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마적 장지앙하오와 군벌 장쭤린

by 정섭

제12화 마적 장지앙하오와 군벌 장쭤린


## 1921년, 만철, 허공 속으로

만철의 시작은 동청철도였다. 청나라 동쪽 만주 대륙의 북부를 횡단하는 철도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 간섭의 대가로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동청의 부설권을 따낸다.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동일한 광궤로 동청을 건설했다. 동청철도는 만저우리, 하얼빈, 무단장을 거쳐 쑤이펀허까지의 구간이지만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서로는 치타로 이어진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 하바롭스크와 치타를 경유하기 때문에 동청과 연결된다. 동청을 건설하면서 러시아는 하얼빈에서 서남쪽으로 창춘, 봉천, 대련으로 잇는 지선도 건설했다.

동청은 1903년 완공됐다. 동청 완공 직후 터진 러일전쟁에서 뜻밖에 일본이 이겼다. 일본은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을 획득한 데 이어, 동청의 서남쪽 지선 가운데 다롄, 봉천, 창춘까지의 지선을 함께 차지하게 된다. 일본군이 만주를 거쳐 북상하는 상황이 되자 일본은 이 지선을 조선 반도와 동일한 교준 궤도로 개축했다. 이는 조선 반도를 통한 만주 진출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과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두 가지 의도를 가진 조치였다. 1906년 다롄에서 설립된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줄여서 만철이 경영한 바로 그 노선이다.

만철은 만주뿐 아니라 조선 반도 철도 전체를 함께 위탁 관리하는, 식민 지배의 거대한 통로였다. 수탈을 위한 수송 도구라고 하는 것이 적합했다. 만철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됐다. 창춘 남동쪽 푸순의 탄광도 만철 소유였다. 만철은 병원, 학교를 지었고 호텔, 신문사를 운영했다. 만철이 점거하면 중국의 주권은 미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 되었다. 주식회사에 의한 식민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만철은 동인도 회사를 닮았다. 가히 만철 왕국이라 할 만했다.

당시 만철의 평균 속도는 시속 60km가량이었으나 시속 20km밖에 내지 못하는 구간도 있었다. 만주의 광활한 땅이 만철로 이어졌다. 만철은 조선 철도망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어지는 거점이었다. 일본 본토는 만철을 통해 대륙과 연결됐다.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들어간 경로는, 도쿄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 모지항, 다롄, 그리고 하얼빈으로 이어진 철길이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쑤이펀허, 무단장을 거쳐 하얼빈으로 갔다. 만철이 그들을 만나게 했고 안중근으로 하여금 이토를 저격할 수 있게 했다.

창춘을 기점으로 철로의 폭이 달라짐에 따라 진풍경이 연출됐다. 승객들은 모두 하차해 새 객차로 이동해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그랬다. 또 일본과 러시아의 지배력이 나눠지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창춘에는 러일 합동으로 수화물을 통관하는 통관소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늘 혼잡한 곳이 창춘역이었다. 일본 헌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불령선인과 중국공산당원을 잡아내려 혈안인 곳이기도 했다.

랴오양은 안동에서 봉천까지 가는 안펑선 상에 있는 도시다. 안펑선은 봉천에서 만철과 합류한다. 별일이 없다면 하얼빈까지는 환승 없이 갈 수 있다. 랴오양에서 기차를 탄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약속한 대로 김의한, 정정화, 정섭이 한 조, 오상렬, 박영만이 한 조로 자리를 잡았다. 객실은 같았다. 오상렬이 기관차 쪽, 김의한이 꼬리 쪽에 앉았다. 누런 복장의 만철 순사 두 명이 권총 가죽 주머니를 허리띠에 맨 채 눈알을 번뜩이며 개찰구에 서 있었지만 일행은 위웬칭의 도움으로 무사히 객차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끊은 표는 창춘까지 가는 표였다. 창춘에서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이들이 세운 계획은, 창춘 직전 테링 다음의 궁주 간이역에서 하차해서 도보로 창춘을 지난 후 시후이 역에서 다음 하얼빈행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봉천을 지나자 역무원이 검표를 실시했지만 헌병이나 경찰이 따라붙지는 않았다. 안펑선 역시 표준궤도였기 때문에 만철과 만나는 봉천에서는 기차를 갈아탈 것도 없이 바로 창춘을 향했다. 기차가 창춘을 앞두고 테링에 정차한 후 꽤 긴 시간 멈추었다. 승객들이 '왜 이렇게 안 가'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바로 그때 일본 헌병 일 개 분대 정도 되는 병력이 개찰구를 통해 기관차 쪽 객실로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김의한이 먼저 이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져 정정화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김의한이 턱으로 가리키는 쪽을 본 정정화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오상렬과 박영만도 헌병대가 기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자 고개를 뒤로 젖혀 김의한 쪽을 바라봤다.

김의한이 긴장한 얼굴로 사태를 정리할 생각을 하는 사이에 기차가 '덜컹' 하더니 천천히 출발했다. 김의한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상렬이 일어나 복도로 김의한을 지나 왜군들이 탄 반대 방향인 꼬리 쪽으로 가서 객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김의한이 따라나섰다. 객실과 객실 사이의 시끄러운 공간에서 둘은 빠르게 방침을 정해 나갔다.

"오상렬 동지, 위조 신분증이 있으니 검문에 응하는 것이 어떻겠소?“

오상렬로서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하자'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김의한이 다음 말을 이었다.

"문제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전혀 하지 못하는 정섭 동지요"

오상렬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정섭 동지와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무슨...?"

"검문에 응하되 문제가 되면 함께 기차에서 뛰어내리겠소."

"그런 생각이라면 그건 내가 하겠소."

"아니오. 만약 뛰어내리는 경우 중국말을 제대로 못 하면 정섭 동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소. 이는 내가 할 일이오."

앞뒤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그렇게 의견이 모아지자 그 방법을 진행할 구체적인 계획을 정해야 했다.

오상렬이

"정섭 동지와 박영만 동지의 자리를 바꿉시다.“

하자 김의한이

"권총은 정섭 동지에게 맡겨 두겠소.“

했다.

"자리를 바꾼 후에 왜군이 들아와 검문을 하면 나와 정섭 동지는 객실 밖으로 나가 꼬리쪽으로 가겠소. 객실 밖에서 검문을 받겠지만, 상황이 급하면 뛰어내리겠소."

김의한이 착잡한 표정으로 오상렬을 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알겠다'고 말했다.

오상렬이 말했다. "헤어지면 일차 접선 장소는 오늘 오후 2시 창춘역으로 합시다. 시계탑이 있으면 시계탑 근처에서 만나고, 시계탑이 없으면 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찻집을 찾아 들어갑시다."

"좋소. 만약 일차 접선이 실패하면 저녁 6시 시후이역에서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접선 장소까지 정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하고 객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김의한이 정정화에게, 정정화가 정섭에게, 오상렬과 결정한 사항을 전달했다. 정정화가 총이 든 가죽 가방을 꺼내 정섭에게 넘겼다.

긴장 속에 기차가 출발한 지 십여 분이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오상렬 앞 객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런 제복의 왜군 두 명이 들어왔다. 객석의 사람들을 자세히 살피는 본새가 틀림없는 검문이었다.

오상렬이 정섭의 옆구리를 쳤다. 정섭이 일어나 뒤도 돌아 꼬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고 나갔다. 검문을 하던 왜군 한 명이 가만히 정섭의 나가는 모습을 살폈다. 오상렬은 객실 문과 가까운 자리라 정섭의 뒤를 이어 바로 나가지 못하던 차에 왜군 하나가 오상렬 쪽으로 왔다. 오상렬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일어나면서 왜군과 부딪쳤다.

"스미마생(미안합니다)!"

하면서 왜군 앞 꼬리 쪽 복도에 섰다. 왜군이

"빠가야로(이런 바보 같은)!“

하자 오상렬이 심하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못 봤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오상렬의 유창한 일본어였다.

"니혼징 데스까(일본인이야)?"

"아닙니다. 중국사람입니다."

오상렬이 일본말로 대꾸하며 위조 신분증을 보였다. 왜군이 앞뒤를 돌려 보더니 신분증을 돌려주며 물었다.

"직업이 뭐야?"

"저, 봉천의과대학에 다닙니다."

의과대학이라는 말에 왜군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래?"

하고 말하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신분증과 오상렬을 번갈아 보더니 신분증을 돌려주며,

"아까 저 문으로 나간 놈, 일행이야?“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오상렬은 마치 무심한 듯

"저 화장실 가려고 일어섰는데 가도 되겠습니까?“

했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상렬을 잠깐 보던 왜군은 이내,

"가 봐.“

하고 말했다.

오상렬은 얼른 뒤 돌아 꼬리 쪽 방향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김의한과 눈이 마주쳤다. 김의한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문을 열자 중국인 몇 사람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정섭이 서 있었다. 오상렬이 속삭이듯

"뒤로 갑시다.“

하고 말한 후 정섭의 손목을 잡고 뒤 다음 칸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상렬을 주시하던 왜군이 아무래도 수상했는지 오상렬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아와 객실 문을 열었다. 정섭과 오상렬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왜군이 호루라기를 삑 불었다.

"삑, 삑, 삐익!"

같이 검문하던 왜군이 후다닥 뛰어왔다. 둘이 정섭과 오상렬이 들어간 객실 문을 열고 뛰어갔다.

정섭과 오상렬은 서너 개의 객실을 지나 마지막 객실의 문을 열고 열차의 꽁무니로 달렸다. 뒤에서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연신 들렸다. 정섭의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열차의 맨 뒤로 간 오상렬은 정섭으로부터 총을 건네받았다.

"정섭 동지. 내 말 잘 들어야 합니다. 내가 뛰라고 하면 손과 팔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고 기차 밖으로 몸을 던져야 합니다. 다행히 여기는 풀숲이니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게요."

정섭이 놀라는 한 편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정섭 동지가 안전하게 뛰어내린 것을 확인한 후 나도 뛰어내릴 것이오. 정섭 동지는 아무리 아파도... 다리가 부러져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무조건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하오. 그리고 무조건 나와 만나야 합니다. 어딘가 숨어 있으면 내가 찾아낼 것이오. 알겠소?"

"네."

"지금부터 난간의 손잡이를 잡고 있으시오."

정섭이 객차 난간의 손잡이를 잡았다. 바람결에 유연탄 연기가 얼굴을 때렸다. 맞은편 객실 문이 열렸다. 오상렬이 객실 문을 열고 왜군에게 한 발의 총을 쏘았다.

"탕"

왜군의 팔에 명중했다. '으악' 하고 쓰러진 뒤에 다른 왜군이 들어와 몸을 숨기고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승객들이 비명을 질렸다.

"탕, 탕, 타탕"

총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객차 여기저기에 가 박혔다. 승객들의 비명이 더 커졌다. 오상렬이 다시 단 발의 총을 발사하며 왜군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던 차에 기차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였다. 오상렬이 외쳤다.

"지금이오!"

총탄이 빗발치자 정섭의 공포는 오히려 사라졌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길이지만 뛰고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기적 소리를 '꽥, 꽥' 하고 질렀다.

정섭은 풀숲을 향해 허공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늘에 한참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족과 수현의 얼굴, 그리고 상해에 온 이후에 벌어진 그 숱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머리와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고 풀숲에 떨어진 정섭은 몇 바퀴를 떼굴떼굴 구르다 나무 등걸에 걸려 그 자리에 멈췄다. 정섭은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일어나 숲을 향해 뛰었다.

오상렬은 정섭이 풀숲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왜군을 향해 두 발을 쏘았다. 왜군은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하고 있었다. 난간으로 건너간 오상렬이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풀숲에 떨어진 오상렬은 떼굴떼굴 구르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어버렸다. 오상렬을 향해 쏘는 총탄이 돌에 맞아 튀었다.


##1921년, 창춘, 마적 장지앙하오

김의한과 정정화, 박영만은 객차 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동 덕에 검문을 피해 무사히 창춘역에 도착했다. 창춘은 혼란한 국제정세 속에 일본, 러시아, 중국 정부, 그리고 군벌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숙명의 도시였다.

러일전쟁 직후 포츠머스 회담에서 러일은 창춘 이남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는 합의를 하면서 창춘을 어느 국가에 귀속할 지에 대한 사항은 표기하지 않았다. 이후 5년 동안의 치열한 협상을 거쳐 결국 창춘을 양국이 공유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문제는 창춘은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쭤린의 세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일본, 그리고 군벌의 치열한 경합지가 바로 창춘이었다.
승객들 모두 창춘역에서 내려 갈아탈 기차로 이동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벌어진 데다, 가까운 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그곳으로 모두 동원된 것인지 개찰구에 헌병도 보이지 않았다. 개찰구를 나오자 동북의 중심지답게 창춘은 기존의 낡은 집들과 새로 건축하는 집들로 무질서한 모습이었다. 시계탑이 보이지 않자 김의한은 가까운 곳에 찻집을 찾았으나 언뜻 눈데 띄는 곳이 없었다. 사방을 살피던 정정화가 김의한의 옆구리를 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꽤 먼 곳에 우뚝 솟은 삼층짜리 호텔이었다.

"大和호텔, 야마토호텔이라. 저기 가면 찻집은 있겠군. 박영만 동지 갑시다."

세 사람은 약 십여 분간 걸어간 후 호텔 앞에 도착했다. 일 층은 모든 창문이 아치형으로 되어있는 호화로운 석조 삼 층 건물이었다. 호텔 옆 골목의 음식점에서 간단한 국수로 요기를 한 후 일행은 호텔로 들어섰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가볍게 인사를 하자 김의한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일본 고위 관리로 보이는 몇 사람이 일 층의 찻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일군 장교 복장이었다. 찻집 구석에는 조선말을 쓰는 사람들 몇 명이 양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김의한 일행이 찻집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호텔 밖 도로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박영만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발굽 소리가 아닙니까?"

김의한이 창문으로 밖을 보며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는데 과연 대여섯 명의 말을 탄 사람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호텔 앞 도로에 들어섰다.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좌우로 흩어졌고, 호텔에 있던 사람들도 저마다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창밖을 주시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양복을 입은 조선 사람 한 명이 크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

"마적이다!"

찻집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박영만이

"어어. 저 사람들, 마적들, 호텔로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하는데 말에서 내린 마적들이 옆구리에 찬 권총을 꺼내 하늘에 대고 요란하게 쏘아댔다.

"탕. 탕. 탕탕탕."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호텔 정문이 벌컥 열렸다. 호텔 로비에 서 있던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권총을 든 마적 셋이 로비에 뛰어 들어왔다. 이들은 곧장 찻집으로 향했다.

"야스카와!"

마적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찻집에서 일본 고위층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있던 왜군 장교 앞으로 가서 이마에 총을 겨눴다.

"장지앙하오... 여긴 어떻게?"

"이 개자식! 사람을 뭘로 보고."

장지앙하오의 다소 어색하지만 완벽한 일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고 있던 총의 손잡이로 야스카와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야스카와가 제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옆에 있던 일본인들이 '으악'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야스카와가 정수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손으로 닦으면서 악을 쓰듯 말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데!"

"돈도 못 받으면서 일본 놈의 개가 됐다는 말을 네놈이 들어봐야 아가리를 닥치지?"

"마적 새끼가 무슨 체면이 있기나 해?"

"훈춘 일본 경찰서 습격하는 척해 달라고 한 네놈에 비할까? 그러고도 약속한 돈을 아직도 안 내놔?"

찻집 입구 쪽에서 엎드려 말을 듣고 있던 김의한의 가슴에서 불이 났다. 훈춘에서 독립군이 일본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이 사실은 야스카와와 장지앙하오가 조작한 사건임을 알리는 현장이었다. 그것 때문에 간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야스카와를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기세를 눈치챈 정정화가 김의한의 팔을 잡았다.

야스카와가 악다구니를 썼다.

"나를 죽이면 너희는 무사할 것 같냐?"

장지앙하오가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그런 대비도 없이 이런 백주 대낮에 내 나와바리도 아닌 이 번화한 곳에 와서 너에게 총부리를 겨누겠느냐? 훈춘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네 상관의 뜻이니, 네놈은 그저 내 손에 죽을 뿐 일본국이 너를 죽이는 줄이나 알아라."

야스카와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으아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

장지아하오가 엄숙하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비열한 일본군 장교 야스카와를 공개 처형한다!"

장지아하오가 든 총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탕"

야스카와가 풀썩 쓰러졌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린 사람 중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장지아하오의 눈이 엎드린 채 고개를 들고 이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김의한의 눈과 마주쳤다. 김의한은 원망과 통쾌함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장지아하오가 지나가면서 김의한에게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마적들이 말을 타고 요란한 흙먼지를 날리며 떠난 직후 일본군 헌병 일개 분대가 야마토호텔에 도착했다. 그들 중 일부가 야스카와의 주검을 수습할 뿐 나머지 병력은 마적들을 추격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저 호텔 앞에 머물렀다.


##1921년, 펑톈군 본부

풀숲에 떨어진 정섭은 아픈 다리를 끌고 필사적으로 숲으로 달렸다. 기차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쯤 나무에 기대앉아 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손등이 긁히거나 찍혀 피가 나고 왼쪽 다리 허벅지가 가로로 십 센티미터 정도 찢어져 있었다. 바지 때문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정섭은 벌떡 일어나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걸었다. 오상렬과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섭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오상렬 동지, 오상렬 동지"

한참을 걸었다 싶은데 앞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정섭이 나무 뒤에 숨었다. 살금살금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간 정섭의 눈에 청회색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일본군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정섭의 눈에 오상렬이 보였다. 오상렬은 풀숲에 드러누운 채였다. 멀리서 봐도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군복 입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니 기절한 듯한 오상렬을 말등에 싣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오상렬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오상렬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꼴이 된다고 생각한 정섭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 느닷없는 상황에 말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도 정섭을 보고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쩌 찌아 후오 칸 셤머(저 놈 뭐 하는 거야)?"

"쩌 찌아 후오 쓰 쓰웨이(저 자식 누구야)?"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하던 군인들 중 가장 높은 것 같은 사람이 말에서 내려 정섭에게 총을 겨눴다.

"니 쓰 쓰웨이(너 누구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정섭이 오상렬 앞으로 가 오상렬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과 일행입니다. 제발 살려주시오."

일행임을 눈치챈 군인이 다시 물었다.

"니 쓰 빵쯔마(너 조선 놈이야)?"

정섭이 못 알아먹자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다른 군인 하나가

"넌 누군데 여기 왜 이러고 있어?"

하고 정확한 조선말로 물었다. 정섭은 그 사람을 향해

"조선 사람이십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군에게 쫓겨 기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말을 그가 대장에게 통역하자 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뭐라고 말을 했다.

"너희 독립군이냐?"

"저희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왔습니다. 동농 선생의 밀명을 받고 밀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말을 통역하자 대장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대장이 다시 조선말을 쓰는 군인에게 말했다.

"왜군에 쫓기는 임시정부 요원이라니 도와줄 마음이 생기셨다고 한다. 저 기절한 사람 치료를 위해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하신다. 그렇게 하겠나?"

일단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상렬을 치료하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마고 대답하고 정섭은 그 조선말을 하는 군인이 타는 말의 앞자리에 앉아 그들의 주둔지로 이동했다.

정섭과 오상렬이 도착한 곳은 장쭤린 부대의 본부였다. 중화민국이 자리를 잡기 전 쑨원이 만주와 몽골 일대를 군벌 장쭤린의 지배하에 두도록 용인한 이후 장쭤린은 명실상부 만주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본부는 세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정면에 붉은 별돌로 된 서양식 건물이 있었다. '大帥府(다슈아이푸)'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 일행은 다슈아이푸 동쪽에 '軍事廳(군사청)'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을 지나 뒷 편의 '小廳(소청)' 간판이 붙은 건물 앞에 섰다.

오상렬을 업고 소청에 들어가자 기차 객실 같은 형태의 방들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한 곳 의료진이 있는 곳으로 가 오상렬을 내려놓자 정섭은 밖으로 나왔다. 조선인 군인은 정섭을 데리고 숲에서 만난 대장에게 데려갔다. 가는 도중에 조선인 군인은 정섭에게 여기가 '장쭤린 대원수가 계신 펑톈군 본부'라고 말했다. 어젯밤 김의한이 위웬칭에게 장쭤린이 군벌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 생각났다.

정섭은 대장에게, 그들이 상해임시정부의 요원이고, 동농선생의 밀명을 받고 밀산으로 가는 중이며, 일본군의 검문을 피해 어렵게 이동하다 이번에 일본군 헌병대와 기차에서 만나 총격전 끝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아까보다 상세하게 말했다. 대장은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약 삼십 분이 지났을까, 의료진 한 명이 와서 조선인 군인에게 귓속말을 했다.

"깨어났다."

정섭은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섭과 조선인 군인이 소청으로 뛰다시피 가자 마침 오상렬이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정섭은 오상렬을 끌어안았다. 오상렬은 가슴에도 타격을 입었는지 '악' 하는 소리를 질렀다.

"정섭 동지, 아픕니다."

오상렬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섭이 얼른 떨어져 오상렬을 살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슈아이푸의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접견실 벽난로 옆에는 커다란 만주 지도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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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호텔에서 마적이 야스카와를 처형하고 호텔을 나간 직후 사람들이 아직 공포에 쌓여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김의한은 재빨리 '야스카와!'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야스카와 위로 쓰러졌다. 정정화조차 깜짝 놀라 김의한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박영만은 입을 쩍 벌린 채였다. 야스카와 위로 쓰러진 김의한은 아무도 모르게 야스카와의 품에서 권총을 꺼내 자신의 품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야스카와와 아는 사이의 청년인 것으로만 볼 뿐 아무도 그가 권총을 꺼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현장에 온 일본군이 요란하게 호텔에 들어와서 야스카와의 시체를 들고 나갔다.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가 왜군이 나가자 제자리에 앉아 창밖을 쳐다봤다. 그제서야 김의한 일행도 찻집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간도참변이 일본 경찰과 마적의 조작 사건이라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한 이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 주범이 야스카와라는 사실, 그가 공모한 마적이 장지앙하오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장지앙하오에 의해 야스카와가 처형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록 자신들의 손으로 처형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어느덧 시간이 꽤 흘러 다섯 시가 넘고 있었다. 이들이 일차로 정한 접선 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상렬과 정섭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은 야마토호텔 찻집 구석에서 초조하게 이들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들이 인식하지 못하던 중에 시커먼 자동차 한 대가 호텔 앞에 섰다. 운전석에서 청회색 군복을 입은 장교 하나가 내렸다. 호텔 앞에 있던 직원이 얼른 뛰어가 허겁지겁 와서 꾸벅 인사를 했다. 길가는 사람들이 더러는 서서, 더러는 지나가면서 이 모습을 바라봤다. 뒷문이 열리면서 머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오상렬이 내렸다. 뒤이어 정섭이 내렸다.

호텔 안에서 무심하게 창밖을 보고 있던 정정화가

"어?!"

하는 소리를 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의한도 뒤이어 같은 소리를 내고 일어났다.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영만은 무슨 큰일이 났나 하고 뒤따라 뛰었다.

"오상렬 동지!"

"정섭 동지!"

뛰어간 정정화가 오상렬의 머리를 살폈다. 한쪽에 피가 베여있었다.

"오상렬 동지, 어떻게 된 겁니까?"

오상렬이 대답 대신 뒤를 돌아 자신을 데려다준 군인에게 인사를 하고 중국말로 동료들을 소개했다. 각자 되는대로 인사를 하고 악수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 오상렬이 일행에게 차에 타라고 했다. 모두들 의아한 가운데 소지품을 챙겨 차에 올랐다. 장교가 직접 운전하고 오상렬이 조수석에 앉았다. 뒷자리에는 좁으나마 네 명이 앉았다. 차는 창춘역으로 향했다. 창춘역에 내린 일행을 데리고 장교가 간 곳은 러일 합동 수화물 통관소였다.

장교가 러시아인 책임자와 유창한 러시아어로 반가운 인사를 한 다음 뭔가 길게 설명을 했다. 러시아 책임자가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부관을 불렀다. 부관에게 뭔가 지시를 하자 부관이 따라오라는 신호를 했다. 일행이 나간 후까지 장교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다가 잠시 후 나왔다.

일행은 러시아 수화물 통관소를 통해 검표 없이 기차에 올랐다. 하얼빈을 거쳐 무단장으로 가는 8시 기차였다. 좌석은 전용실이 있는 특별실이었다. 러시아인 부관이 일행을 좌석에 데려다 놓고 장교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장교가 오상렬에게 중국말로 상황 설명을 했다. 오상렬이 통역했다.

"기차표 삯은 장쭤린 대원수께서 치루셨다고 합니다. 다섯 명의 인원이 한자리에 편히 갈 수 있도록 특별실로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쭤린 대원수께서 러시아 통관소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우리가 검문을 받지 않고 기차를 탈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모두들 '하' 하며 감탄했다. 장교가 작별인사를 했다.

"창춘 이후로는 러시아가 관할하기 때문에 아마 왜군의 검문은 없을 겁니다. 무단장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겁니다. 하시는 일에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들 감사하다는 인사를 여러번 한 다음 장교가 겨우 떠났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얼마 후 기차가 "꽥" 하는 소리를 내고 천천히 출발했다.


##1980년, 평양, 안가

어둠이 내렸다. 수현이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달빛만 밝을 뿐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식기를 내놓은 후 침대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꽝'

하는 굉음이 온 건물을 진동시켰다. 수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지?'

하는 순간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군인들의 소리치는 소리, 뛰는 소리가 이어졌다. 수현이 창밖을 보니 건물 뒤편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그때,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선글라스를 쓴 아시아계 남자가 들어왔다. 요시오 오모리였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일본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로 말했다.

"김수현 씨, 저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누구...?"

"요시오 오모리라고 합니다.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소속 책임자입니다. 대화는 나중에 하고 지금 바로 이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수현은 망설였다. 빠져나갈 기회이긴 했지만, 일본 정보국에 의지한다는 것도 위험하다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더구나 여기는 북한 땅이 아닌가.

"어서요!“

요시오가 재촉했다.

이번에는 밖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현은 재빨리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 요시오를 따라나섰다.

복도에 나오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자욱한 연기로 앞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요시오는 수현의 손을 잡고 뒷문으로 향했다.

"건물 후문으로 갑니다. 우리 대원들이 그쪽을 확보했습니다."

복도 끝에서 북한군 두 명이 나타났다.

"거기 서라!"

그들이 소리쳤다.

요시오는 재빨리 권총을 꺼내 두 발을 쏘았다. 군인들이 몸을 숙여 피하는 사이, 요시오와 수현은 후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엎드려요!“

요시오가 외치며 수현을 벽 뒤로 끌어당겼다.

후문 쪽에서 북한 군인 두 명이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섬광탄이 터졌다. 그 바람에 북한군이 몸을 움츠리는 순간 두 명의 일본 요원이 뛰어 들어와 북한군의 머리를 가격해 쓰러뜨렸다.

"갑시다!"

요시오가 수현의 팔을 잡아끌어 밖으로 뛰었다. 후문 앞에 검은색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요시오는 수현을 차에 밀어 넣고 자신도 재빨리 탔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뒤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차는 급가속하며 안가의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은 불을 끄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단봉을 박살 내며 차는 숲길을 향했다. 잠깐 시간이 흐르는 듯했으나 뒤에서 한 대의 지프차가 쫓아오고 있었다. 운전석의 일본 요원이 핸들을 급하게 돌리며 지그재그로 달렸다. 뒤차에서 총성이 들렸다.

"엎드려요!“

요시오가 수현의 몸 위에 자신을 겹쳤다. 다행히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요시오가 창문 밖으로 권총을 겨누고 반격했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차가 좁은 골목길로 급선회하며 진입하자 뒤따르던 지프차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 부딪혔다. 차의 보닛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따돌렸네요.“

요시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오는 차가 더 이상 없는 것을 확인한 요시오가 수현에게

"지금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김의한 선생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수현 역시 할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 말에 동의하고, 김의한이 대동구역에 있다는 말을 김동철이 한 것을 기억해 냈다.

"대동구역... 맞아요, 대동구역이라고 했어요. 그곳에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했어요"

요시오가 운전하는 요원에게 일본말로 지시했다.

"대동구역으로 방향을 잡아.“


##1980년. 평양. 대동구역

얼마 후, 그들은 대동구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김의한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매한가지였다. 천천히 차를 몰던 그들 앞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학생들의 옆으로 가 속도를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따라가며 창문을 열었다.

"학생들“

하고 수현이 학생들을 불렀다. 학생들이 경계 없이 수현을 바라봤다. 차도 학생들도 제자리에 섰다.

"이 동네 살아요?“

하고 말하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혹시 대동구역에 남에서 오신 어른들이 사는 집이 어딘지 알아요?"

두 학생이 서로 얼굴을 보고 뭔가 이야기하더니, 손가락으로 차가 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저 길 끝에 한옥이 하나 있습네다. 그곳에 남에서 오신 어르신 두 분이 사십네다."

"고마워요, 학생들"

창문을 닫고 차는 곧장 가던 방향으로 계속 달려 한옥에 닿았다. 그들은 차를 한옥 뒤에 숨기고 조심스럽게 대문으로 향했다. 집 주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아직 수현이 탈출한 여파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은 듯했다.

대문에는 '김의한' '엄항섭' 문패가 달려있었다. 이름을 보자 수현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수현이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고, 젊은 당번 학생이 나왔다. 김의한 선생이 계신지 물어보고, 손녀 수현이 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말했다. 천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안에서 후다닥 소리가 났다. 이윽고 대문이 열렸다.

김의한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엄항섭은 옆으로 반 발짝 뒤에 있었다. 수현이 천천히 김의한에게 다가갔다. 김의한의 눈에서 눈물을 흘렀다. 수현이 김의한에게 가만히 안겼다.

"할아버지..."

"수현아..."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두 사람이 떨어지자 함께 눈시울을 붉히던 엄항섭이 뒤에 서 있는 요시오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수현이 요시오를 소개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수현은 안가에 갇힌 이야기, 요시오가 자신을 탈출시킨 이야기, 대동구역에 오게 된 이야기 등을 짧게 설명했다. 소파에 앉자 수현이 김의한과 엄항섭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몇 장의 사진을 내 보였다. 임시정부 시절 찍은 사진들, 그리고 수현 부모님 사진, 수현이 어릴 때 사진, 나이 든 정정화가 설악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등이었다. 김의한이 사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눈에서 눈물 방울이 툭 떨어졌다.

"이 할멈, 많이 늙었네... 그래도 곱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아직 혼자 사시고요."

"..."

"팔순 잔치 때 곽태영 선생께서 소원이 뭐냐고 물었는데, 그때 할머니가 '내 나이가 많아서 다른 건 없고, 그저 통일이 되는 걸 봤으면 하는 소원은 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의연하던 김의한이 그 말을 듣자 소리 내어 '꺼꺼' 울었다. 엄항섭이 '성엄...' 하며 김의한의 등을 쓸어주었다. 엄항섭의 눈에도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현이 다가가 김의한을 끌어안았다.

초조한 요시오가 쭈뼛거리며 김의한에게 말했다.

"선생님, 손녀를 만난 기쁨은 이해하지만... 북한군이 곧 들이닥칠 겁니다. 두 분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빨리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김의한이 요시오를 빤히 본 후, 소파 탁자 아래 서랍을 열어 밀봉된 봉투를 꺼내 수현에게 주었다.

"말로 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이걸 할머니에게 전해 주렴."

김의한이 내미는 봉투를 받아 가방에 넣은 수현이 김의한에게 물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정리해 둔 노트 같은 게 있어요? 정신대나 친일파 관련 기록이라고 하던데..."

김의한이 요시오를 한번 쳐다본 후 말했다.

"모든 기록은 남에 있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 편지에 써놨으니 할머니에게 잘 전달하거라."

요시오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수현이 정섭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 혹시 박정섭이라는 사람 알아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상해에서 활동하실 때 상해에서 만났었다고 하던데."

김의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엄항섭을 바라보았다. 엄항섭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때 바깥이 소란하더니 대문을 험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행의 눈이 모두 대문을 향했다.


(제13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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