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시절 늘 책을 들고 다니던 선배언니가 있었다. 연구 때문에 우리는 일주일에 5일은 함께 붙어 다녔고, 선배는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할 때면 언제나 책을 꺼내 읽었다. 그 당시 전공서 외에는 책이라고는 전혀 보지 않았던 나에겐 참 신기한 풍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나는 교과서, 과학책, 경제책 그리고 피아노 교본 이외에는 나에게 모든 책들은 그저 남들이 자기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글적거리는 수다로만 여겼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낭비이자 사치라고까지 생각했다. 늘 대학입시와 논문 준비에 치여 살던 20대 내 삶에는 책을 읽을 만한 여유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20년 전이지만 그때도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드물었다.
"언니. 어떤 책 읽으세요?"
꾹꾹 눌러왔던 질문을 했다.
언니가 틈만 나면 손에서 놓지 못하던 건 다름 아닌 소설책이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 아까운 시간을 고작 소설 읽는데 몰입하고 있다니! 마치 공부 안 하고 딴짓하는 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그 눈빛이 너무 미안해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 나는 '단풍숲 서제' 북클럽을 3년째 이끌고 있다. 그리고 자주 그때의 언니가 떠오른다. 늦게나마 언니와 한마음이 되어 그때의 내 시선이 언니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북클럽 멤버들과 <전쟁과 평화>를 읽으면서 우리는 함께 달아오르고, 함께 발을 동동 굴렀으며, 함께 미소 지었다. <삼국지>는 또 어떤가? 옛사람들의 지혜와 전술 그리고 의리와 배신을 보며 우리는 오늘의 정치와 비교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몇백 년이 지나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네!"라고 결론을 내리며 세상 사는 이야기, 아줌마들의 수다로 이어지기도 했다.
책을 사랑하게 된 후 문득 깨달았다. 소설은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였고, 내 가족의 이야기였고, 내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경제, 역사, 과학처럼 무게 있는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늘 "이제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줄 소설을 읽어봅시다."라고 분위기를 전환했다.
골치 아픈 서류정리로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무거울 때, 남편하고 심한 말다툼을 하고 났을 때,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너무나 그리울 때, 잠시 머리를 비워두고 싶을 때 난 소설책을 펼친다. 그리고 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고맙게 다가오기도 하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것 같아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욕심이 있다면 50대 내가 접할 많은 책을 통해 조금 더 깊은 생각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해안이 생기기를 바란다. 피로에 지친 사람들에게 박카스 한병 전하듯 따뜻하게 책 한 권 소개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쌓이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