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자유연상의 번거로움,그리고
라캉 시니피앙 분석
새로운 무의식 독해법
기차 창밖을 보듯이 말하라
5년 전 겨울, 나는 처음으로 정신분석을 받기 위해 한 분석가를 찾아갔다. 상담실에 들어서자 그는 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누우세요."
나는 어색하게 소파에 누웠다. 분석가는 내 머리 뒤쪽 의자에 앉아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부터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그대로 말씀해주세요. 기차를 타고 여행하며 창밖 풍경을 보듯이, 순서나 논리에 상관없이 자유롭게요."
프로이트가 개발한 자유연상법이었다. 그는 이 방법으로 무의식의 비밀을 캐낼 수 있다고 믿었다. 검열받지 않은 생각의 흐름 속에서 억압된 욕망과 갈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처음 30분은 지옥 같았다.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했다. 억지로 뭐라도 말하려 하면 "어제 날씨가..." 같은 의미 없는 말만 나왔다.
"그냥 편하게 하세요. 판단하지 마시고요."
분석가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내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끝없는 해석의 미로
6개월이 지났다. 매주 두 번씩 소파에 누워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 꿈 이야기, 직장에서 있었던 일, 연애 이야기...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석가는 내 이야기를 듣고 가끔 "음..." "그래서요?"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같은 짧은 반응만 보일 뿐, 명확한 해석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꿨어요. 제가 학교 복도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바지를 안 입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도망갈 곳이 없었어요."
"그 꿈에서 어떤 느낌이었나요?"
"부끄러웠어요. 숨고 싶었어요."
"부끄러움이 어떤 부분과 연결되는 것 같나요?"
이런 식이었다. 분석가는 계속 질문만 던질 뿐,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점점 답답해졌다.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회의감에 빠졌다. 과연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걸까? 내가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무엇이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라캉을 만나다
그때 한 선배가 라캉의 세미나를 소개해줬다.
"자유연상이 답답하다고? 라캉을 읽어봐.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릴 거야."
처음 라캉의 텍스트를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니피앙, 시니피에, 대타자, 욕망의 그래프... 용어부터가 낯설었다.
하지만 한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니.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어둡고 혼돈스러운 욕동의 저장고로 봤는데, 라캉은 그것이 언어의 법칙을 따른다고 했다.
더 공부하면서 깨달았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자유연상법이 가진 한계를 정확히 짚어냈다. 자유연상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분석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존하며, 무엇이 중요한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니피앙이라는 열쇠
라캉의 혁신은 '시니피앙'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된다.
시니피앙은 기표, 즉 의미를 담는 그릇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이 네 개의 글자 ㅅ-ㅏ-ㄹ-ㅏ-ㅇ이 시니피앙이고, 그것이 가리키는 감정이 시니피에(기의)다.
그런데 라캉은 놀라운 통찰을 제시한다. 무의식은 시니피앙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시니피앙들이 서로 연결되고 충돌하며 무의식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보자. 한 내담자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버지를 존경해요.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에요. 완벽한 분이죠."
전통적 분석가는 이 말의 '의미'에 주목한다.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내용을 분석한다. 하지만 라캉적 분석가는 다르게 듣는다.
"존경" → "훌륭한" → "완벽한"
이 시니피앙들의 연쇄가 뭔가 과도하다. 왜 굳이 세 번이나 강조할까? 그리고 "완벽한"이라는 단어 뒤에 미세한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이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일상의 말 속에서 무의식을 듣다
라캉의 접근법이 매력적인 것은 일상 대화에서도 무의식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몇 달 전, 한 친구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지만, 대화 중에 이상한 패턴을 발견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배려심도 깊고... 전 남자친구와는 완전히 달라." "어제도 선물을 줬어. 전 남자친구는 기념일도 잊어버렸는데." "이번 주말에 여행 가기로 했어. 전 남자친구랑은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갔거든."
새로운 연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전 남자친구"가 등장했다. 그녀는 현재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시니피앙은 계속 과거로 회귀한다.
라캉은 이런 현상을 "시니피앙의 연쇄"라고 부른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A를 말하려 해도, 무의식의 시니피앙은 B로 미끄러진다. 이 미끄러짐이 바로 무의식의 작동 방식이다.
말실수가 진실을 말한다
프로이트도 말실수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라캉은 더 나아간다. 말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시니피앙의 충돌이 만든 무의식의 분출이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회사 회의에서 한 동료가 발표를 하다가 말실수를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책임지고 실패하겠습니다. 아, 성공하겠습니다!"
모두가 웃었지만, 나는 그 말실수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실제로 그 동료는 프로젝트에 대한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성공"이라는 시니피앙 뒤에 "실패"라는 시니피앙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라캉은 이런 현상을 "시니피앙의 우위"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의미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시니피앙이 우리를 통해 말한다. 무의식은 억압되어 있다가 말실수, 농담, 증상을 통해 불쑥 튀어나온다.
반복되는 말, 반복되는 운명
라캉적 분석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반복이다.
한 지인이 있다. 그는 대화할 때마다 "저는 운이 없는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한다. 직장에서 승진이 늦어져도, 연애가 잘 안 풀려도, 심지어 비가 와도 "역시 저는 운이 없네요"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말버릇이 아니다. "운이 없다"는 시니피앙이 그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운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시니피앙이 주체를 구조화하는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패턴을 갖고 있다. "미안해"라는 말을 너무 자주 한다.
"미안한데 물어봐도 될까?" "미안, 늦었어." "미안, 내 얘기가 너무 길었지?"
왜 나는 항상 미안해할까? 이 시니피앙은 내 무의식의 어떤 구조를 드러내는가? 아마도 나는 타인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먼저 사과함으로써 거절당할 가능성을 줄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침묵도 말한다
라캉은 침묵 역시 중요한 시니피앙이라고 본다.
정신분석 상담을 받던 시절, 나는 특정 주제에서 항상 말이 막혔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아버지는... (침묵) ...그냥 평범한 분이에요."
그 침묵은 무엇을 감추고 있었을까? 나중에 깨달았다. 그 침묵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 - 사랑, 미움, 실망, 그리움 - 이 엉켜있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해서, 침묵이라는 시니피앙으로 나타난 것이다.
분석가의 새로운 위치
라캉적 분석가는 전통적 분석가와 다른 위치에 선다.
프로이트적 분석가가 "당신의 꿈은 이것을 의미합니다"라고 해석한다면, 라캉적 분석가는 "당신이 지금 사용한 그 단어,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라고 요청한다.
내가 만난 라캉파 분석가는 이렇게 작업했다. 내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내면, 그는 단 하나의 단어나 표현만을 짚어냈다.
"방금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하셨는데, 그 표현을 자주 쓰시나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한 시간 얘기했는데 겨우 그것만 들었나? 하지만 그 단어에 대해 생각할수록 많은 것이 드러났다.
"어쩔 수 없었어요"는 내 인생의 주요 시니피앙이었다. 나는 항상 선택의 순간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이 시니피앙이 내 삶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언어가 주체를 만든다
라캉의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언어가 주체를 구조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언어가 우리를 사용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 언어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쓰는 우리는 높임말과 반말의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단순한 문법이 아니다. 이 언어 구조가 우리의 인간관계, 정체성, 욕망을 구조화한다.
"선생님"이라는 시니피앙을 쓰는 순간, 나는 특정한 위치에 놓인다. 학생의 위치, 배우는 자의 위치, 존경을 표하는 자의 위치. 이 시니피앙이 나와 상대방의 관계를 규정한다.
사랑이라는 시니피앙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랑해"라는 말을 처음 했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 세 글자를 내뱉는 순간, 관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랑"이라는 시니피앙이 두 사람을 새로운 구조 속에 위치시킨다. 이제 연인이 되고, 특별한 관계가 되고,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시니피앙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떤 이에게 사랑은 "희생"과 연결되고, 다른 이에게는 "자유"와 연결된다. 이 차이가 갈등을 만든다.
한 커플이 있었다. 여자는 "사랑해"라고 말할 때마다 "그럼 결혼하자"는 말을 기대했다. 남자는 "사랑해"라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라고 했다. 같은 시니피앙을 쓰지만 다른 연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증상을 읽는 새로운 방법
라캉은 증상도 시니피앙으로 읽는다.
한 여성이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증상이 있었다. 전통적 분석은 "더러움에 대한 공포" "죄책감" 등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라캉적 분석은 다르게 접근한다.
"손"이라는 시니피앙이 그녀에게 무엇과 연결되는가? "씻는다"는 행위가 어떤 시니피앙과 연쇄를 이루는가?
분석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놀라웠다. 그녀에게 "손"은 "엄마의 손"과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는 요리하는 손, 때리는 손, 쓰다듬는 손이었다. "씻는다"는 것은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였다.
증상은 단순한 병리가 아니라 시니피앙들의 매듭이다. 그 매듭을 풀려면 시니피앙의 연쇄를 따라가야 한다.
꿈을 다시 읽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도 다시 읽는다.
프로이트가 꿈의 '내용'과 '의미'에 주목했다면, 라캉은 꿈의 '형식'과 '구조'에 주목한다. 꿈은 시니피앙들의 놀이터다. 압축, 전치, 은유, 환유의 법칙에 따라 시니피앙들이 춤을 춘다.
최근에 꾼 꿈이 있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있었는데, 모든 책이 백지였다.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었다.
프로이트적 해석: 지식에 대한 욕구와 무력감 라캉적 독해: "책"이라는 시니피앙과 "백지"라는 시니피앙의 대립
책 = 아는 것, 채워진 것, 완성된 것 백지 = 모르는 것, 비어있는 것, 미완성
이 꿈은 나의 시니피앙 구조를 보여준다. 나는 항상 "안다"와 "모른다" 사이에서 불안해한다. 전문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 대립이 꿈에서 "제목 있는 백지 책"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전이를 다르게 보다
정신분석에서 전이(transference)는 핵심 개념이다. 내담자가 분석가에게 과거의 중요한 인물(주로 부모)에 대한 감정을 투사하는 현상이다.
프로이트는 전이를 통해 과거를 재현하고 해석한다고 봤다. 하지만 라캉은 전이를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sujet supposé savoir)"에 대한 관계로 본다.
내담자는 분석가가 "내 무의식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이 전이를 만든다. 하지만 진실은 분석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분석가는 단지 내담자의 시니피앙을 들려줄 뿐이다.
내 경험이 그랬다. 처음에는 분석가가 모든 답을 알고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답은 내 말 속에 있었다. 분석가는 단지 내가 놓친 시니피앙을 짚어주는 역할이었다.
끝나지 않는 분석
프로이트적 분석은 "치료"를 목표로 한다. 증상을 없애고, 억압을 해제하고,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라캉은 다르게 본다. 분석의 목표는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시니피앙들 사이의 틈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시니피앙이 되어 빠져나간다. 욕망은 항상 다른 곳에 있다.
일상에서 실천하기
라캉의 이론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통찰을 준다.
첫째, 자신이 자주 쓰는 말에 주목하라. 그 말들이 당신의 무의식 구조를 드러낸다.
둘째, 말실수나 말 막힘을 무시하지 마라. 그것은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다.
셋째,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라. 같은 실패, 같은 갈등이 반복된다면, 그것을 만드는 시니피앙이 있다.
넷째, 타인의 말을 들을 때도 '무엇을'보다 '어떻게'에 주목하라. 말의 형식이 내용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새로운 듣기의 윤리
라캉적 분석은 새로운 듣기의 윤리를 제안한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말을 들을 때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무슨 뜻이지?" "무엇을 원하는 거지?" 하지만 라캉은 다르게 듣기를 제안한다.
시니피앙을 듣는 것. 반복을 듣는 것. 침묵을 듣는 것. 말의 리듬을 듣는 것.
이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상대방이 의식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구조를 듣는 것이다.
연인과 대화할 때, 친구와 이야기할 때, 이런 듣기를 실천해보라. 상대방이 자주 쓰는 단어, 반복하는 표현, 갑자기 멈추는 순간들. 그것들이 그 사람의 진실을 말해준다.
언어 너머를 꿈꾸지 않기
라캉의 가장 급진적인 주장 중 하나는 "언어 밖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라캉은 그것조차 언어 안에 있다고 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시니피앙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해방이다. 언어 너머의 진정한 자아, 순수한 감정 같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적 존재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일상의 정신분석
라캉은 정신분석을 상담실 밖으로 끌어냈다.
이제 우리는 일상의 모든 대화에서 무의식을 들을 수 있다.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쓰는 시니피앙들이 그들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이것은 타인을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사용한 이 단어는 어디서 왔는가? 왜 하필 이 표현을 선택했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하는가?
자유연상의 번거로움을 넘어, 시니피앙 분석은 더 날카롭고 정확하게 무의식을 포착한다. 그것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듣기의 방식이다.
당신도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이 가장 자주 쓰는 말은 무엇인가? 그 말이 당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거기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