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일 다이어리
<Day 55> 11월 15일
호텔 발코니 창으로 비치는 로키산 꼭대기의 눈이 참 평화스러워 보인다. 오늘은 조용하고 따뜻한 호텔 안에서만 있어도 좋을 것 같은 하루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했던 딸은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고 아빠와 나도 8시가 다 되어서 눈을 떴다. 조용히 베이글을 구워서 크림치즈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방안에 가득 찬 커피 향이 즐거운 출발을 예고하는 듯하다.
아침 식사 후 예정대로 Old Fort Point Roof를 향했다. 물론 출발 전 카운터에 트레일의 안전도 확인했다. 산불 이후에 폐쇄한 트레일이 많기 때문에 트레일이 오픈되어 있는지, 안전한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천천히 차를 몰고 타운으로 들어서는데 서쪽 끝 L&W 레스토랑부터 모두 불에 타버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운을 지나 트레일로 가는 모든 길이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들로 빼곡히 땅에 꽂혀 있었다.
"어머나! 어떻게! 다 타버렸어"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픈 마음이 밀려왔다. 나무들 사이로 엘크들이 쉬고 있었는데, 지금 이곳은 까맣게 타버린 나무막대기들만 남아있었다. 동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제스퍼가 다 타버렸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가 않습니다. 아이고 까맣게 다 타버렸습니다."
아빠가 동영상을 찍으시며 내레이션을 시작하셨다. 이런 황량한 모습을 보여드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나...
굽이굽이 나무와 관목사이로 상쾌하게 등산을 했던 올드포트포인트는 이제 황무지가 되었다. 다행히 언덕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은 불에 전소되지 않아서 무사히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름답던 나무들은 한그루도 남김없이 다 타버리고 앙상하고 새까만 기둥만이 남아있었다. 제스퍼에는 구석구석 숨은 트레일이 참 많다. 그토록 궁금했던 숲 속의 모든 산책길들이 나무가 다 타버린 덕분에 위에서 내려다보니 부끄럽게 속살을 그대로 들어내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바닥까지 훤히 다 들여다 보이니 제스퍼에 살고 있는 많은 야생동물들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을 것이다. 추위를 피할 곳도, 눈을 피할 곳도 없어져서 동물들이 뿔뿔이 흩어졌을까? 제스퍼에 도착한 이후 흔하게 만났던 엘크를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제스퍼 타운의 모습은 너무 안타깝고 서글펐다. 매년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던 우리만의 장소도 재로 변해있었다. 새까만 나무둥치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코끗이 찡해 왔다. 이런 슬픈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혹여나 내가 실망이라도 할까 봐 아빠는 연신 사진을 찍으시며 나의 사기를 돋우셨다.
"캬! 제스퍼는 과연 제스퍼다! 산불로 다 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장관이다 장관이야!" 라며 나를 위로하셨다. 아빠와의 방문을 마지막으로 아마도 난 다시는 이곳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안녕... 제스퍼
캐나다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비버테일을 먹으러 타운으로 내려왔다. 관광객이 없어서 정상운영을 하는 상점이 별로 없었고, 상점이 문을 열지 않으니 관광객들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되고 있는 듯 보였다. 단맛이 가득한 비버테일을 입에 넣고 우리는 짧게 타운을 한 바퀴 돌았다. 할아버지 때문에 엄마 아빠가 돈을 많이 쓰는 것 같아 걱정이라며 아빠는 슬쩍 미안한 마음을 손녀에게 비추셨다. 생각해 보면 아빠, 엄마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셨다.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고, 난 당연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았다. 그런데 어른이 된 난, 왜 아빠에게 무엇을 해드릴 때마다 아빠가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지셔야 할까?
우리 아이들이 자라고 내가 아빠의 입장이 되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캐나다행 아빠의 여행가방 속에는 아이들을 위한 과자, 옷, 약, 반찬, 선물 등 빈틈없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정작 본인의 것은 갈아입을 속옷과 잠옷 그리고 한벌의 외출복 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준비하시느라 적지 않은 지출을 하셨을 텐데 미안한 마음보다는 행복한 마음, 감사한 마음, 즐거운 마음이 더 크셨을 것이다. 아직도 너무나 당연한 듯 난 어릴 때처럼 그 사랑을 받고 있다.
제스퍼를 빠져나오며 숫양들을 만났다. 드디어 야생동물을 만남으로써 우리의 제스퍼 여행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아직은 살아있고 다시 회복할 제스퍼를 기대해 본다.
막내 손녀의 배구경기가 있는 힌튼으로 향했다. 스타벅스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를 향해 차를 돌렸다. 4시부터 레슨을 해야 했던 나의 스케줄 때문에 그나마 경기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너무 힘든 빡빡한 일정이었을까?
입맛이 없다. 결국 오늘 모든 가족들은 라면으로 저녁을 먹어야 했다.
나의 저질 체력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