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글은 지난주에 이어 시부모님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시점을 아버님의 핸드폰으로 바라본 생활 밀착형 에세이입니다.
아침부터 나에게 카톡이 도착했다. Y어르신 부부의 캐나다행 비행기 소식이었다. 항공사 승무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줄줄이 비행기가 취소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어진 통화의 요지는 이랬다. 출발날짜가 9월 중순이니 그전에 파업이 철회될 가능성이 높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J(며느리)의 말이었다.
역시 통화가 길어지면 분위기는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난 쩌렁쩌렁한 어르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해 드렸다. 제발 J님이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라며.
"아버님, 수화물 가방 2개, 기내가방 2개 이렇게 가져오실 수 있으세요. 여긴 쌀쌀하니까 긴팔옷으로 준비하시고 평소 드시는 약은 넉넉하게 처방받아서 가져오세요."
"난 수화물 가방 한 개, 그리고 엄마는 작은 기내가방 한 개 이렇게만 가져갈 거다. 뭐 따로 가져갈 것도 없고, 짐도 없다."
"그래도 여기서 한국으로 가실 때는 겨울이라 옷이 겨울옷으로 바뀌니까 부피도 커지고, 이것저것 선물도 챙겨 가시려면 두 분이서 수화물 가방 한 개는 너무 작죠"
"겨울옷 뭐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약이나 선물 그런 거 난 한 개도 안 챙겨 갈 테니까 걱정 마라. 누구 고생을 시키려고 수화물 가방을 2개나 가지고 오라고 하냐!"
"하하 아버님! 아버님이 들고 오시는 것도 아니고 바퀴 달린 가방 끌고 오시면 비행기가 알아서 다 옮겨주잖아요~"
"가방에 넣을 게 없다니까! 고추장 한통, 된장 한통 그리고 옷가지 몇 개면 끝이야."
"된장이랑 고추장은 왜 가져오시는데요? 그거 무게 많이 나가는데, 여기 다 있어요. 옷이랑 필요하신 물품만 가져오세요."
"그러니까! 난 가방 한 개만 가져간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 끊어라!"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고 난 후, 어르신은 수화물 가방 두 개를 꺼내 놓으셨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하셨다.
'고추장이랑 된장은 아니라.... 그럼 뭘 가져간다~'
나를 손에 꼭 쥐고 계신 어르신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말끝에 리듬이 실린걸 보니 다행이다. 가방에 무엇을 담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신 어르신을 보니 나 역시 설레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버님은 수하물 2개, 기내용 캐리어 2개, 그리고 개인 소지품 가방까지 꽉 채워 아들, 며느리, 손주들에게 먹이고 싶은 간식과 반찬들을 한가득 담아 오셨다. 가방은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 지퍼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작고 여린 어머님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훌러덩 넘어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거워 보였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섬주섬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아이들 손에 쥐어 주시고, 당신이 가지고 오신 옷들이 손녀들에게 잘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깜깜한 밤 주차장 가로등에 의지해 자동차 트렁크에서 그 큰 수하물 가방을 분해하듯 열어젖히셨다.
처음부터 시부모님께서 무거운 가방을 여러 개 들고 오시게 할 생각은 없었다. 옷가지만 몇 벌 챙겨서 가볍게 오시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뜸 본인들 물건만 가져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의 태도가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바퀴 달린 가방이 뭐가 무겁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말씀 한마디라도
"아이들 좋아하는 과자는 없니?"
"넌 뭐 필요한 거 없고?' 이렇게 물어보실 수도 있었을 텐데, 서운하고 야속했다.
때로는 마음과 행동이 다를 때가 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굉장히 많은 순간에 나 역시 속마음과 다르게 툭 튀어나온 말과 행동 때문에 며칠을 끙끙거리며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20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난 아버님의 까칠한 행동과 말투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늘 앞섰다. 중년이 된다는 건 어쩌면 노년의 마음과 청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중요한 순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