 신입들은 본사와 인천 두 군데로 나눠서 발령이 났다. 본사의 보상 업무 사무실은 본사 옆 별관 4층이었다. 인천에서 근무하는 고졸 신입사원들이 별관 4층 사무실에 나타난 것은 목요일 퇴근 직전이었다. 사무실 맨 뒷자리에 있는 보상 과장과 함께 뭔가 이야기를 하던 인사과장이 이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일어났다.

"신입사원들 모두 회의실로."

인사과장이 고졸 신입사원을 모았다는 소식은 태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퇴근 준비를 하던 태수는 형석, 순구, 광철이와 함께 별관으로 뛰어갔다. 4층 사무실 입구는 문이 잠겨 있었다.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불이 켜져 있는 것만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었다.

태수와 일행은 밖에서 소리를 쳐보고 문을 두드려보고 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신입사원들이 버텨 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차마 넘어가지 않는 밥은 교대로 먹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문이 열렸다. 밤 10시를 갓 넘은 시간이었다. 대봉투를 든 인사부장과 인사과 남자 직원 둘이 먼저 나왔다. 손에 든 것은 인주였다. 광철이 소리쳤다.

"야,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뒤이어 결성 총회에 참가했던 고졸 신입사원 여섯 명이 차례로 나왔다. 태수는 나오는 사람들의 손가락부터 살폈다. 엄지손가락에 채 닦이지 않은 빨간 인주가 묻어있었다. 풀 죽어 나오는 그들을 보는 태수의 눈가에 분노와 안타까움의 눈물이 번졌다.

"괜찮다. 고생했다."

어깨를 토닥이는 태수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제 고작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온 20대 초반의 어린아이들이었다.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르고 선배가 하라니까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무려 4시간 이상을 버티고 버티다 손가락 인주를 찍고 나온 아이들이었다. 대견하다는 생각과 이런 일을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성, 미안햐."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용석이다.

"가입원서 다시 줘. 다시 쓰면 되지 뭐, 그까짓 거. 야, 고개 들어. 우리 그래도 오래 버텼다. 아, 배고파 죽겠다. 술이나 먹자."

인사과장은 태수를 비껴가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었다. 창립총회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태수 동기 13명을 제외하면 그동안 탈퇴서를 쓰지 않았던 고졸 신입사원 탈퇴서를 챙기면서 이제 탈퇴자 수는 20명이 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설립신고증이 나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애국가를 부르는 마음에 새삼스러운 결기가 생긴 것은 태수만이 아니었다.

"애국가가 이렇게 비장한 노래였나."

형석이 중얼거렸다. 순구의 제안으로 둥글게 선 채로 모두 바닥에 앉았다.

"왜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 있는지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합시다."

역시 순구의 제안이었다. 순구는 어느새 이 자리의 사회자가 된 듯했다. 대학 다닐 때 기독청년 동아리에서 활동한 티가 나는 걸까. 잠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상진이 먼저 입을 뗐다. 상진은 태수의 같은 대학 같은 과 동기동창이다.

"근데 말이야. 학교 다닐 때 안 하던 짓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잖아."

일동 동의하는 끄덕임과 '그러게' '맞아' 하는 맞장구가 이어 나왔다. 누구는 허허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게 인간성 회복 운동인 것 같아."

의외의 전개였다. 상진은 회사에서도 조용하고 별로 티가 나지 않는 친구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인간성 회복이 튀어나온 것이다. 모두의 눈이 상진을 향했다.

"아, 뭐 별 생각은 아니고. 근데 생각해 봐라. 노조 하면 당장 월급 올려달라고 할 것 아냐, 회사가 뭘 하려고 하면 그런 거 하지 마라 하면서 목소리를 낼 거고, 그러니 회사도 노동조합을 이렇게 죽자 사자 막는 거고."

태수도 상진의 말이 가슴에 와 꽂혔다.

"입사해 가지고 회사에서 사람 취급을 못 받다가 노조를 하면 내 목소리도 내고, 월급도 주면 주는 대로 받는 게 아니라 교섭을 해서 받고, 뭐 그럴 수 있으니 이게 인간성 회복 운동 같다는 말이지, 내 말은."

우와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맞아 그게 딱 내 생각이야 하는 표정들이었다. 상진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였다. 인사부 쪽 간이 벽 넘어 바닥을 끄는 묵직한 마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야, 저것들 캐비닛 옮긴다."

"캐비닛 걷어내고 저 벽을 뜯으려는 거야?"

"미친 거 아냐?"


고졸 신입사원들이 탈퇴서에 손도장을 찍던 날, 의기소침해하는 녀석들을 데리고 광철이 집에 도착한 건 새벽 1시쯤이었다. 아이가 없는 결혼 생활을 하는 광철이 아내는 피곤하지만 반갑게 맞아주었다. 광철이는 아내가 건강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했다.

대충 씻고 방 하나에 모두 들어가 누었다. 피곤이 몰아쳤다.

"성, 신고증 안 나오면 어쩐대?"

용석이 불쑥 물었다. '그러게, 그러면 큰일인데'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어제저녁에 퇴근하고 금융노련 사무실에 갔다 왔는데, 금노가 우리 일에 아주 적극적이야. 신고증 나올 거라고 금노 위원장이 세게 말하더라."

"그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야?"

"분위기로 봐서는 그런 것 같아. 금융노조는 오래된 은행 노조 중심인데 이런 일이 이때까지 없어 놔서 자기들도 약간 흥분 상태인 것 같더라고. 국내 최고 재벌하고 붙을 기회잖아. 이전에 없었던 이런 판에서 한 번 제대로 싸워서 이겨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아."

"그거는 다행이네."

"신고증, 신고증, 제발, 제발"

옆에서 웅크리고 자는 것 같았던 고졸 사원 하나가 잠꼬대를 하는지 중얼거렸다. 며칠 전 광철이 비슷한 주문 같은 것을 해서 같이 웃었던 생각에 태수는 풋 하는 소리를 내며 오랜만에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이제 일요일 빼고 사흘만 더 버티자."

용석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태수도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캐비닛 끄는 소리가 멈췄다. 밀고 들어오면 서로 팔짱을 낀 채로 끝까지 버티기로 한 다음이었다.

"소리 멈춘 것 같은데."

"그러네."

벽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다투는 것 같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인사부장이 뚫어놓은 문의 구멍 사이로 큰 소리가 들렸다.

"고위원장 내 목소리 들려?"

익숙한 목소리, 금융노련 위원장 목소리였다. 태수는 문 쪽으로 뛰어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예, 저희 여기 있어요."

"다들 괜찮아? 다친 사람 없고?"

"예"

대답한 후 옆에 모인 사람들에게 '금노 위원장'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회사 측에 안전 보장하라고 우선 말해 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금방 다시 올게."

금노 위원장이 돌아가자 태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립신고증은 10일을 꽉 채워서 나왔다. 지방노동청에서 우편으로 보낸다는 것을 금노 기획실장이 직접 가서 받아왔다고 했다. 신고증을 찾으러 태수, 형석, 광철, 그리고 이정애 씨까지, 퇴근 후 금노 사무실로 갔다.

"왔어? 어서들 와."

기다리던 기획실장이 관공서 봉투를 태수에게 내밀었다.

"열어 봐. 난 손 떨려서 못 열어 보겠더라."

태수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읽어 내려갔다.

'노동조합 설립신고증'

'현해탄보험노동조합'

'위원장 고태수'

설립일자 1985년 1월 30일

모두 박수, 그리고 꺼꺼거리는 함성을 질렀다. 태수는 설립신고증을 형석이에게 전달했다. 형석은 신고증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설립 과정에 가장 고생했지만 인사과여서 설립총회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형석이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 형석의 마음이 가장 벅찰 것이라 태수는 생각했다.

노동조합 설립신고증.

회사의 온갖 공작을 이겨낸 난산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세상에 나온 아이였다. 한 살배기 아이. 이제 이 아이가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보살피는 일만 남았다.

"설립신고증 주면서 노동부 담당과장, 엄청 생색내더라. 회사가 탈퇴서 19장 가지고 와서 노동조합 설립 요건에 맞지 않다면서 신고증 반려하라고 거의 매일 찾아왔다더라."

"미친놈들."

광철이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금노 민위원장님이 이번에 노력 많이 했어. 노동부 장관, 회사 이사하고도 통화했어. 아마 이런 일은 처음일 거야"

"고맙습니다."

광철이 넙죽 인사를 한다. 모두 낄낄댄다. 태수는 한 고비를 넘었다는 생각보다 내일부터 당장 뭘 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직원들에게 어떻게 전파하고 어떻게 노동조합에 가입시킬 것인가 하는 것인데, 생각만으로도 그건 전쟁이었다.

"우리, 당장 내일부터 할 일이 태산이다."

태수가 힘들게 뱉은 말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사과장이 회사 경비를 동원해 케비넷을 걷어내기 시작한 즈음 금융노련 민요기위원장이 사장실이 있는 8층에 막 도착했다. 사장실로 향하던 민위원장의 눈에 캐비닛을 뜯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뭐 하는 거야?"

덩치 큰 민위원장이 후다닥 인사부로 발길을 돌렸다.

"당신들,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경비들이 뒤로 물러섰다. 비스듬히 앉아있던 인사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들에게 눈짓으로 뒤로 물러나라는 표시를 했다.

"잠깐 기다려 당신들. 여기 사장실 어디야?"

인사부 직원 하나가 민위원장을 사장실 문 쪽으로 안내했다. 문은 안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 민위원장은 고개를 숙여 구멍에 대고 소리쳤다.

"고위원장 내 목소리 들려?"

안에서 고위원장이 후닥닥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예, 저희 여기 있어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민위원장은 돌아서서 인사부로 향했다.

"이 사람들은 말로 해서는 소용이 없어."

하며 옆에 있는 금노 기획실장에게 노동부, 경찰서, 그리고 안기부 담당 직원에게 현해탄해상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해서 조합원들이 사장실 점거농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신고증이 나온 다음 날 7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 태수는 여태 보지 못한 큰 가방을 들고 출근했다. 어젯밤 금융노련에서 출력한, 노동조합 결성을 알리는 유인물이었다. 유인물의 초안은 형석이 쓰고 태수가 다듬었다.

우리는 주면 주는 대로의 의존적 삶을 거부한다(보완).

이렇게 시작한 유인물 맨 뒤에 ‘창립총회 참석자 33인 일동’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위원장 자동차업무부 고태수’라고 덧붙였다. 사내 전화번호까지 적었다. 노동조합 가입원서는 별지로 붙었다.

형석, 순구, 광철, 그리고 이정애 씨도 태수와 비슷한 시간에 회사에 도착했다. 태수 자리에서 만난 이들은 유인물을 나눠 들고 각자 맡은 층으로 가 직원들 책상 위에 유인물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태수는 인사부가 있는 8층과 해상부가 있는 9층을 맡았다.

이제 전 직원에게 노동조합의 설립을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갈피를 모르고 쿵쾅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서 태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되는 건가."

노동조합 설립 과정 그 어느 순간보다 설레고, 두렵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 선언문이, 이 마음과 이 결단이 사람들에게 오롯이 가 닿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태수는 정성스럽게 직원들의 책상 위에 유인물을 놓았다. 그때 인사부 직원 한 명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둘은 서로 놀랐지만 둘 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태수는 유인물을 책상 위에 모두 올려놓았고, 직원은 유인물은 외면한 채, 자리에 앉아 책상 서랍을 열고 업무 준비를 시작했다. 태수는 해상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들이 본사 전체에 유인물을 뿌리는 시간은 불과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8시쯤 출근한 인사과장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유인물을 보고 치를 떨었다. 이렇게 또 뒤통수를 맞는구나, 생각한 그는 부서장들에 전화를 걸어 유인물 걷어 오라고 어름짱을 놓았다. 그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 순서대로 유인물은 사람들 사이로 퍼졌고, 노동조합의 설립은 회사 전체에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부장들이 걷어간 유인물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이날 가장 많은 유인물을 가지고 간 사람은 이정애 씨였다. 그녀는 유인물을 들고 여직원들이 출근하면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탈의실로 갔다. 좁디좁은 탈의실 한구석에서 이정애 씨는 출근하는 여직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가입 원서를 받았다. 조금 늦게 출근한 여직원회 회장도 가입 원서를 받는 대열에 합류했다.

"어머, 언니. 우리 회사에서 이런 거 해도 돼요?"

"언니, 이거 해도 불이익은 없어요?"

하면서도 여직원들 대부분 가입 원서를 썼다.

"언니, 힘내세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잡는 여직원이 있는가 하면 어떤 여직원은 손가락을 덜덜 떨면서 가입 원서를 썼다. 그렇게 받은 가입원서가 그날 하루에 175장이었다. 이 숫자는 본사 여직원 대부분이 가입 원서를 썼다는 것을 의미했다. 회사의 모진 탄압에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노동조합에 새롭고 단단한 우군이 나타나는 기적 같은 순간, 현해탄해상노동조합의 작은 풀들이 저마다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이정애 씨는 단 하루 만에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여직원이 대거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후 회사의 대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에는 여직원들의 탈퇴서를 받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설립총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던 것과 같은 행태였다. 이번에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여직원들은 각 부서장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신세타령을 듣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하루 종일 일을 시키지 않고 회의실에 가둬두는 부서장도 있었다.

노동조합 이름으로, 금융노련 이름으로 ‘부당노동행위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내는 정도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정애 씨는 그런 여직원을 다독이느라 밤낮이 없었다.(보완) 간혹 점심시간에 태수 책상 고무판 아래에 탈퇴서를 몰래 놓고 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여직원들 대다수는 묵묵하게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태수에게 광철의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야, 위원장. 형석이 이야기 들었어?"

'무슨?' 하는 말이 입 밖에 나오기도 전에 광철이 소리쳤다.

"형석이 현해탄중공업으로 발령 났단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현해탄중공업은 울산에 있는 회사였다. 원래 회사는 노동조합 결성에 형석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인사부여서 총회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까지. 그런 형석을 현해탄중공업으로 쫓아내는 나름의 묘수를 둔 것이었다. 교묘하게 꾸며진 해고였다.

태수, 형석, 순구, 광철, 이정애 씨를 비롯한 13명의 집행 간부들이 그날 밤 금노 사무실에 모였다.

"이건 해고잖아. 부당해고"

광철이 포문을 열자 상진이 물음표를 붙였다.

"해고지, 해고는 해곤데, 현해탄중공업으로 발령을 낸 거니까. 근데 만약에 경력을 인정해 준다면 완전 해고는 아니지 않나? 이거 어떻게 되냐?"

이렇게 해고냐 아니냐를 놓고 설왕설래가 시작됐다. 태수는 형석의 얼굴을 살폈다. 형석은 아직 자신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형석이 생각을 한 번 물어보자. 야, 형석아 니 생각은 어때?"

광철의 말에도 형석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형석이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건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가도 괜찮다."

이정애 씨가 벌떡 일어났다.

"김형석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도 괜찮다니. 우리더러 김형석 씨를 포기하란 말이에요?"

형석은 눈을 들어 이정애 씨를 바라보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정애 씨, 나도 생각이란 걸 했을 거 아니에요."

형석은 목을 한 번 음음 하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조직 상황이"

뒷말이 잘 안 나오는지 형석이 말을 한 번 쉬었다가 힘겹게 다음 말을 꺼냈다.

"우리 조직 상황이, 내가 안 가면 그걸 지켜낼 만한 힘이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무조건 화내고 성질대로만 할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형석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발령 난 것 보는 순간, 아 이건 거부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났던 건 사실이야. 우리 노동조합이 이걸 이겨낼 힘이 아직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형석의 말에 순구가 반발했다.

"그렇다고 이런 부당한 일을 받아들여요? 그게 무슨 노동조합입니까? 그럴 바엔 시작을 말았어야지."

울분이었다.

"야, 순구야. 부위원장아. 그렇다고 우리가 힘이 없잖아, 아직. 그냥 내가 가는 게 맞아."

형석은 말을 할수록 더 확신이 생기는 둣 했다.

광철이 툭 튀어나왔다.

"야, 위원장. 어떡할 거야? 왜 말이 없어? 뭐라고 말을 해 봐. 그리고 이런 일은 위원장이 책임져야 되는 거 아냐?"

태수는 천정을 한 번 올려다보고 숨을 푹 쉰 다음 말을 꺼냈다.

"책임져야지. 내가 책임져야지. 이제 내 생각을 말할게. “


금노 위원장이 나타나면서 처음으로 대화라는 것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사부장이 뚫어놓은 구멍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그 구멍을 통과한 것은 노동조합 측 요구가 적힌 쪽지였다.

부당노동행위를 중단할 것. 탈퇴서는 무효로 할 것, 현해탄중공업 인사발령을 철회할 것, 노동조합을 인정할 것, 네 가지가 요구사항으로 전달됐다. 가운데에서 노사 간 의견을 조율한 것은 금융노련 기획실장이었다.

다음으로 그 구멍을 통과한 것은 저녁 식사 메뉴 쪽지였다. 각자 중국 음식 주문을 적은 쪽지가 그 구멍으로 나갔고 잠시 후 짜장면, 짬뽕 등 음식이 들어온 것도 그 구멍이었다.


태수는 형석이 인사 발령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금노에 가기 전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태수가 직접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 건 대학 졸업한 후 처음이었다. 가정에서 폭력적이었던 아버지는 평생을 부산 바다의 부두 노동자로 일했다. 월남, 사우디, 리비아, 쿠웨이트 같은 나라들에 나가 달러벌이를 해 가족을 먹여 살린 팔뚝 굵고 검은 이른바 산업 역군이었다. 서울에 있는 아들한테서 전화 왔다고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태숩니다."

"..."

"잘 지내시죠? 건강은 괜찮으세요?"

"..."

"아버지, 저 감옥 갈지도 몰라요. 그래도 제가 해야 할 일은 할 겁니다."

"..."

"혹시 뉴스 같은 데서 보더라도 놀라지 마시라고요. 끊습니다."

"태수야"

아버지가 이름을 불렀다. 태수의 가슴이 왠지 뭉클해졌다.

"예, 아버지."

아버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단디, 잘해라."

아버지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다정함이 느껴졌다. 감옥이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 의심이나 질문 없이 해주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었다. 뭉클했던 가슴이 눈물로 번졌다.

"... 예"

그날 저녁 금노 사무실에서 태수는 사장실 점거 농성을 제안했다. 형석이를 현해탄중공업으로 보내는 순간 노동조합은 끝난다고 생각했다. 사람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노동조합을 조합원들은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 태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은 우리가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 싸움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형석이를 현해탄중공업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거야. 형석이 너도 그 생각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평생 현해탄보험에 나랑 같이 붙어 다니자."

광철이 맞장구 박수를 쳤다.

"맞다, 맞다. 위원장이 그냥 위원장이 아니네. 위원장 말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게 맞다."

회사가 가장 방심할 때인 민속의 날 다음 날을 거사일로 잡고, 목표는 사장실을 점거한다는 계획이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그러나 말이 쉬워서 사장실 점거지, 광화문 사거리 안에 있는 회사, 그것도 사장실을 점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무모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데 태수를 비롯한 사람들은 거침이 없었다. 금융노련 기획실장에게도 이 사실을 전달했다.

광철이는 소변 통으로 쓸 대형 쓰레기통을, 순구는 전산 용지와 매직펜을, 상진이는 밤을 밝힐 초와 라이터를 가져가기로 했다. 며칠 먹을 초코파이도 챙겼다.

디데이, 점심시간이 되어 직원들이 다 빠져나간 12시 30분 어름이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각자 물품을 챙긴 일행들이 화장실, 심지어 여자 화장실에까지 들어가 기다리는 동안 태수가 먼저 인사부에 들어갔다. 인사부장과 직원들이 부장 자리 옆 테이블에 둘러앉아 설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태수가 아는 척을 하자 인사부장은 떡을 하나 집어줬다. 인사부장은 태수의 대학 선배였다. 현해탄그룹 독신자 숙소를 알아봐 준 것도 인사부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 태수는 인사부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에 가 신호를 했다.

하나 둘 셋

12명의 남자들이 각자 소지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안고 메고 사장실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12명이 모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고, 인사부장의 발길이 날아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대화가 시작이 되자 합의서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작성이 됐다. 가장 쟁점은 역시 형석이의 인사 발령 철회였다. 그러나 이미 죽을 각오로 뛰어 들어간 사장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안 된다는 입장이 분명해지자 회사는 손을 들었다. 최종 합의서가 왔다. 요구조건 네 가지에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문구가 추가됐다.

회사 대표의 직인이 찍힌 마지막 합의서가 구멍으로 들어온 것은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모두가 빙 둘러앉은 다음 태수는 합의서를 읽었다.

회사는 부당노동행위를 하지 않는다

회사는 탈퇴서를 무효로 한다.

회사는 김형석의 현해탄중공업 인사발령을 철회한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인정한다.

회사는 이번 점거농성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

태수가 합의서를 읽는 동안 광철이 눈물을 훔치며 형석을 향했다.

"야, 진짜 이게 되네, 되는 일이네. 형석아, 인마. 잘했다, 잘 됐다, 정말 잘했다."

태수가 사인을 하고 일어나 모두와 악수했다. 형석은 농성 내내 마음이 불편한지 별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불상사가 나면 어떡하나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수는 형석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가 해 낸 거야. 우리 힘으로 지킨 거야, 너도 노동조합도.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버텨줘서 고맙다."

형석은 말없이 태수를 껴안았다. 그리곤 돌아서서 모두를 향해 외쳤다.

"모두 수고했다. 고맙다."

순구의 선창으로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시작할 때와 달리 애국가가 마치 행진곡처럼 느껴졌다. 하늘을 찌를 듯한 목소리가 사장실을 타고 건너 밖으로 전해졌다.

바리케이드를 걷어내고 농성장에서 나온 태수 일행은 깜짝 놀랐다. 금융노조 기획실장, 인사부 직원들은 물론, 경찰서, 노동부, 심지어 안기부에서까지, 농성장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인사과장은 비스듬히 앉은 상태였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금노 기획실장은 약간 흥분된 기분으로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이 점거 농성이 성공할 거라 생각도 안 했어. 은행 노조 위원장 중에도 왜 그냥 두고 봤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 불상사만 없어도 다행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이렇게 성공하다니, 정말 대단한 일 한 거야. 수고들 했어."

회사 밖에서는 이정애 씨를 비롯한 여직원회 회장 등 고참 세 명이 그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다는 인사를 꺼낼 것도 없이 반갑고 반가웠다. 이정애 씨의 눈가가 젖었다.

난산 끝에 태어난 노동조합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스스로 가입원서를 쓴 175명의 조합원이 생겼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 수는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끝내 형석이를 지켜냈고, 회사는 우리를 노동조합으로 인정했다. 길고 긴 시간의 사투 끝에 드디어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봄바람 부는 꽃동산은 아니겠지만 설사 찬 바람이 불어도 상관없겠다 생각하며 태수는 옆에 있는 형석과 태수의 어깨를 걸었다. 그러자 모두들 몰려와 함께 어깨를 걸고 와와 하면서 빙글빙글 돌며 겅중겅중 뛰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쳐다봤다. 광화문 네거리 청량한 하늘에 둥실 달이 웃고 있었다.(일어서는 풀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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