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9월 26일
평소의 나라면 절대 아침에 호박죽을 끓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에 잠에서 깨신 아빠는 가족들의 아침식사 메뉴로 호박죽을 끓이기로 결정하셨다. 모두가 잠든 사이 한국에 계신 엄마와 화상으로 만드는 법을 완벽하게 배우셨단다.
아빠와 함께하니 모든 일에 속력이 붙는다. 30분도 되지 않아서 뚝딱 훌륭한 호박죽이 만들어졌다. 기숙사에 있는 큰딸이 생각나서 큰 그릇에 한 그릇 옮겨 담았다. 아빠 입장에서는 나를 먹이고 싶으셨겠지만 호박죽을 본 순간 죽을 좋아하는 딸아이가 먼저 생각이 났다. 아빠가 섭섭하셨을까? 오랜만에 온 가족이 호박죽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아침을 시작했다.
아침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Nip in the air!" 갑자기 쌀쌀해진 아침공기를 만났을 때 쓰는 이디엄이라고 영어선생님께 배웠던 기억이 난다. 어제밤사이 시원하게 끝맺지 못했던 지붕 물밭이 모래 청소가 시작되었다.
"이것도 감사다! 비 때문에 모래가 젖어서 먼지하나 안 나고 깨끗이 쓸어낼 수 있네. 감사네 감사!"
아빠의 넘치는 에너지를 모두 보조하겠다고 따라나선다면 내가 먼저 병이 들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낮잠이라도 주무시게 할 수 있을지 숙제가 생겼다.
가을햇살이 너무 예쁜 하루다. 어젯밤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도, 잔디도 싱그럽기만 하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젊은 지금 이 순간 우리 사진 한 장 찍죠!"
뒷마당에 나와 아빠와 함께 폼을 잡아본다. 지금 시간 오전 11시.
점심시간 오늘은 타운에서 가장 초밥을 잘하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대접해 드리기로 했다. 사실은 우리 타운에 일식 레스토랑은 한 곳뿐이다. 마음먹고 집을 나섰는데, 웬일인가? 오늘 갑자기 기계고장으로 레스토랑 문을 닫았다는 안내문이 걸려있었다. 레스토랑 하나가 문을 닫았을 뿐인데 정말로 갈 곳이 없다. 새삼 우리가 정말 깡 시골에 살고 있구나 깨닫게 된다.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 한 곳이 없다니...
난처해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시고 눈치 빠른 아빠가 말씀하셨다.
"햄버거 먹자! 나 안 먹어 본 지 오래됐다~! 오랜만에 먹고 싶은데?"
죄송하게 오늘 점심은 초밥에서 햄버거로 강등되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어떤 음식을 해드릴 수 있을지 미리 리스트를 작성해 놔야겠다.
김치찌개, 스파게티, 도토리묵, 칠면조, 핫도그빵, 곤지,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다. 매끼 따뜻한 밥에 반찬 하나라도 정성을 담아야겠다.
아빠고 오시고 난 후 막내딸 등하교는 아빠 담당이 되었다. 손녀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학교까지 가셨다가 혼자 다시 차를 몰고 돌아오신다. (딸은 아직 만 16세가 되지 않았기에 보호자 없이 혼자서 운전을 할 수가 없다.) 아빠의 하루 일과는 등교로 시작된다. 등굣길에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궁금해졌다. 내일은 꼭 여쭤봐야지.
북클럽 들어가기 전 40분 정도 시간이 생겨서 콘서트를 다녀왔다. 9월, 우리 북클럽 회원들은 나이 듦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어떻게 나이 듦을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씩 준비해 보는 계기도 되었고 동시에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고 있다. 마을에서 "School Band"공연이 있다고 해서 아이들의 공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밴드 멤버가 모두 80세 이상인 시니어 밴드였다. 오늘 나는 제대로 나이 들어가시는 멋진 분들의 공연을 보고 왔다.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서 연습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그분들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을까?
연습뿐만 아니라 완벽한 연주를 위해 건강도 관리하셨을 것이다. 멀리 90세는 되어 보이시는 할머니가 입으로 원, 투, 쓰리 박자를 세며 실로폰을 연주하시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멋져 보였다. 아빠도 많은 감동을 받은 신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늘하루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하겠다. 20년 후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 멋진 모습이시리라 믿는다.
School band concert
손자와 운동을 다녀오신다더니, 뜬금없이 큼지막한 돈에어와 아이스 카푸치노 파티가 벌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밤 11시 야식타임이지만,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한턱 쏘시는 거라 모두가 기분 좋게 야식을 즐겼다. 매일 새벽이면 잠 못 이루시는 아빠가 오늘은 푹 주무실 것 같다.
야식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