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카펫 위의 가족: 딸의 진심, 우리의 추억

아놀드 슈왈제너거부터 톰 그루즈까지

by 호뚜니의 작은방

아놀드 슈왈제네거부터 톰 크루즈까지.


우리 큰딸의 취미 중 하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으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영화관에서도 포스터가 사라졌다.,

환경부의 일회용품 규제로 없어진 것도 있지만,

사실상 소비자가 받아야 할 ‘작은 기쁨’마저 사라진 느낌이라 좀 씁쓸하다.



지금까지 모은 영화포스터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엄마, 학교 빼먹고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 레드카펫 보러 갈래요!”
속으로는 ‘와우! 나도 가고 싶다!’를 외치며 말했지.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아무도 모르게 나가면 내가 인정해줄게. 담임 선생님께 문자 넣어줄게. 생리결석으로 한다.”

그리고 아침, 전화가 왔다.
헐, 딸이다.
“엄마, 나 전철이야.”
“알았어, 문자 넣어줄게. 잘 다녀와. 배고프면 꼭 뭐라도 사 먹고 들어가.”

출근 준비 중이던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회사 조퇴하고 올까?”라고 한다.
비록 함께 줄 서진 못하지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서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결국 우리도 마음 정하고 움직였다.
막내는 어린이집 다녀오고, 남편은 조퇴하고, 우리 가족은 레드카펫 현장으로 향했다.

5시쯤 도착했을까.
딸에게 전화가 왔다.
“사람 너무 많아. 잘 안 들려 엄마 아빠 와두 못들어와!!! "
걱정이 돼 입구를 서성이며 경호원에게 엄마로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못 들어가나요?”
“네, 지금은 어렵습니다.”
“미성년자인 딸아이가 새벽부터 여기 와 있다 해서 걱정돼서요…”
막내 7살 아이를 안고, 우리 부부는 불안함 가득한 부모의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경호원 아저씨가 조용히 입구 문을 열어줬다.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딸아이는 펜스를 잡고 젤앞쪽에서 , 큰 카메라들 사이에 얼굴만 쏙 보였다.
손을 흔들어 “우리 왔다!” 신호를 보냈다.
딸아이는 눈치 빠르게 우리를 알아보고 “어떻게 들어왔지?”라는 표정.
나는 어깨를 으쓱.
막내는 시야가 안 보여 아빠가 계속 안고 있었다.

그 순간 등장한 최고의 MC, 박경림!
분위기는 금세 활기차졌다.
터미네이터 퀴즈 이벤트가 시작됐다.

“심판의 날은 몇 월 며칠일까요?”
“터미네이터2에서 아놀드가 용광로에 빠질 때 남긴 말은?”

우린 막내를 목마 태워 껑충껑충 뛰며 시선을 끌었다.
박경림이 말했다.
“저기 뒤에 아버님, 정답은요?”
남편이 외쳤다. “아윌 비 백(I’ll be back)!”

나는 옆에서 마이크를 낚아채며 취임새를 넣었다.
“뚜뚜 뚜두뚜! 뚜두뚜뚜두!”
남편은 엄지를 들고 무릎을 꿇으며 완벽한 연기!

정답입니다!
우리는 터미네이터 굿즈 티셔츠를 받았다.



기사에 찍힌 남편 스티커가 아빠다 ㅋ


그리고 그 순간…
아놀드 슈왈제네거!
린다 해밀턴!
전설의 배우들이 등장했다.
사라 코너가… 눈앞에!

어릴 적 여름, 나도 사라 코너처럼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검정 나시에 검정청바지, 검정 군화까지.
나의 롤모델이었다.

배우들은 세월 따라 많이 늙었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느꼈던 설렘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젊음의 한 조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딸의 레드카펫 취미.
그날을 기점으로, 주지훈, 현빈, 류승룡… 수많은 배우들을 만나러 다녔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대리러 간’ 건 터미네이터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그리고 오늘.
2025년 5월 8일.
어버이날.
새벽 아르바이트를 나간 딸이 문자를 보냈다.
“할아버지 두 분께 전화드렸어.”

그리고 말했다.
“오늘 미션임파서블8 레드카펫이 잠실에서 열려.
톰 크루즈가 왔어! 한국은 벌써 12번째래!”




딸은 알바 끝나자마자 점심도 거르고 전철 타고 달려가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사진도 찍고 돌아왔다.
지친 얼굴에 “너도 이제 17살 때 같지는 않구나?” 웃음이 나왔다.
벌써 23살.




나는 이 딸아이의 취미가 부럽다.
좋아하는 걸 위해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쓰고, 진심을 다하는 것.
그게 결국 자신을 성장시키는 힘이 되지 않을까.

영화를 좋아하는 딸과 남편은 나랑은 영화관을 잘 안 간다.
“엄마, 질문 너무 많아.”
남편도 한마디 한다.
“나도 이 영화 처음 봐. 나도 몰라. 그냥 조용히 봐.”

나도 그 말에 웃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친구처럼, 속닥속닥 이야기하며 영화 보는 게 즐겁다.
그래서 앞으로도 영화는 그렇게, 편하고 재밌게 보고 싶다.




딸의 진심이 만든 여정,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난 가족의 추억.
오늘 어버이날.
우리는 부모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의 자식임을 기억하게 된다.
딸이 두 할아버지께 드린 전화 한 통이 그걸 일깨워줬다.

세상 돌아가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너,
엄마는 그게 참 고맙고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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