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이념의 칼날

by 정섭


제14화 이념의 칼날


##1921년 5월. 자유시(스보보드니)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한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는 1921년 초 밀산을 떠나 아무르강 유역의 러시아 영토로 이동을 시작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극동에 세운 완충국인 극동공화국의 협조로 독립군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지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를 경유하여 서북쪽 자유시로 향했다. 자유시는 러시아 지명 스보보드니(Svobodny, 자유로운)를 번역해서 한인들이 부른 지명이었다. 이들은 자유시 인근 이만과 수라셰프카 등지에 임시 주둔하며 재편을 모색했다.

이 무렵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일대의 한인 무장부대와 항일의병 유격대도 자유시로 집결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유시 일대에 최종 집결한 한인 무장세력은 모두 4,500명에 달했다. 1921년 3월 미사노프에서 열린 한인 대표자 회의에서 모든 독립군을 통합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자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편제와 지휘체계 문제를 두고 갈등의 불씨가 점화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군은 크게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어 있었다. 밀산에서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이 대표적인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혹은 비(非)공산주의 성향의 독립군이었다. 반면 사회주의 계열은 러시아령에서 활동하던 고려공산당의 무장부대였다. 이들 고려공산당 무장부대는 이른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두 개로 나눠져 있었다. 갈등의 불씨는 사회주의 계열의 이 두 개 분파에서 싹트고 있었다.

상해파는 나중에 임시정부 국무총리까지 되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에서 출발했다. 1921년 5월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 등 상해 임시정부 참여 세력이 고려공산당 상해파가 되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은 최초의 한인 공산조직이기도 한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강해 임시정부와도 협력했던 세력이었다. 이동휘는 노선 차이로 결국 결별하긴 했지만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참여할 정도로 임정과 인연이 깊었다.

이 상해파 계열에는 박일리아가 지휘한 니콜라옙스크의 이항군대, 최니콜라이의 다반군대 등 연해주 의용군 부대들이 속했다. 상해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소비에트 극동공화국 정부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하나의 파벌인 이르쿠츠크파는 1919년 김철훈과 오하묵 등이 이르쿠츠크에서 조직한 러시아 한인공산당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볼셰비키당의 한인지부로서 정통 공산혁명을 지향했고, 연해주 한인 자치정부인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이 대한국민의회는 3.1 운동 직후 이동휘, 문창범 등이 러시아령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한 임시정부로, 흔히 ‘노령임시정부’로 불렀다. 노령임시정부의 정식 명칭이 대한국민의회였고, 그 뿌리는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해산 직후 연해주에 망명한 의병 조직이었다. 노령임시정부, 즉 대한국민의회는 한성임시정부와 함께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한 주체였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도 이런 통합의 결과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상해임시정부와의 정부 통합에 반발했던 세력에 의해 지속되었다. 이 대한국민의회가 이르쿠츠크파의 기반이어서, 상해 임정 지지세력인 상해파와는 임정 통합 이전부터 갈등을 빚었다.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 무장부대는 오하묵, 최고려 등이 지휘하는 대한국민의회 산하 한인보병자유대대였다. 자유대대는 초기에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반일 유격전을 펼치기도 했었다.

자유시에 모인 이들 다양한 한인 무장세력의 통합 지휘권을 둘러싸고 특히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정면으로 대립했다. 상해파는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먼저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이라는 통합군을 조직하려 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이에 반발하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통해 별도의 고려혁명군 지휘체계를 세우려 했다. 이처럼 소비에트 극동공화국과 코민테른 본부 간의 대립을 배경으로 두 파벌이 경쟁하면서, 한인 독립군 통합은 순탄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1921년 5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

정섭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밀산에 도착했을 때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된 독립군은 이미 자유시로 떠난 다음이었다. 마부를 무단장으로 돌려보내고 난 후 이들은 김좌진의 숙소를 찾았으나 이미 김좌진은 떠나고 없었다. 집주인이 전해 준 서신에는 밀산에 도착하는 즉시 자유시에 와서 합류하라고 되어있었다. 일행은 쉴 사이도 없이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시베리아횡단철도에 몸을 실었다.

이들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용이하게 이용하게 된 데는 특별한 배경이 있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있던 1920년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비밀 외교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극동 시베리아에 한인 독립군이 집결하는 것, 군사장비와 무기를 지원하는 것,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독립자금을 지원할 것 등을 약속했다. 이 협정 덕에 대한독립군단과 김의한 일행이 극동 시베리아에 있는 자유시로 이동하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이었다. 부족한 군사장비와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어쩌면 꼭 필요한 협정일 수도 있었다.

극동공화국이 제공한 열차 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거쳐 아무르강이 흐르는 자유시에 도착한 일행은 대한독립군단 깃발을 찾아 김좌진 장군의 막사를 찾아 들어갔다.

오상렬이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보통 사람보다 훌쩍 큰 키에 갸름한 얼굴, 넓고 환한 이마, 깔끔하게 정리된 카이저 콧수염과 턱수염, 한 마디로 위풍당당한 장군의 풍모였다. 오상렬이 경례를 하자 뛰다시피 다가온 장군은 오상렬의 양 어깨를 잡고 힘 있게 두들겼다.

"고생했네, 오상렬 동지"

"아닙니다. 장군님. 오상렬, 임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상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오상렬을 안았던 남자가 뒤로 물러나 오상렬을 살폈다. '몸은괜찮은가?'를 묻고 나서 일행에게 눈을 돌렸다. 오상렬이 일행에게 김좌진을 소개했다.

"김좌진 장군이십니다."

일행은 모두 감격에 겨운 얼굴로 인사했다. 정섭 역시 역사책에서만 보던 김좌진을 마주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자리에 앉은 후 김의한이 동농의 밀서를 김좌진에게 전달했다.

겉봉을 찢어 내용을 보는 김좌진의 눈썹이 떨렸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자가 적혀 있었다.

'求同存異 斬釘截鐵 (구동존이 참정절철)'

김의한에게는 익숙한 글귀였다. 구동존이는 동농 평생의 신념 같은 글귀였다. 서로 다른 의견과 입장 차이가 있더라도 공통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협력하고, 서로 다른 견해는 존중하면서 화합을 도모하는 자세를 말한다. 민족의 단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동농의 단결의 원리였다. 참정절절은 못을 베고 쇠를 자른다는 의미로, 송나라 때 주희가 군주의 결단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군주가 문제를 처리할 때의 자세가 과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었다.

김의한이 글귀를 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대동단결하되, 만약 문제가 생기면 과감하게 처리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동농의 말을 전했다.

"장군님, 저희가 상해에서 출발할 때 아버님께서 장군님께 전하라신 말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려움에 처하면 반드시 내부에 이견이 생길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대동단결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불필요한 희생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김좌진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차이를 인정하라... 그 가운데 대동단결하라... 불필요한 희생을 막아라..."

"제 생각에도, 만약 이념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념만을 강요한다면 대동단결은 어려울 것이 분명합니다."

김의한의 말에 김좌진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이 날로 심해지고 있어. 상해파의 박일리아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파의 오하묵도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잠시 생각에 잠긴 김좌진이 말을 이었다.

"상해파는 코민테른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은 최초의 한인 공산조직이지만,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를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입장이야. 상해임시정부와 통합 당시 노령임시정부, 즉 대한국민의회의 기본 노선이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곤 모두를 보며,

"반면 이르쿠츠크파는소비에트 볼셰비키당의 한인지부 성격이 강해. 정통 공산혁명을 지향하는 것이 기본 노선이야. 현재 대한국민의회의 입장이고."

말하고 김의한을 보며 말했다.

"동농 선생께서는 이런 차이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예견하신 것 같네. 만약 대동단결하지 않으면 일제에 맞서 싸우기도 전에 우리 내부에서 심각한 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보신 것이야."

정섭은 3.1 운동 직후 동농 김가진이 국내에서 만든 항일조직의 이름이 '대동단'인 것을 생각하고 이런 깊은 뜻이 있음에 놀랐다. 김좌진이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내일 미사노프에서 한인 대표자 회의가 열린다네. 모든 한인부대를 통합한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조직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야."

"그렇다면 대한독립군단, 상해파, 이루크츠크파가 모두 대한의용군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간단하지가 않아. 밀산에서 구성한 우리 대한독립군단은 별문제가 없지만, 같은 사회주의 계열인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루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서로에 대한 견제가 너무 심하다네."

바로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더니 잠시 후 젊은 장교 하나가 막사 앞에서 말을 내렸다.

"장군님! 급보입니다!"

장교는 뛰어들어오며 소리를 쳤다.

"박일리아 동지가 극동공화국 군 당국과 접촉을 했다고 합니다. 내일 회의에서는 박창은 동지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모든 한인부대를 대한의용군에 편입시킬 계획을 관철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김좌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극동공화국은 러시아 극동 지역 시베리아에 세운 일종의 소비에트 괴뢰국이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적백내전을 벌이는 동안 소비에트의 권력이 미치지 않았던 이 지역에 일종의 완충을 위해 세운 나라였다.

"박일리아는 상해파를 이끌고 있네. 러시아가 극동지방의 지배를 위해 만든 극동공화국과 접촉해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구체적인 실행에 들어간 것 같군."

김의한이 물었다.

"장군님. 그런데 그게 무리 없이 진행된다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이르쿠츠크파의 반발이 심해서 일방적으로 하면 분명 문제가 생길 거네."

김좌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김의한을 바라보고 말했다.

"성엄, 자넨 지금 임시정부 고문이신 동농 김가진 선생의 밀사로 여기 자유시에 온 것이지?"

"그렇습니다만..."

"그럼 바로 그 자격으로, 내일 회의에 자네가 나서주게.임시정부를 대표해 모든 파벌이 단합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주게나."

임시정부가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와 비밀 외교협정을 체결할 당시, 극동 시베리아에서의 독립군 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임시정부도 소비에트에 약속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독립군의 적군(赤軍) 편입과 군사지휘권 수용이라는 조건이었다. 이 협정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일본과의 관계 등 국제관계의 현실을 감안해 비밀에 부쳐져 독립군 사이에 공식적으로 전파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노령에서의 한인독립군의 활동이 가능했고,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영토인 자유시로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김좌진이 김의한에게 단합을 위한 발언을 요청한 것이었다. 김의한은 잠시 망설였다. 김의한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김좌진이 말했다.

"내가 애초에 동농 선생께 밀산에 오시라고 청한 뜻을 기억하게. 선생님께서 지금 여기 계시다면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것일세. 그 일을 할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는 자네뿐이야."

아직 젊디젊은 김의한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준비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독립군의 미래가 걸린 자리에 발언을 한다는 것의 무게에 눌려 김의한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정정화가 김의한에게 힘을 줬다.

"성엄은 예관 선생께서 '도시 담'이라고 부른 분입니다. 하실 수 있습니다."

박영만도

"임시정부를 대표해서 발언하는 것은 지금 이 시국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고 김의한에게 힘을 실었다.

이윽고 김의한이 '그렇게 하겠다'라고 답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 1921년, 자유시, 미사노프 회의장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자유시 인근 미사노프 지역에는 독립군 부대의 대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섭은 김의한, 정정화, 오상렬, 박영만과 함께 회의장으로 향했다. 역사 속에서만 봤던 인물들이 하나둘 회의장에 모였다.

"저기 보이는 분이 홍범도 장군이시군요."

정정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저수염을 기른 역전 노장이 의연한 모습으로 부하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봉오동전투에 참전했던 대한국민회군의 안무도 보였다.

김의한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젯밤 김좌진과 함께 발언문의 내용을 대략 정리했지만, 막상 이런 큰 회의에서 임시정부를 대표해 발언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눈치챈 정정화가 김의한에게 낮게 말했다.

"성엄. 아버님을 대신한다 생각하고 자신 있게 말해요. 오늘 모이는 사람들은 조선의 해방을 가장 열렬히 원하는 사람들이니 그것만 생각하고 발언하세요."

회의장인 옛 러시아 관청 건물 앞에는 이미 100여 명의 대표들이 모여있었다. 정섭은 그들의 얼굴에서 희망과 걱정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청산리 대첩의 승리 후 일제의 대량 학살로 내몰리듯 북만주에서 이곳까지 쫓기든 온 이들,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 속에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해온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앞으로의 불확실한 진로를 결정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박일리아가 앞으로 나서 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상해파의 핵심 인물답게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여러분, 우리가 이곳 자유시에 모인 것은 일제를 물리치고 조선 광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과거의 크고 작은 차이들을 극복하고 하나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박일리아의 연설이 이어졌다. 그는 능숙하게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의 박창은 동지를 총사령관으로, 러시아의 혁명 경험이 풍부한 그리고리예프 동지를 연대장으로 하는 새로운 지휘체계를 제안합니다."

'와' 하는 함성과 박수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회의장 뒤편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이르쿠츠크파 대표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박일리아가 연설을 마치자, 박창은이 일어나 연단에 섰다.

"동지 여러분,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에서 활동하는 박창은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이르쿠츠쿠파 지도부의 일원인 오하묵이었다. 오하묵은 러시아의 한국계 청년이었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초기 공산주의운동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 연해주 독립군들의 지휘권을 가져가려 합니까? 우리에게는 대한국민의회라는 엄연한 정부가 있습니다!"

대한국민의회는 노령임시정부를 말하는 것이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된 이후에도 독자적인 세력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소비에트 적군파에 가담하는 등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조직으로 변하고 있었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오하묵 동지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박창은이 침착하게 응수하려 했지만, 이미 양측의 대립은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었다.바로 그때, 김좌진이 일어섰다.

"잠깐,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서로 다투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에 회의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왜놈들이 가장 좋아할 일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끼리 분열하는 것 말입니다."

김좌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분의 뜻을 먼저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든 시선이 김좌진에게 집중되었다.

"상해임시정부 고문이신 동농 김가진 선생께서 아들인 김의한 선생을 보내 우리에게 특별한 뜻을 전하고자 하십니다. 김의한 선생은 일어나 상해임시정부의 뜻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이르크추크 측의 반대가 나왔다.

"상해임시정부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 연해주 독립군들의 지휘권을 가져가려 합니까? 우리에게는 대한국민의회라는 엄연한 정부가 있습니다!"

김좌진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대한국민의회가 활동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지들은 상해임시정부가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한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또한, 상해임시정부가 코민테른과 비밀 군사협정을 맺은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여기까지 말한 김좌진이 일동을 훑어본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노령 자유시에 모여서 독립군의 기반을 다지고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상해임시정부가 코민테른과 맺은 협정 때문임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하는 겁니다."

구구절절 옳은 김좌진의 말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게다가 당시 노령에서도 동농 김가진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전설 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 전하는 메시지라면 귀 기울일 만했다.

김좌진 옆에 앉아 있던 김의한이 천천히 일어서 연단으로 걸어갔다. 정섭은 그의 떨리는 손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동지 여러분..."

연단에 나선 김의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곧 힘을 내어 다시 말했다.

"저는 동농 김가진 선생의 아들 김의한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이신 동농 선생의 뜻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휘권을 갖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동농 선생께서 이곳에 계신 모든 독립군 동지들께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정섭은 긴장하며 김의한을 지켜보았다.

"동농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의 광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김의한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단합된 힘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부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쳤을 때 우리보다 월등한 무력을 가진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의장 곳곳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해파든 이르쿠츠크파든, 대한독립군단이든, 혹은 상해임시정부든 대한국민의회든, 우리 모두는 같은 조선 사람입니다. 일본의 총탄은 우리가 어느 파에 속하든 상관없이 우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김의한의 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창은 동지가 총사령관이 되든, 다른 누가 되든, 중요한 것은 그 지휘 아래서 우리 모두가 한 대오로 왜군과 싸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히 대한독립군단 쪽에서 열렬한 반응이 나왔다.

"동농 선생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김의한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마지막 사자후를 토했다.

"'조선의 젊은이들아, 너희들이 분열하면 대한은 망하고, 너희들이 뭉치면 대한은 산다!'"

회의장이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 김의한의 연설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취를 한 것처럼 보였다. 김좌진도, 정정화, 오상렬, 박영만, 정섭 모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르쿠츠크파 쪽에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들이 보였다.

김의한이 인사를 하고 연단 옆으로 나가자 박창은이 다시 연단에 나섰다.

"김의한 동지의 말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동농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저는 모든 동지들과 함께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오하묵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르쿠츠크의 동지들과도 손을 잡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하묵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의한 동지의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의 동료들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이 문제는 극동 소비에트 한인들끼리의 문제입니다. 상해임시정부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다시 긴장되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단 옆에 서있던 김의한이 연단에 나서 다시 목청을 높였다.

"지금 이 자리에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의 전공을 세운 대한독립군단도 있습니다. 극동 소비에트 한인들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한 김의한이 절충안을 내놨다.

"동지들. 함께 일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서로 인정하고, 공동으로 지휘체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냐'라고 오하묵이 소리쳤다.

"가능합니다!“

김의한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휘관이 되든 상관없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면 됩니다."

오하묵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김의한 동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대한국민의회의 자치권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양측이 합의해서 내려야 합니다."

박창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회의장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때 회의장 뒤편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한 사내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긴급 상황입니다! 극동공화국 당국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곧이어 러시아 군복을 입은 장교 두 명이 들어왔다. 연단에 올라온 그들 중 한 명이 러시아어로 무언가 말했다.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박일리아가 그 내용을 통역했다.

"극동공화국 정부에서는 한인 부대들의 통합을 환영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모든 군사 활동은 극동공화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회의장이 다시 술렁거렸다.김좌진이 일어섰다.

"그것은 우리의 자주성을 해치는 것 아닙니까?"

러시아 장교가 다시 말했고, 박일리아가 통역했다.

"코민테른에서도 오늘의 이 회합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혁명 세력은 국제적 연대의 원칙 하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합니다."

오하묵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연단 아래로 내려오던 김의한이 연단 아래에서 연단을 보고 외쳤다.

"러시아 동지들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인의 일은 우리 스스로 결정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회의장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회의는 결국 임시적인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박창은이 총사령관이 되고, 오하묵이 부사령관을 맡기로 했다.회의가 끝난 후, 김의한, 정정화와 함께 밖으로 나온 정섭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김의한 동지, 고생 많았소.“

김좌진이 김의한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장군님. 장군님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김의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불안합니다. 겉으로는 합의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김좌진이 문제의 핵심을 말했다.

"문제는 소비에트 러시아, 즉 코민테른의 태도네. 적백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끝난 마당에 극동공화국조차 온전한 권한을 갖게 될 지도 보장이 안 되네. 만약 독립군의 군사행동을 통제하려는 극동공화국의 입장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시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일세."

오상렬이 김좌진에게 말했다.

"장군님. 향후 코민테른이 어떻게 나올지를 고려해 우리 대한독립군단의 태도를 결정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서일 총재님과 말씀을 나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좌진이 '그러마'라고 나갔다. 오상렬이 김의한에게 말했다.

"김의한 동지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김의한 동지의 발언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이 대한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김의한이 계면쩍어하자 모두들 김의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일행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은 불길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1980년 5월. 평양.

대동지구 김의한의 집에서 수현은 김의한, 엄항섭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수현도 김의한도 감격에 겨운 만남이었다. 존재조차 몰랐던 손녀와 30년 만에 만난 김의한이었다.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낸 세월을 하룻밤 사이에 메우려는 듯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수현이 김의한의 북에서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북에 오신 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김의한이 감회에 젖은 눈빛을 하고 대답했다.

"전쟁통에 느닷없이 북으로 올 때는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돌아가려고 애를 많이 썼단다. 그게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지냈지."

엄항섭이 수현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같이 온 동지들이 있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단다. 우리 중에 성엄이 특히 가족을 많이 그리워했단다."

김의한이 엄항섭을 보고 말했다.

"일파가 고생이 많았지. 북의 통일정책과 다른 사상을 가진 혐의로 구금되기도 했고, 조소앙 선생이 일파의 무고함을 알리기 위해 무리하게 단식투쟁을 하셔서 끝내 돌아가시기도 했으니까."

수현이 숙연한 마음에 김의한의 손을 잡았다.

"사시는 건 힘들지 않으셨어요?"

"북측에서는 본인들이 모셔왔으니 대우를 잘 안 할 도리가 없지. 다만 어떻게든 이용하려고는 했지.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진 않지만 말이야. 당번 학생도 붙여주고 해서 사는 건 크게 힘들지 않았지."

엄항섭이 말을 덧붙였다.

"당번 학생들 가운데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경우에는 명절에 찾아오기도 한단다. 성엄 당번 학생 하나는 평양소년궁전 책임자가 돼서 요즘도 간혹 온단다."

"이번에 선양에 갔을 때 김동철 씨도 그분에게 할아버지 안부를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살아온 이야기가 끝날 즈음 수현이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할아버지, 제가 있는 줄은 아셨어요?"

김의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몰랐다. 자동이에게 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어. 연락이 끊긴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럼 아버지 소식도 모르시는 거예요?"

"그래. 자동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무 것도 몰랐어."

김의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갑자기 손녀가 나타나다니..."

수현이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 아버지는 잘 지내세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조선일보에 들어가셨다가 조용수 사장의 권유로 민족일보에서 1년가량 일하셨대요."

김의한이 민족일보라는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민족일보 사건으로 조용수 사장이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사형당하고 실의에 빠져 계시다가 지금은 미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고 계세요."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들어서 안다. 자동이 민족일보에 있었구나... 그 와중에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김의한의 우울한 모습에 수현이 화제를 바꿨다.

"할머니는 제가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 하셨는데, 정말 많이 닮은 것 같아요."

김의한이 수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오히려 젊은 시절 네 할머니와 꼭 닮은 것 같은데."

엄항섭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나도 젊은 수당이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니까."

모두 '하하' 웃었다. 밤이 깊어지자 김의한이 일어나 방에 들어가 오래된 나무상자를 들고 나왔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세로로 긴 족자였다.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한지에 정성스럽게 말려 있었다.

"이게 뭐예요?" 수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김의한이 조심스럽게 족자를 펼쳤다. 그 안에는 산자락에 위치한 바위 하나를 배경으로 흰 구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세로로 '白雲洞天'이라는 힘찬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백운동천..." 수현이 읽어보았다. "이게 뭐예요?"

"내 아버님, 그러니까 수현이 너의 노할아버지인 동농 선생이 직접 그리고 쓰신 것이다. 1920년 상해에서 그리신 거야."

김의한이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

"고종 황제께서 아버님에게 하사하신 별장이 사직동에 있는 백운장인데, 이 그림의 배경이 바로 백운장이란다."

"백운장이요?"

"그래. 백운장. 혹 아는 곳이니?"

"아뇨. 백운장은 어른들 말씀하실 때 들은 적은 있지만 모르는 곳이에요."

김의한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결국 찾지 못했다는 말이구나."

수현이 물었다.

"찾지 못했다니, 빼앗겼다는 말씀이에요?"

"그래. 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빼앗겼어. 해방 후에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전쟁통에 내가 북에 오면서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조차 없었고."

수현이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백운동천은 그럼..."

"아버님이 백운장에 있던 바위에 당신이 직접 쓰시고 새겨놓은 글씨란다."

김의한이 족자를 바라보며 깊은 추억에 잠겼다. 그러다 엄항섭을 한번 바라본 후 수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쑥스럽지만 수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수현도 엄항섭을 바라본 후 김의한에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잠시 귀 좀 빌리자꾸나..."

하더니 수현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조손간의 아름다운 모습에 엄항섭이 미소를 지었다.

수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정말이에요?"

김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할머니에게만 전해야 한다."

"네... 알겠어요."

수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의한이 족자를 다시 원상태로 둘둘 말아 상자에 넣고 수현에게 건내줬다.

"이것을 할머니에게 전해주렴. 이건 수당에게 오래전부터 주고 싶었던 선물이야."

수현이 족자가 든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할머니에게 꼭 전할게요."

수현이 마지막으로 꼭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지난번에 김동철 씨가 이야기했던 박정섭이라는 사람, 정말 모르는 분이세요?"

지난번과 똑같이 김의한은 엄항섭 쪽을 바라봤다. 엄항섭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도 매한가지였다.

"박정섭 군이 네 남자친구라는 건 사실이니?"

수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의한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구나. 정섭 동지가 네 남자친구라니...“


##1980 5월. 이성주의 죽음

이성주는 일주일째 소식이 없었다. 김태훈은 이성주의 고향 광주까지 다녀왔다. 분명 무슨 일이 난 것이 분명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길거리의 전파사 앞에서 사람들이 우산을 든 채 뉴스를 보고 있었다. 김태훈이 '뭔가?' 하고 사람들 뒤에서 고개를 들고 TV를 봤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젯밤 제3한강교 근처 한강에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이성주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이성주 학생이 사망한 경위를 확인 중이라고...'

김태훈이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어' '어' 하면서 비켜섰다. 뉴스에는 이성주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저... 저..."

김태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면에 나온 것은 분명 이성주였다. 학생증 사진과 자막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3학년 이성주'가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인 이성주 학생이 어젯밤 원효대교 근처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김태훈의 다리에서 순식간에 모든 힘이 빠져버렸다. 김태훈은 우산을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라고 할 수 없는 복받치는 감정이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이 김태훈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뛰었다.

"안 돼... 이런 일이...“

골목으로 접어든 김태훈이 벽에 기대고 주저앉아 오열했다. 눈물과 빗물이 섞여 김태훈의 얼굴을 적셨다.

멀리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방향에서

"독재 타도!“

"민주화 쟁취!“

하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최루탄 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탕, 탕, 타타탕, 타타탕...'

김태훈이 고개를 들어 눈물에 젖은 눈으로 골목 밖을 보다가 일어나 학교 쪽으로 걸었다. 학교 정문에서는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학생들이 몰려나와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너무 많은 숫자에 경찰도 감히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했다. 맨 앞 플래카드 글씨가 멀리서 김태훈의 눈에 들어왔다.

'이성주를 살려내라, 독재정권 타도하자'

김태훈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김태훈이 주먹을 쥐고 학교로 걷다가 전투경찰 대오를 지나자 정문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태훈을 향해 최루탄 쏘는 총소리가 태훈의 등뒤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타타탕, 탕, 타타탕...'

발밑에서 터진 사과탄의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얼굴로 훅 들어왔다. 콧물과 눈물이 빗물에 범벅이 되었다. 김태훈은 연기를 뚫고 정문을 향해 뛰었다. 연기가 걷히자 학생들의 맨 앞 대오가 나타났다. 김태훈이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본 대오의 학생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김태훈은 무리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 들어갔다.


(제15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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