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일 다이어리
오전 내내 외출을 해야 했다. 집에 아빠 혼자 계시면 쫌 쉬시면서 낮잠을 주무시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아빠는 요즘 새벽 1시에 눈을 뜨신다. 그리고 다시 선잠을 청하신 후 새벽 3시에 다시 일어나시는 듯하다. 혹시나 가족들이 깰까 봐 방에 가만히 누워계시다가 우리가 일어나는 시간 5시 30분에 거실로 나오신다.
시차적응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부작사부작 일을 하고 있으면 졸린지 몰라! 하나도 안 피곤 해. 그런데 일을 안 하면 깜빡 잠이 들더라."
깜빡 잠을 잠깐 주무셔야 정상인 건데 도통 잠을 주무시려 하지 않는다. 다행히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다. 강제적 노동 종료의 날이다. 차를 타고 마트에 들렸다오니 어느덧 비가 그쳤다. 단풍이 유난히도 예쁜 공터에 잠시 차를 세우고 오늘 하루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기로 했다. 노란 단풍 덕분에 우리 얼굴이 밝아 보이다.
아빠가 옆에서 연신 하품을 하신다. 아이들처럼 자동차 흔들림 때문에 졸음이 오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한 바퀴만 더 돌면 잠이 드실 것 같은데 야속하게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피아노 레슨을 하는 동안 아빠는 부엌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가며 단호박 부침개를 만들고 계신다. 우리 가족을 위한 오늘의 저녁이다. 비 덕분에 강제 노동종료라고 좋아했더니 죄송하게 나 대신 저녁밥을 하고 계신다. 에어카뎃 (Air Cadet) 프로그램에 가야 하는 아이들 때문에 저녁 식사시간이 번개같이 끝이 났다. 아빠가 만드신 단호박 부침개에 대한 칭찬 한마디 없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후루룩 먹어치우고는 아이들이 일어났다. 맛있다는 칭찬한마디가 듣고 싶으셨을 텐데...
아빠께 진짜 죄송 하지만... 역시 단호박 부침개는 엄마 손맛이 제일이다.
'아빠 죄송해요. 내가 상상한 맛이 아니었어요.'
왠지 그냥 잠자리에 들 수 없으셨는지 창밖을 바라보던 아빠가 갑자기 아빠가 밖으로 나가시더니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빗물통을 살피기 시작하셨다. 홈통에 모래와 싱글조각들이 꽉 차 있던 게 아빠의 레이다에 딱 걸렸다.
"어쩐지! 비가 홈통을 타고 흐르는 것 같지 않고 넘치는 느낌이 더라니! 이렇게 꽉 막혀있었구먼!"
뭔가 오늘하루도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으시더니 잠옷 바람으로 사다리 위에서 홈통을 청소하셨다.
"아이고! 아버님. 내일 하시죠." 누워있을 수 없는 신랑이 덩달아 죽을 맛이다.
설마... 일을 안 하시면 우리에게 미안하신 건가?
그냥 편안하게 피곤하실 때 주무시고 편안하게 계시면 좋으시련만. 아무리 내가 잘한다고 해도 많이 부담스럽고 불편하신가 보다. 가족이란 때로 아무 말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우리 모두에게 적응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부디 매일매일 조금씩 아빠가 안정을 찾으시고 여유를 찾으시고 엄청 게을러지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