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튼 국제공항
여기는 공항이다.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밴쿠버로 여행을 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밤 10시 30분, 이제 제법 서늘한 밤공기가 가을을 알리는 듯하다. 그리고 보니 아들과 나, 둘 다 처음이라는 설렘에 잔뜩 취해 있는 것 같다. 처음으로 혼자서 여행을 다녀온 아들, 처음으로 혼자서 공항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려 보는 나. 둘 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다. 문자는커녕 전화도 잘 안 받는 녀석이 벌써 6번째 문자를 보내고 있다.
'On the plane'
'1 hour 20 minutes'
'20 minutes'
'5 minutes'
'3 minutes'
'Just landed'
혹시나 공항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칠까 봐 일찌감치 집에서 출발한 덕에 이곳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에드먼튼 공항 2층은 이륙하는 사람들을 위한 Departure 공간이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미련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걸 보니 오늘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그들의 발걸음에 설렘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 설렘보다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누군가를 눈물로 떠나보내야 하는 슬픈 장소이다. 벌써 부모님이 캐나다를 다녀가신 지도 7년이 지났다. 이제는 딸 보러 놀러 오시라고 부탁드리는 게 죄송할 만큼 두 분 다 건강도 약해지셨다. 이민자에게 있어서 이곳 공항 2층은 서운함과 그리움이 쌓이는 곳이다. 고맙게도 3층에는 검사대를 통과해 탑승 게이트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검열이 끝나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사랑하는 분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담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뒤를 쫓게 된다. 혹시나 자녀들이 눈물을 쏱아내지 않을까, 잘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노부모는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냉정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앞으로, 앞으로만 걸어가셨던 기억이 난다.
에드먼튼 공항 1층은 전 세계에서 이곳으로 도착한 사람들이 통과하는 곳이다. 인터내셔널 공항이지만 규모가 크지 않고 출구도 한 곳뿐이라 '길이 엇갈려 다른 출구에서 기다리면 어쩌나?' 같은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게이트가 투명 유리로 되어있어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멀리서부터 알아볼 수 있다.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 늦은 시간에도 게이트 주변으로 빼곡하게 사람들이 모여있다.
앳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수줍은 듯 꽃다발을 들고 게이트를 응시하고 있다.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강하게 추측해 보지만, 2% 희망으로 '엄마를 기다리며 꽃다발까지 준비했다면 얼마나 감동을 받을까?' 하며 주책맞은 생각도 해본다. 온화한 인상의 한인 노부부도 눈에 들어온다. 단정한 가디건 차림에 점잖아 보이는 어르신이 곱게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신 할머니 손을 꼭 잡고 계신다. 덤덤한 할아버지와는 달리 할머니 얼굴에선 설렘과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다. 조금 늦어지는 듯 하니 앉아서 기다리자고 설득하시는 할아버지의 잔잔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11시에 도착한다는 비행기는 정말로 늦어지는 듯하다. 아들이 나오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싶어 아까부터 핸드폰 카메라를 켠 채로 대기 중이었다. 폰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나와 똑같은 포즈로 핸드폰을 손에 들고 히샵을 쓴 여인이 옆으로 다가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큰소리를 내뱉는다.
"오 마이 갓!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심장이 너무 떨려서 더 이상은 못 견딜 것 같아"
정말 폰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속사포처럼 말을 쏱아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학을 떠난 딸을 기다리고 있어. 1년 만에 만나는 거야.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1년 만이라고!"
그녀에겐 딸을 기다리는 30분, 이 순간이 1년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지는 듯했다. 밤 12시가 되어 가건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순간에 머무르고 있다.
2층이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는 곳이라면, 1층은 오는 이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이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그들의 마음과 상황을 내 맘대로 상상해 본다.
가족여행을 다녀온 아이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하고, 반면 삶의 현장으로 돌아온 부모의 얼굴에는 전쟁터에 뛰어들 준비가 된 것 같은 결연한 눈빛이 보이는 듯하다. 얼마나 현실로 돌아오기가 싫었을까! 비즈니스여행을 다녀온듯한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고민 없이 익숙한 듯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아마도 장기간 차를 세워둔 주차장일 것이다. 벌써 밤이 늦었으니 출근 전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면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자들의 발길은 저 멀리서부터 차이가 난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도 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게이트를 통과하는 그들의 머리는 다른 사람들 보다 높이 올라와 있다. 목을 얼마나 쭈욱 뻗었는지 다른 이들보다 한 뼘은 길어져 있다. 나이를 예측할 수 없는 백발의 할머니가 손녀를 꼭 껴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에게 안긴 소녀의 어색한 미소와 움츠려든 어깨를 보니 멀리 떨어져 왕래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서로 더 가까워지고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빌어본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곧 사랑하는 이들을 또 떠나보내야 할 순간이 돌아올 테니 말이다.
공항은 참 신비한 곳이다.
무뚝뚝한 아들이 게이트를 통과하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양팔을 벌려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 이제 나보다 더 커버린 아들은 커다란 양팔을 벌려 따뜻한 온기로 나를 꽉 안아 주었다. 공항은 이렇게 서로 자연스럽게 끌어안게 되는 멋진 곳이다. 누가 보면 우리 모자도 몇 년 만에 상봉한 것처럼 애절한 모습이었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무뚝뚝한 아들의 포옹이 그립다면 가끔 이렇게 혼자 떠나보내는 여행도 좋을 것 같다.
"엄마 밴쿠버 가니까 한국 사람들이 많드라요? (한국말이 조금 서툴다) 엄마가 거기 있었으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거기서 엄마 생각이 났어요. 난 친구들 많이 만들었거든요." 한국교회에서 엄마를 생각해 준 아들이 고마웠다.
같은 시간, 딸아이에게도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다.
이 시간 딸아이는 미국 Hounda공항에 있다. 딸아이 역시 처음 혼자 떠나는 비행기 여행이다. 대학 친구들, 선배들과 첫 의료봉사를 떠난다. Hounda공항에서 12시간 채류 후 목적지인 Panama로 출발해 일주일 동안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다. 딸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공항의 모습과 느낌이 궁금해진다. 일주일 뒤면 난 또 공항에서 핸드폰 카메라를 켠 채 딸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가져올 많은 이야기들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슬프지만 이제 이 공항에서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초조한 행복감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출가한 아이들과 미래의 며느리, 사위 그리고 손주를 기다리는 색다른 설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너무 먼 미래 같아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비행기보다 빠른 눈 깜빡할 사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