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중화민국과 사회주의자

by 정섭



제11화 중화민국과 사회주의자


## 중화민국 정부

1919년 겨울, 동농 김가진이 아들 성엄 김의한과 함께 상해로 망명한 직후 정정화는 혈혈단신으로 시아버지 동농을 따라 상해에 갔다. 이때 정정화는 경의선을 타고 경성에서 의주를 거쳐 안동에 도착한 후 거기서 봉천까지 안펑선(安奉線) 기차를 탔었다. 정정화로서는 안동에서 봉천은 낯선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강에 의하면 최근 안펑선에 대한 일본군의 감시가 매우 심해졌다고 했다. 이렇게 감시가 강화된 것은 봉천 동남쪽에 있는 푸순 탄광지대에 연대 규모의 헌병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우강은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가는 도중에 상황을 보고 그때그때 판단을 잘해서 대처하라고 당부했다.

따라서 이들의 행로는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복잡해졌다. 곧장 봉천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랴오양으로 우회해 랴오양에서 만철을 타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면 안펑선 상에 있는 푸순 남쪽의 작은 소역 난펀에서 내려 랴오양까지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안동에서 출발한 지 다섯 시간가량 지나 일행은 난펀역에 내렸다. 난펀역은 다행히 역사라고 해야 지붕만 있는 간이역이었다. 검표원도 없고 개찰구도 없었다. 기차역에서 내린 것은 오전 열한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난펀 마을은 한적했다. 그런 한적한 마을로 처음 보는 다섯 명의 늠름한 청년들이 들어가자 아이들 몇이 놀다가 제자리에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들을 지켜보았다.

오상렬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일행의 숫자가 많아 눈에 띄기 쉬운 게 문젭니다. 우선 어디 들어가 간단히 요기를 하고, 그동안 랴오양까지 갈 방법을 찾아봅시다."

다행히 식당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상렬이 식당에 들어가며 계산대 앞에 몇 권의 책이 있는 것을 눈여겨 보였다. '건설'이라는 제목의 잡지였다. 오상렬이 기색을 감추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따뜻한 국수와 만두를 시켰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식당 주인은 이들의 행색이 마음에 걸리는지 계속 살피는 눈치였다. 정섭이 오상렬에게

"주인이 아무래도 우리를 수상하게 보는 것 같은데, 빨리 먹고 나갑시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오상렬이 일어나 계산대 쪽으로 다가가 '건설' 잡지 한 권을 들었다. 주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책에 관심이 있소?"

오상렬이 손에 든 책을 작게 흔들며 말했다.

"'건설'은 나도 즐겨 보는 잡지라 신기해서 봤습니다. 중산 선생께서 창간하신 잡지책이 아닙니까? 그런 책이 이런 농촌 마을에 있다니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오상렬의 농촌 마을 운운하는 소리에 주인이 다소 격앙된 말투로 말했다.

"아니 요즘 이런 농촌 마을이 신중국 건설에 더 열성인 것을 모른단 말이오? 신해혁명 이후 쑨원 선생이 '중화민국'의 기치를 세우고 공화국의 한길로 나아가니 우리로서는 그 긍지가 하늘을 뚫소이다."

의외의 반응에 놀란 오상렬이 주인에게 인사를 하며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신중국 건설의 의지가 이렇게 중국 곳곳에서 불타는 것이 부러워 그랬습니다. 우리는 최근 창당한 중국국민당이 있는 상해에서 왔소이다만, 중산 선생이 주인 선생의 말을 들으면 참으로 대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화답했다. 그제야 마음이 풀린 주인은 오상렬과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다면 내가 너무 과했습니다. 중산 선생과 뜻을 같이 하는 분 들이신 줄 모르고 결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고 일어나 함께 인사를 했다. 오상렬이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자리로 돌아와 일행에게

"아까 들어올 때 이 앞의 큰길 이름을 '중산로'라고 새긴 돌비석을 보았습니다. 중산은 쑨원 선생의 호이니 필경 이 마을은 혁명적인 기운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제사 사람들은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김의한이 말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파리강화조약이 맺어지고, 그걸 핑계로 산둥반도가 왜놈들 손에 넘어가자 중국의 대학생들이 궐기한 5.4 운동 이야기는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지요. 그 5.4 운동을 계기로 중국인민들의 생각이 많이 각성이 됐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그런 영향이 이런 작은 농촌 마을에도 미치고 있다니 놀랍군요."

그러자 오상렬이 말했다.

"5.4 운동은 같은 해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죠. 물론 1917년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김의한이

"후난성 같이 중국대륙 깊은 곳에서도 중국공산당 조직이 설립이 되었고 조만간 상해에서 당 창당을 위한 창당대회를 한다니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영향이 크긴 큰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잠시 이야기가 오고 간 후 김의한이

"그나저나 식사가 끝나면 랴오양으로 가는 교통편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형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러자 오상렬이 속삭이듯 일행에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까 식당 주인에게 우리가 랴오양까지 간다는 것을 말하고 마차를 구해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주인이 마차를 구해 보겠다고 했으니 한번 기다려 보시죠."

일행이 그제야 안심을 하고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밥값을 치르고 식당 주인이 안내하는 작은 집으로 이동했다. 마당에 농기구들이 어지러운 것으로 보아 농사짓는 사람의 집으로 보였다.

식당 주인은 이 집이 자기 아들의 집이라며 자기 아들이 마차를 가지고 곧 올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데 과연 김의한 나이또래의 청년이 마차 한 대를 가지고 왔다. 사방을 천으로 빙 둘러 만든 것이 아마도 곡물 따위를 실어 나르는 마차인 듯했다. 오상렬이 마부인 아들 옆에 앉고, 나머지 네 사람이 좁으나마 마차에 올라타고 뒷칸의 천을 내리자 밖에서는 깜쪽 같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뒷칸의 천을 올리고 일행에게 말했다.

"아까 저 선생에게 들으니 고생길을 가시는 듯한데 누추한 마차지만 안전하게 잘 도착하시기 바라오. 나는 배운 건 없지만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은 아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조선 사람들이 항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힘이 들어도 가던 길 마저 잘 가시기 바라오."

오상렬이 통역을 하자 뭉클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고 모두들 식당 주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마차는 느린 속도로 마을을 빠져나와 랴오양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넓은 도로를 따라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부는 좁은 농로로 방향을 틀었다. 길은 점점 험해졌고, 마차는 흙길 위에서 심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가면 확실히 검문소는 없겠습니다.“

덜컹거리는 마차 뒷칸에 앉았던 김의한이 자조 섞인 말투로 일행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오상렬이 마부와 대화를 나눈 후 뒤를 향해 소리쳤다.

"이 길은 일반적으로 농부들만 사용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은 대로만 감시한다고 하네요. 랴오양까지는 거리가 대략 150리 정도여서 부지런히 가면 오늘 저녁에는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상렬이 마부와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큰 소리로 뒷칸에 탄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불편하게 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생각에 잠긴 채 그 말을 들었다.

한참을 가다가 정정화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런데 덜컹거릴 때마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면서 말이 매끈하게 되지 않았다.

"손문 선생이... 중화민국 정부를 만든... 덕을 우리가 보게... 되는군요...“

하다가 이빨이 세게 부딪쳤는지 '아야' 하고 말을 멈췄다. 김의한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회한에 잠긴 말을 뱉었다.

"우리가 조선 반도에서 벗어나 이곳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만든 것에 비하면 부러운 일은 부러운 일이오. 우리도 조선 내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만드는 날이 오겠지요. 그날까지...“

하는데 마차가 돌멩이를 밟았는지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왔다.

'아야야' 하면서 김의한이 죽는소리를 하자 모두들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의한을 바라봤다. 정정화가 옆에서 '말은 삼가고 눈이나 붙입시다' 하며 입을 다물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모두들 김의한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중화민국 정부처럼 우리도 대한민국 정부를 만드는 날이라, 과연 그런 날이 올까, 그런 날을 앞당기려면 이 고생을 얼마나 해야 할까, 등등 제각각 상념에 잠겼다.

그렇게 한동안 달리던 중 마부가 오상렬에게 뭔가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던 오상렬이 놀란 표시를 하며 일행을 향해 말했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곳 왼편에 하이청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분 말씀이 하이청은 과거 고구려의 안시성이 있던 곳이라는군요. 그건 나도 모르던 이야기입니다."

모두 그 소리에 반가운 내색을 했다. 그러고 보니 다롄, 잉커우 등은 모두 랴오동반도에 속한 만주땅이었다. 그 내륙인 하이청은 랴오동반도를 지키는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오상렬과 박영만, 김의한의 원래 계획대로 다롄에서 봉천행 만철을 탔었다면 지나쳤을 곳이 바로 하이청이었다.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일행은 한참을 안시성 전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 사회주의자 청년

마차는 온종일 농로를 따라 이동했다. 때로는 마차에서 내려걸어야 할 정도로 길이 험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마차에 매달려 간 끝에 일행은 랴오양 외곽에 도착했다. 날은 이미 저문 시간이었다.

"저기 봐요!“

마부가 앞을 가리켰다.

"랴오양에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조심스럽게 들판을 가로질러 랴오양 외곽에 잠시 멈춰 섰다. 랴오양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도시였다. 환한 불빛으로만 보면 상해만큼 큰 도시로 보였다.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다.

마차에서 모두 내려 몸을 풀고 있는데 정정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린 랴오양의 상황을 전혀 모릅니다. 지금 랴오양에 들어가 바로 열차를 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김의한이 동의하는 말을 했다.

"맞습니다. 우선 외곽에서 잠자리를 구한 다음 랴오양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두 '좋다' 하고 동의하자 오상렬이 마부에게 말했다.

"혹시 이곳 근처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희가 믿고 하루를 지낼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만..."

젊은 마부가

"제가 사실 중학교를 랴오양에서 다녔습니다. 이곳에 몇몇 믿을 만한 친구가 있긴 합니다."

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믿을 만한 친구가 하나 있긴 한데... 그 친구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친구인데 괜찮겠습니까?“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일동 잠깐 동작이 멈췄다. 잠시 후 박영만이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사람과 어울리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듯한데 혹시 다른 분은 없을까요?“

했다. 그러자 김의한이

"그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고는

"박영만 동지. 우리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채택한 임시헌장 혹시 기억하십니까?"

하고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박영만뿐 아니라 모두들 '그건 왜?...' 하는 얼굴이 되어 김의한을 바라봤다. 김의한이 '이런 사람들을 봤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임시헌장 제3조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동등하다. 다들 아시죠?"

일동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게 뭐?' 하는 표정이다. 김의한이 답답하다는 듯 설명을 이었다.

"지금 임시정부는 구미식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분들과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분들이 보이지 않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동농 선생께서는 이는 나라를 찾은 다음에 논할 일이라며 대동단결을 호소하고 계시고요."

다소 흥분된 상태에서 여기까지 말한 김의한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임시헌장 제3조를 이야기한 것은, 이것이 사회주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도 결국은 모든 인민은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동등하다는 선언이 아니오? 그러니 사회주의자라고 배척하는 건 온당치 않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오상렬이 김의한을 자제시켰다.

"박영만 동지가 그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니 잠시 가라앉히고 오늘 묶을 곳에 대한 결정부터 지읍시다."

정정화가

"일단 중국인 선생의 친구 외에 달리 대안이 없는 듯하니 우선 그 친구의 집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박영만을 바라봤다. 박영만은 악간 계면쩍은 얼굴이 되어

"난 달리 어떤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니 큰 오해는 말아 주시오. 나도 동의하오.“

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하기로 결정을 지은 연후에 일동은 마차에 올랐다. 한참을 덜컹거리며 흙길을 간 끝에 드디어 마차가 정지했다.

마차를 내려 밖으로 나오니 집이라고 대여섯 채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부가 불이 켜져 있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아이 하나가 마루 위에서 놀고 있었다. 주위에 어른은 없었다. 마부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아이가 후다닥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젊은 청년 하나가 나왔다. 그 사람은 중국말로

“누구 쇼?”

하고 물었다.

마부가 청년을 보더니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위통슈에?"

그러자 청년도 마부의 이름을 부르며 마당으로 나왔다.

"마통슈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 모습을 보고 안심을 한 일행도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부가 청년에게 뭔가 한참을 설명했다. 그러더니 일행에게 그 친구를 소개를 했다.

"내가 말씀드린 내 중학교 친구 위웬칭입니다."

모두 서툰 중국어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위웬칭과 악수를 했다. 대화는 중국어에 능통한 오상렬이 했다. 간혹 통역을 하기도 했다.

소개가 끝난 후 마부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가기 전에 김의한은 마부에게 삯으로 얼마간의 돈을 쥐어줬다. 못 받는다 준다 하는 실랑이가 오고 가다 결국 돈을 받은 마부가 ‘꼭 성공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마차를 난펀 방향으로 돌렸다.

위웬칭은 1900년 생으로 김의한, 정정화와 동갑이었다.

"이곳 랴오양의 첸진촌이 저의 고향입니다. 보다시피 가난한 동네이고 저 역시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일행이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고 임시정부의 밀명을 갖고 밀산으로 가는 중이라고 설명을 하자 위웬칭은 반색했다. 자신은 내년에 랴오양에 있는 동북삼성군강습소에 진학해 군인이 될 생각이라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 김의한이

"동북삼성군강습소라면 군벌인 장쭤린이 몇 년 전에 설립한 군사학교로 알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위웬칭 선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고 다소 의아하다는 듯 말하자 오상렬이 통역했다.

그 말을 듣자 김의한과 같은 나이의 위웬칭이 김의한의 지적이 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 저의 조건으로는 어디 멀리 가서 공부할 처지가 못됩니다. 우선 가까운 군사학교를 졸업해 장교가 되면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는 일에 분명히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의한이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후 말했다.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손문 선생의 삼민주의, 그리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신 가운데 좋은 것만을 취해 우리식 대한민국을 건설하고자 꿈꾸고 있습니다."

박영만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손문 선생의 삼민주의는 몰라도 러시아 혁명은 지나친 논리 비약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섭은 박영만의 이런 태도가 이해됐다. 정섭이야말로 오랫동안 반공교육을 받아온 처지가 아닌가. 그러나 자신이 말을 할 게재는 아니었다. 오상렬이 김의한을 변호했다.

"박영만 동지,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도 결국은 러시아 혁명에 두려움을 느낀 것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레닌은 식민지 독립을 적극 지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족해방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향해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국인과 대화하다 우리끼리 논쟁이 되는 지경이 되었다. 정정화가 정리에 나섰다.

"박영만, 김의한, 두 분 동지는 자중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동농 선생의 밀명을 받고 밀산으로 가는 중입니다. 좌우 이야기는 나중에 임무를 마치고 난 다음 우리끼리 하도록 합시다."

오상렬이 일행 간의 대화 내용을 대강 통역을 하자 위웬칭이 말했다.

"이 문제는 중국도 겪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잘 대처하지 않으면 조선도 중국도 상당히 어려운 지경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중에 위웬칭의 모친이 저녁상으로 만두를 내왔다. 모두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저마다 '맛있다' '맛있다' 소리를 하며 만두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저녁 밥상을 물린 후 오상렬은 위웬창과 함께 랴오양 기차역 사정도 살피고 기차 편도 알아보기 위해 나갔다. 김의한의 팔뚝 상처는 우강 아내가 워낙 꼼꼼하게 치료해서 잘 아물고 있었다.

잠시 후 오상렬이 돌아왔다.

"다롄에서 출발해 랴오양에 도착하는 기차가 내일 오전 8시에 있고 저녁에는 랴오양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8시에 있다고 합니다. 랴오양은 만철의 주요 거점역이어서 왜군의 경계가 매우 삼엄합니다. 위웬칭 선생이 중국인 역무원에게 미리 이야기해서 따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오전 8시 기차입니다.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의한이 위웬칭에게

"고맙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박영만을 한번 본 후

"사회주의자 선생의 덕을 톡톡히 보는군요."

하고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정정화가 김의한을 보고 '왜 자꾸 그러냐'는 표정을 했다. 김의한이 정정화를 한번 본 후

"이게 바로 진정한 의미의 좌우합작이 아니겠소?"

하고 말했다. 박영만을 비롯한 일행은 그에 대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이들은 위웬칭의 도움으로 무사히 랴오양역에서 봉천행 오전 8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1980년, 평양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착륙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수현의 얼굴을 스쳤다. 북한 요원들이 그들을 맞이했고, 특별 통로로 안내했다. 순안공항 청사는 마치 시골 마을 학교 같은 분위기였다. 공항 내부도 컴컴했다. 불도 제대로 켜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력 상황도 좋지 않은 듯했다.

입국 심사는 간단했다.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수화물을 찾아 출구로 나오자, 김동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소. 자동차가 준비되어 있소."

두 사람이 검은색 벤츠 승용차 뒷자리에 올라타자, 김동철이 조수석에 앉았다. 자동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섰다. 수현은 창밖으로 펼쳐지는 평양의 풍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채색이 없는 회색빛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늘어선 모습이 휑댕그래한 느낌이었다. '회색빛 도시'라는 것이 평양의 첫인상이었다. 길가에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도 흰 저고리 까만 치마의 여자나 인민복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뒤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안기부 요원의 직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개를 몇 번 돌이더니 옆에 앉은 수현에게 귓속말을 했다.

"검은색 세단이 계속 따라오고 있소."

수현도 뒤를 돌아보았다. 박진호의 말처럼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에 또 한 대가 좀 더 멀리 떨어져 따라오고 있는 듯했으나 자신들을 따라오는 차인 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수현이 모기 소리로

"두 대 같아요."

하고 말하자 박진호가 다시금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누굴까요?"

"모르겠소. 하지만 좋은 징조는 아니오."

차는 평양 중심부에 진입했다. 건물 곳곳에 '천리마 운동' '주체사상' 등 글귀가 선명한 선전판들이 걸려있었다. 보통문을 지나 을밀대로 방향을 튼 차는 점차 평양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숲 속길을 한참 달리던 차가 갈림길에서 정차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김동철이 말했다. 불안한 시간도 잠깐, 따라오던 검은 승용차가 그들 뒤에 도착했다.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북한 요원이 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박진호가 앞자리에 앉은 김동철에게 물었다.

김동철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다소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

"수현 선생과 박진호 선생은 지금부터 따로 가셔야 합니다."

"뭐라고요?“

수현이 놀라서 물었다.

"우리가 왜 따로 가야 하죠?"

"이건 상부의 방침이오. 김의한 선생을 만나기 전에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오."

박진호가 강하게 항의했다.

"이건 합의된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움직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유감이지만, 상부의 지시요.“

김동철은 냉정하게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

두 북한 요원이 다가와 밖에서 문을 열어 수현을 내리게 하고 자신들이 타고 온 차로 안내했다. 박진호가 소리를 지르며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수현도 저항했지만 그들의 완력을 이길 수 없었다.

수현이 다른 차에 강제로 들어가려 하자 박진호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 질렀다.

"수현 씨, 걱정 마세요. 곧 다시 만날 거예요!"

수현이 차에 타자 김동철이 수현이 탄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잠시 후 두 대의 차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거 아닌가요?“

수현이 소리쳤다.

김동철의 표정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단 간단한 대화가 필요하오. 김의한 선생을 만나기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소."

숲 속 길을 한참 달린 차는 어느 연립주택 앞에 섰다. 입구에는 초소가 있고 군인 둘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수현은 이곳이 안가임을 직감했다. 마당을 지나 현관에 들어서자 여군 한 명이 길을 막아서서 수현의 소지품 검사를 하려고 했다. 수현은 '무슨 짓이냐'며 거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여군은 수현의 몸과 가방을 뒤졌다. 정정화가 김의한에게 전하라고 준 편지를 여군이 꺼내 들고 겉봉을 본 후 김동철에게 전달했다. 수현으로서는 그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소지품 검사가 끝난 후 그녀는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고,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에는 철창이 있었고, 문은 외부에서 잠기는 구조였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곧 돌아오겠소.“

김동철이 말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사실상 연금 상태가 된 것이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침대, 가운데 테이블, 의자, 화장실이 딸린 단출한 공간이었다. 벽에는 김일성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약 한 시간가량 지난 후, 김동철이 다시 들어왔다. 그의 뒤로는 김동철과 비슷한 연배인 사십대로 보이는 남성이 한 명 따라왔다.

"자, 이제 몇 가지 질문에 답해주시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은 김동철이 말했다.

수현이 대답 대신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언제 만날 수 있나요?"

"먼저 우리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시오. 김의한 선생을 만나는 것은 나중 문제요."

옆에 서 있던 남성이 앞으로 나섰다.

"김의한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노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소?"

수현은 놀랐다.

"노트요?“

하고 대답하며, 마음속으로 '진짜 그런 것이 있긴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소. 일제강점기 정신대와 친일파에 관한 자료가 담긴 노트 말이오."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김동철과 남성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사내는 고개를 살짝 가로 흔들었다. 이번에는 김동철이 물었다.

"박정섭이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보시오."

수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정... 정섭 선배요? 그냥 제 남자친구예요."

"그가 지금 어디 있소?"

"어딨긴요, 서울에 있죠."

남성이 끼어들었다.

"그가 과거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소만, 사실이오?"

사전 경고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오는 질문에 수현은 멈칫했다. 북한과 일본이 정섭에 관한 정보를 찾고 있다는 것을 박진호에게 미리 듣지 않았으면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했을 일이었다.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시간 여행 말이오. 박정섭 동무가 1921년 상해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소."

수현의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런 그녀의 침묵은 하나의 답변이었다.

김동철이 냉정하게 말했다.

"수현 선생,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소. 박정섭 동무가 임시정부의 인장을 이용해 과거로 갔다는 것, 그리고 정정화 선생이 동농 선생의 회중시계를 갖고 있다는 것까지."

수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회중시계가 과거로 갔고 임시정부 인장을 할머니가 갖고 있다. 이들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건 거꾸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수현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수현은 짐짓

"대체 어떻게...“

하는 말로 이들의 오류를 기정사실화 했다.

"정보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당신이 우리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오."

그들은 두 시간가량 지속적으로 수현을 취조했다. 김의한의 노트, 정섭의 시간 여행, 임시정부 인장과 회중시계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현은 최대한 모른 척하려 했지만, 그들은 이미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김동철이 나간 후 저녁 식사가 들어왔다. 평양냉면과 김치만두였다. 식사를 가져온 여성이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옥류관 평양냉면을 직접 가져왔습네다. 국물을 처음 드실 때 첫 맛이 어떤지 음미하시면서 드시라요."

불안한 와중에 평양냉면의 심심한 국물맛은 새로운 맛이었다. 음식 그릇이 나간 후 잠시 쉴틈에 여군이 들어와 수건이며 비누, 칫솔, 치약, 실내복 등을 가져다 놓았다. '씻고 계시라요.' 하는 말을 하고 나간 뒤 김동철이 잠깐 들어와 '오늘은 편히 쉬시고 내일 다시 만납세다.' 하고 나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마침내 수현은 혼자가 되었다. 수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진호 씨는 괜찮을까? 할아버지는? 얼마나 여기에 더 있어야 하는 거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

박진호는 수현보다 약 10분 늦게 수현이 들어간 안가에 도착했다. 같은 안가에 수현이 있을 것이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도착하자 마자 수현과 같은 형태의 2층 방으로 안내됐다. 곧 바로 김동철과 수현을 취조했던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가 물었다.

"박진호 씨, 당신은 안전기획부 소속이지요?"

"그렇습니다."

"김수현과 박정섭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보시오."

박진호는 따졌다.

"아니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수현 양은 어떻게 했습니까?"

김동철이 소리를 쳤다.

"박진호 선생, 여기가 어딘지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박진호 선생 대답에 따라 수현 선생의 안전도 보장된다는 걸 모르십네까?"

그 소리에 잠깐 생각에 잠긴 박진호가 남자를 보고 말했다.

"박정섭 군과 수현 양은 연인 관계입니다. 그 이상은 모릅니다."

"박정섭이 시간 여행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박진호는 놀랐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것 보세요. 시간 여행이라니, 그 무슨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이 모른다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수현 동무에게서 얻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하오."

박진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현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걱정 마시오. 그 동무는 안전하오. 다만, 협조하지 않으면 김의한 선생을 만나는 일이 지연될 수 있소."

박진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수현을 보호해야 했지만, 동시에 북한 당국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주어서도 안 됐다.

——-

다음 날 아침, 김동철이 수현의 방으로 다시 찾아왔다.

"오늘 박진호선생은 김의한 동지를 만나러 갈 것이오."

"저는요?“

수현이 급하게 물었다.

"수현 선생은 당분간 여기 있어야 하오. 김의한 선생 만나기 전에 우리 좀 더 대화가 필요합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이에요?"

"정정화 선생이 보낸 편지는 우리가 잘 전달할 것이오. 박진호 선생이 김의한 선생에게 당신의 안부도 전할 거요."

수현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김의한 선생이 어딘가에 감춰둔 모든 자료가 필요하오. 일제 전범과 정신대에 관한 노트와 임시정부 인장에 관한 정보요. 그리고 시간 여행의 비밀에 대해서도."

수현의 소리쳤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렇다면 수현 선생은 여기 계속 머물러야 할 거요. 김의한 선생이 협조할 때까지."

김동철은 수현을 방에 남겨두고 나갔다. 수현은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건물 주변은 경비가 철저했다.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잠시 후 김동철은 박진호를 차량에 태우고 김의한의 집으로 향했다. 박진호는 수현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에 걱정이 컸지만, 김의한을 만나서 뭔가 실마리를 푸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차가 대동구역에 들어간 후에도 한참을 더 가더니 길 끝에 있는 오래된 한옥 앞에 도착했다. 박진호와 김동철은 차에서 내려 대문으로 향했다. 벨이 울리자 젊은 당번 학생 하나가 문을 열었다. 그 뒤로 80대의 할아버지 한 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김동철은

"엄항섭 선생, 잘 지내셨습네까?“

하고 인사를 한 후 악수를 청했다.

"어서 오시오.“

하고 김동철의 손을 잡는 엄항섭의 눈은 일행을 살피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보이지 않자 수현이 오지 않은 것을 눈치챈 엄항섭의 얼굴이 의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수현 양은 어디 있소? 같이 안 온 게요?"

김동철이 대답했다.

"선생님 죄송합네다. 잠시 다른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곧 보게 될 겁니다."

엄항섭은 박진호를 한 번 쳐다보고 김동철에게

"아이를 어디다 두고 혼자 오는 게야!“

하고 낮은 소리로 호통을 쳤다.

고개를 잠깐 숙여 죄송한 기색을 한 후 김동철이 박진호를 소개했다.

"남에서 수현 양과 함께 온 남한 정보당국의 책임자입니다. 인사드리시오, 박진호 선생. 엄항섭 선생이십니다."

박진호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선생님의 존함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박진호라고 합니다."

엄항섭이

"남한 정보당국이라, 그래 우리 수현이는 어디다 버려두고 혼자 오셨소.“

하고 물었다. 박진호는 엄항섭의 위엄에 눌려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 하는 소리 외에는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실망스러운 표정이 된 엄항섭이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김의한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엄항섭이 김의한 쪽으로 가 수현이가 북한 측에 붙잡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김의한이 일어나 김동철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수현이를 어찌한 것인가 김동철 선생."

김동철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

김의한이 김동철 앞에 섰다. 그리 큰 키는 아니었으나 위풍당당한 풍채였다. 김의한이 박진호를 보자 김동철이 남한 정보당국 책임자라고 박진호를 소개했다. 박진호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박진호라고 합니다."

"수현이와 같이 오셨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같이 와야지, 이 무슨 무능인가? 남측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한심한가, 아직도?"

박진호가 얼른 다시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김동철이 앞으로 나와 김의한에게 말했다.

"선생님, 수현 동무는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네다."

김의한의 눈에서 불이 날 것 같은 분노가 지나갔다. 김동철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김의한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김의한 선생께서 이제 고집을 버리시고 우리에게 협조하신다면 수현 양은 할아버지를 만나고 무사히 남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김의한이 돌연 손을 들어 '이놈!' 하는 소리와 함께 김동철의 얼굴을 후려쳤다. 상상하지 못한 일격을 맞은 김동철이 두어 걸음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이런"

하는 소리를 하는 김동철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당번 학생이 얼른 휴지를 가져다 김동철에게 건넸다. 엄항섭이 가장 놀란 듯했다. 일생을 함께한 동지였지만 그가 이렇게 분노한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김의한이 폭력을 쓰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의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여보게 성엄, 이 사람."

엄항섭이 부드럽게 말한 후 김의한을 데리고 소파에 앉혔다. 김의한은 한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김의한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엄항섭이 일어나 김동철 쪽으로 가 얼굴을 살폈다. 피는 멎어있었으나 김동철 자신도 놀랐는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엄항섭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고, 수현이는 바로 데려오시오. 그편이 서로 좋을 것이오."

김동철이 아무 소리도 못하고 김의한 쪽에 인사를 한 후 대문간으로 나갔다. 엄항섭이 대문까지 배웅차 나갔다. 김동철이 품에서 정정화의 편지를 엄항섭에게 건냈다. 엄항섭이 편지 겉봉을 살폈다. 엄항섭의 눈에 안개가 끼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김동철을 엄항섭이 돌려세웠다.

"김동철 선생, 수현 양은 얼른 보내 주시오. 그리고 그 무슨 일제 전범이나 정신대 노트 같은 황당한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바라오."

이렇게 말한 엄항섭이 뒷짐을 지고 들어갔다.

김동철은 들어가는 엄항섭의 뒤에 대고 가볍게 인사하고 박진호에게 '갑시다.' 하고 손짓을 했다. 박진호는 김의한의 그 기개에 놀라 아무 소리를 못 하고 있었다.

대문 밖으로 나서자 박진호는

"김동철 선생. 부탁이오. 애초에 약속한 대로, 김의한 선생의 뜻대로 좋게 좋게 합시다."

김동철이 박진호를 휙 돌아보고는

"상황이 변했다지 않소. 박진호 선생, 선생이야 말로 선택하시오. 우리를 돕거나, 아니면 수현 동무와 여기 계속 계시거나.“

하고 버럭 화를 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1980년, 평양, 안가 근처 숲 속

그 시간, 수현이 갇혀 있는 안가 근처 숲속에 또 한 대의 검은색 벤츠 한 대가 서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그들을 미행했던 두 대의 세단 가운데 하나였다. 차 안에는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소속 정보분석관 요시오 오모리와 두 명의 대원이 있었다. 요시오 오모리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였다.

대원 하나가 일본말로 말했다.

"수현 양은 아직 건물 안에 있습니다."

다른 한 대원이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경비 인력은 총 8명입니다. 정문은 2시간마다 교대합니다.“

하고 말했다.

선글라스를 벗은 요시오 오모리가 쌍안경으로 건물을 살폈다.

"수현 양을 빼내올 방법이 있을 텐데..."

쌍안경을 내리고 선글라스를 다시 쓴 후 그는

"일단 밤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수현 양을 빼내올 방법은 그전에 찾아야 해.“

하고 혼잣말을 했다.

대원 하나가 지도를 펼쳤다. 이들은 수현을 구출한 후 평양을 빠져나갈 경로를 찾는 중이었다.


(제12화에 계속)


#sf소설 #판타지 #회중시계 #독립운동 #시간여행 #타임슬립 #독립전쟁 #의열단 #상해 #임시정부

이전 10화제10화 밀산 결사대 2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