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일 다이어리
<Day 4> 9월 24일
아침 일출이 참 멋진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빠에게 늘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드디어 가을 일출을 직접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이곳 시골마을은 가을일출 맛집이다.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일출에 반도 못 미치는 아름다움이었지만 아직 우리에게 60일이란 시간이 있으니 최고로 멋진 일출을 함께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너희들에게 상담할 일이 있다."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식탁 앞에 앉으신 아빠가 운을 떼셨다. 드디어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모양이시다. 아무리 여쭤봐도 수요일이 되어야 이야기해 줄 수 있다며 아무 말씀 없으시고 시계만 쳐다보시더니, 드디어 한국시간 수요일이 된 오늘아침 우리를 부르셨다. 아빠의 길고 긴 말씀의 요점은 바로 이렇다.
비행기 티켓팅을 하고 의사로부터 엄마의 시티촬영 결과를 들으셨다고 한다. 요로 결석일지 암일지 알 수는 없지만 엄마의 몸속에 7mm나 되는 덩어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혹시나 암일까 봐 노심초사하시며 2차 검진결과를 기다렸고, 감사하게도 결과는 요로결석이었다. 워낙에 큰 사이즈여서 수술을 하는 게 좋지만 엄마의 연세(74세)를 생각해서 수술보다는 시술을 하기로 하셨다. 오랜 시간 동안 결석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번의 레이저 시술로는 결석이 제거될 수는 없고 일주일에 몇 차례 씩 시도해서 몇 주 동안 계속 시술을 받으셔야 한다는 의사 소견이었다. 그리고 오늘 수요일이 그 시술을 받고 첫 검진날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세 자매다. 큰딸인 난 캐나다에 살고 있고, 아직 싱글인 둘째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막내는 가정을 이루어 지방에서 살고 있다. 딸이 셋이나 있는데 부모님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자식들에게 걱정과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내리신 결정이라지만 섭섭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혼자서 지하철도 잘 못 타시는 엄마가 홀로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걱정되셨을 테고, 시술 후 엄청난 고통이 있을 수도 있다는데, 그 고통을 혼자서 감당하셔야 하는 엄마가 적정되서 안절부절못하셨던 것이다.
하루종일 시계를 보시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노...."를 백번도 넘게 반복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겠다. 엄마는 다행히 혼자서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시술 아침, 동생에게 이야기하셔서 같이 가셨던 모양이다. 모든 일에 계획적이고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인 동생은 성질도 불같아서 분명 엄마는 불호령과 함께 걱정 가득한 잔소리를 들으셨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가족들은 둘째를 제일 무서워한다.)
캐나다 도착 3일 동안 아빠의 행동으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니 상상만 커져갔다. 그 때문인지 이틀 전에는 입안에 피가 가득히 고여 앞니 하나가 쑥 빠지는 꿈을 꾸기도 했고, 어젯밤에는 미친년처럼 울며불며 엄마를 찾아온 병원을 뛰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요로결석이 웃어넘길 만큼 가벼운 병은 아니지만 아빠 입에서 요로결석이라는 병명이 나오자마자 헛웃음이 나오며 눈물이 고였다.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감사한지!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 무엇이 그토록 부모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을까?
병원비 부담 때문이셨을까?
껍질만 화목하고 진솔한 대화는 단절된 걸까?
우리 세 자녀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안정적이었다면 부모님이 더 편안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셨을까?
캐나다에서 막내가 태어나던 날 엄마는 나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같은 날 같은 시간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명을 증손녀에게 주시고 하늘나라고 가셨다. 엄마는 타국에서 손녀의 기쁜 출산소식과 아버지의 슬픈 임종소식을 동시에 받으셨다.
"혹시 몰라서 캐나다 오기 전에 할아버지한테 마지막 인사 하고 왔어! 그래서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괜찮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철없던 그때는 '그래! 엄마는 괜찮아! 엄마가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진짜 괜찮으신 거야.'라고 믿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한 마음도 죄송한 마음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난 아직도 철없는 딸이다. 엄마가 힘들 때 또 외롭게 홀로 둔 것만 같아서 자꾸 눈물이 났다.
"아빠.... 괜찮아?"
"아빠는 괜찮아! 엄마 혼자 잘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라고 말씀하시는 아빠의 마음도 난 그냥 '그래! 아빠가 괜찮다고 하시니까 괜찮은 거야!'라고 넘기고 싶다.
앞으로 더 많은 이유로 병원을 다니시고 우리는 초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려야 할 텐데, 편하게 부모님이 말씀해 주실 수 있도록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구 반대편에서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나 자신이 너무 싫고, 밉다.
이기적인 나 자신에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