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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 인생 2막은 정신분석-9화

by 홍종민

검사 결과는 정상, 하지만 나는 아프다 - 히스테리의 현대적 변주


학기 11주차 수요일 오전, 늘 가는 스타벅스. 필자의 지정석인 구석 자리에 앉아 대리언 리더의 『우리는 왜 아플까』를 읽고 있었다. 정신분석을 배운 후로는 카페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더 심해졌다. 이제는 아예 '카페 정신분석학'이라는 노트를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말한 '일상의 정신병리학'이 여기 펼쳐져 있었다.

작년 겨울, 오랜 친구 영희에게서 전화가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온몸이 아픈데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대."

그녀는 지난 석 달 동안 여섯 군데 병원을 전전했다고 했다. 내과에서 시작해 정형외과, 신경과, 류마티스내과까지. MRI도 찍고, 피검사도 수십 가지를 했지만 모든 수치는 정상이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스트레스성"이라며 신경안정제를 처방했다.

"내가 꾀병 부리는 것 같대. 아니면 정신병자거나."

친구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좌절이 섞여 있었다. 분명히 아픈데, 아무도 그 아픔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억울함이 느껴졌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연구』에서 말한 "신체로 말하는 무의식"이었다.

이런 경험,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분명 어딘가 아픈데, 검사 결과는 늘 "정상"이라고 나온다. 의사는 "별일 아니니 푹 쉬세요"라고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자 대리언 리더는 이런 현상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 몸의 증상들이 단순히 의학적 원인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 그 속에는 마음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의 표현으로 "증상은 무의식의 형성물"이다.


카페에서 만난 아픈 사람들: 현대의 히스테리 환자들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카페에는 늘 보던 단골들이 있었다. 필자는 그들을 관찰하며 각자가 안고 있는 보이지 않는 아픔들을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증상 형성' 이론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창가의 이 부장.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매일 오전 10시,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다. 노트북을 펴놓고 주식 차트를 본다. 오늘은 표정이 특히 어두웠다.

"아메리카노 벤티, 샷 추가요."

평소엔 톨 사이즈인데 오늘은 벤티다. 뭔가 있구나.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 응... 오늘도 도서관 가. 공부해야지... 응."

도서관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을 보니, 아내에게 주식 하는 것을 숨기고 있다. 30분 후, 그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에 빨간색이 가득했다. 오늘도 손실인 모양이다.

그때 문득 리더의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몸의 증상들이 단순히 의학적 원인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 그 속에는 마음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

이 부장도 최근 허리 통증을 호소한다고 들었다. "허리가 부러질 것 같다"고 표현했다는데, 주식 손실의 경제적 부담이 문자 그대로 '허리를 부러뜨리는' 통증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의 '신체화(somatization)' 개념이었다.

맥북의 김 작가도 있다. 30대 후반 여성으로 자칭 '글 쓰는 사람'이지만 2시간 동안 대부분 인스타그램을 본다. 매일 오전 11시에 와서 맥북을 펴고 워드를 연다. 제목은 항상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하지만 10분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인스타그램을 연다. 다른 작가들의 출간 소식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진다.

어느 날 그녀가 카페 사장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들었다.

"요즘 손목이 너무 아파요. 글을 쓰려고 하면 더 아프고..."

손목 터널 증후군? 아니다. 그녀는 실제로 글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글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손목 통증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무의식이 "쓰지 마"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라캉이 말한 '증상의 향유(jouissance du symptôme)'였다.

매일 점심시간에 오는 박 과장도 있다. 40대 초반 남성으로 항상 혼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를 본다. '퇴사학교', '파이어족 되는 법', '경제적 자유' 같은 영상들이다. 그는 최근 가슴 답답함을 호소한다고 했다. 퇴사를 꿈꾸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이 가슴 통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프로이트의 '불안 신경증'의 전형이었다.


언니가 암에 걸렸을 때, 내 삶이 무너진 이유: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리더가 소개한 39세 여성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우리는 왜 아플까』, 47-48쪽)

그녀의 가족사는 비극 그 자체였다. 할머니, 어머니, 이모, 고모... 3대에 걸쳐 여섯 명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전자 검사 결과 그녀도 BRCA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었다. 의사들은 예방적 유방절제술을 권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정신과를 찾은 것은 자신이 암 진단을 받았을 때가 아니었다. 언니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3년이 지난 후였다.

언니의 암 진단 이후, 그녀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10년 넘게 다니던 안정적인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일용직을 전전했다.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위험한 나이트클럽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음주운전을 일삼았고, 3년 동안 네 번의 교통사고를 냈다. 마치 죽음을 부르는 것처럼.

왜 그랬을까? 왜 언니가 아프자 자신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을까?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몇 년 전 만났던 한 여성을 떠올렸다. 그녀는 쌍둥이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후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을 자는 것이 죄스럽다고 했다. "언니는 영원히 잠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잘 수 있겠어요?" 프로이트가 말한 '멜랑콜리'의 전형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잔인하게 괴롭히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리더의 분석에 따르면, 39세 여성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왜 나는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 가족 모두가 암으로 죽어가는데 자신만 건강하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젊은 시절 했던 방탕한 생활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라캉이 말한 '죽음충동(pulsion de mort)'의 발현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위험하게 살면서 오히려 불안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자기 파괴가 역설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 것이다. 마치 "이제야 나도 벌을 받고 있어"라고 안도하는 것처럼. 프로이트의 '마조히즘적 만족'이었다.


스터디에서의 토론: 증상의 정신분석


그날 오후 스터디 모임에서 리더의 책을 함께 읽었다.

"이 여성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느낀 거예요." 수진이가 말했다.

"맞아요. '왜 나는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라는 무의식적 질문이 자기 파괴로 이어진 거죠. 프로이트의 '초자아의 가학성'이 작동한 거예요." 30대 동기가 덧붙였다.

필자는 카페의 이 부장을 떠올렸다.

"우리 주변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픈... 라캉이 말한 '말하는 존재(parlêtre)'들이죠."

지민이가 물었다.

"선배님도 그런 경험 있으세요?"

"작년 봄 퇴사 후... 온몸이 아팠어요. 병원에서는 이상 없다고 했지만."

"어디가 아프셨어요?"

"주로 등이랑 어깨.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최 교수가 분석했다.

"25년간 회사라는 짐을 지고 있다가 갑자기 내려놓으니, 몸이 혼란스러웠겠네요. 프로이트가 말한 '신경증적 이득의 상실'이죠."


아버지처럼 토하는 14세 소녀: 증상을 통한 동일시


리더는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한다. 14세 소녀가 기숙학교에서 심한 구토 증상을 보였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병원을 전전했다. 소화기내과, 신경과, 감염내과... 어머니가 원한 것은 명확한 진단명이었다. "이것은 바이러스 감염입니다" 혹은 "위염입니다" 같은 확실한 답변. 하지만 모든 검사는 정상이었다.

결국 소녀는 심리상담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진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모는 1년 전 이혼했다.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렸고, 어머니는 딸을 기숙학교에 보냈다. 소녀는 "버려졌다"고 느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위산 역류로 고생했다는 것. 종종 구토를 했고, 그럴 때마다 소녀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등을 쓸어주곤 했다.

이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소녀의 구토는 단순한 신체 증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증상을 가짐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려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동일시』에서 설명한 '히스테리적 동일시'였다.

"이것도 일종의 동일시네요." 최 교수가 설명했다.

"증상을 통한 동일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병을 앓음으로써 연결감을 유지하려는... 라캉의 '상상적 동일시'죠."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마다 나도 왠지 배가 아팠다. 어머니는 "너도 할머니처럼 아프고 싶은 거니?"라고 물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사랑하는 대상과의 동일시'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기 위해 때로 이상한 방법을 선택한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투를 쓴다. 그리고 때로는... 같은 증상을 갖는다.


심장을 자동차처럼 생각하는 우리들: 신체 은유와 증상


리더는 재미있는 관찰을 하나 더 제시한다. 서구인들이 심장을 설명할 때 자주 자동차 비유를 쓴다는 것이다.

"심장이 펌프질을 한다" "혈관이 막혔다" "연료가 부족하다" "엔진이 과열됐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몸을 기계처럼 생각한다. "몸이 고장 났다", "정비가 필요하다", "부품을 갈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은유는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다. 우리가 몸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이해 방식이 우리의 증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라캉이 말한 '기표의 물질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박 과장이 어느 날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가슴이 답답해요. 뭔가 꽉 막힌 것 같아요.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그는 자신의 몸을 기계로 비유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 답답함은 기계적 문제가 아니었다. 퇴사를 꿈꾸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이 가슴 통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프로이트의 '전환 히스테리'였다.

한국에는 독특한 은유가 또 있다. 바로 "화(火)"다. 우리는 "화가 치민다", "울화가 터진다", "화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감정을 불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은 유독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오르는 증상을 많이 호소한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온 정신과 의사가 한국의 '화병'에 대해 물었다. "왜 한국인들만 이런 병이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감정을 불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불은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에서는 감정을 압력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폭발할 것 같다'고 하죠."

문화마다 몸과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그 이해 방식이 우리의 증상을 만들어낸다. 라캉이 말한 '상징계의 구조'가 우리의 증상을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몸, 한국인의 마음: 화병의 정신분석


한국인에게는 독특한 증상이 있다. 바로 '화병'이다. 서양 정신의학 교과서에는 없는 병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다 안다.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치밀고, 한숨이 나오고, 억울한 그 느낌.

왜 한국인에게만 이런 병이 있을까?

최 교수가 설명했다.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어요. 참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이고, 표현하는 것은 철없는 것이라고. 특히 여성들은 더 그랬죠. 프로이트가 말한 '문화적 억압'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 거예요."

카페에서 만난 60대 여성 손님이 떠올랐다.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한숨만 쉬다 가는 그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괜찮으세요?"

"40년 시집살이... 이제야 좀 숨 쉬러 나왔어요."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어머니의 구박, 남편의 무관심, 자식들의 불효.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화를 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왜 참으셨어요?"

"여자가 참아야지, 어떻게 해요. 그게 미덕이라고 배웠는데..."

그녀의 가슴에 쌓인 40년의 화. 그것이 병이 되었다. 약으로 치료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는 것, 그 억울함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말한 '말하기 치료(talking cure)'가 필요했다.

정신과 의사 김현수는 "한국인의 정신건강 문제 중 상당 부분이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상실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나약함으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그 결과 수많은 미완의 애도를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다. 라캉이 말한 '상징화되지 못한 실재'가 증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진짜 아픈 것과 가짜 아픈 것 사이: 신체화의 진실


"제 증상이 진짜인가요, 아니면 제 머릿속에만 있는 건가요?"

이 부장이 어느 날 필자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진짜'임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의학적 진단명이 없으면 마치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리더가 강조하듯, 이런 이분법 자체가 문제다. 정신과 신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실제로 위산이 많이 나온다. 우울하면 실제로 면역력이 떨어진다. 불안하면 실제로 심장이 빨리 뛴다. 마음의 고통은 몸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고통은 100% 진짜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연구』에서 밝힌 '심인성 통증'의 실재성이다.

내 친구 영희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녀가 온몸이 아프다고 했을 때, 나는 물었다.

"언제부터 아팠어?"

"한... 6개월 전부터?"

"그때 무슨 일 있었어?"

"없는데... 아, 엄마가 치매 진단받으셨지."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설마... 그것 때문에?"

"몸이 어디가 제일 아파?"

"등이랑 어깨... 너무 무거워서 못 견디겠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엄마를 돌보는 게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서 그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엄마잖아. 내가 어떻게..."

그녀의 등과 어깨 통증은 실제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돌보는 무게, 그 책임감과 죄책감이 실제 물리적 통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라캉이 말한 '실재의 귀환'이었다.


반복되는 패턴, 반복되는 아픔: 증상의 반복강박


우리는 모두 패턴을 가지고 있다. 같은 유형의 사람과 연애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방식으로 아프다. 프로이트의 '반복강박'이 증상에서도 나타난다.

필자도 패턴이 있었다. 25년 직장 생활 동안 3년마다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왜 3년마다였을까요?" 개인 분석 시간에 분석가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 승진 심사가 3년마다..."

"그때마다 두통이?"

"네. 머리가 깨질 것 같았어요."

문자 그대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것이다. 승진에 대한 압박이 두통으로 나타났다. 프로이트의 '불안의 신체화'였다.

한 30대 남성은 3년마다 한 번씩 급성 요통으로 쓰러진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디스크라고 했지만, 3년 주기가 너무 정확해서 이상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패턴이 있었다. 3년마다 직장을 옮겼고, 그때마다 요통이 왔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담,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허리 통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자 그대로 "허리가 휘는"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라캉의 '증상의 반복'이었다.

또 다른 여성은 연애할 때마다 방광염에 걸렸다. 의학적으로는 성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심리적 의미도 있었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때마다 불안해요. 버림받을까 봐."

"방광염이 생기면 어떻게 되나요?"

"남자친구가 걱정해주죠. 병원도 같이 가주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아픔을 통해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질병 이득(Krankheitsgewinn)'이었다.


가족의 병, 나의 병: 세대 간 전이


김 작가가 어느 날 고백했다.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으셨어요. 평생 글을 쓰고 싶어 하셨는데 못 쓰셨죠."

"그래서 김 작가님이 글을..."

"네. 어머니 대신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 막상 쓰려니 안 써져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좌절을 반복하고 있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어머니와 동일시하면서. 라캉이 말한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구조였다.

우리는 가족의 병을 물려받기도 한다. 유전자가 아니라 무의식을 통해서.

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담배를 끊었는데도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아들이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은 후 딸이 거식증에 걸렸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가족의 고통을 함께 짊어진다. 그것이 가족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세대 간 전이'였다.

40대 여성이 원인 모를 복통으로 찾아왔다. 검사상 이상은 없었다.

"어머니는 건강하신가요?"

"어머니요? 작년에 대장암 수술받으셨어요."

"지금은 어떠신가요?"

"항암치료 중이세요. 많이 힘들어하세요."

"어머니가 아프신 부위가 어디인가요?"

"대장이요... 아."

그녀는 자신의 복통이 어머니와 같은 부위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머니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어머니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 복통으로 나타난 것이다. 라캉의 '상상적 동일시'였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아픔들: 현대의 히스테리


현대 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스트레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증상들도 나타났다.

스마트폰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우리. 목은 거북목이 되고, 손목은 저리고, 눈은 뻑뻑하다. 이것을 단순히 자세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

"요즘은 새로운 증상들도 많아요." 수진이가 스터디에서 말했다.

"거북목, 손목 터널 증후군, 안구건조증..."

"단순히 자세 문제일까요?" 필자가 물었다.

"아니에요.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되려 하죠. 동시에 그 연결로부터 지쳐가고요. 라캉의 '대타자의 시선'에 포획된 거예요."

지민이가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저는 SNS 보다가 두통이 와요. 남들 행복한 거 보면서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요."

SNS를 하며 느끼는 감정을 생각해보라. 남의 행복한 사진을 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좋아요'를 기다리며 느끼는 불안. 댓글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마음. 이 모든 감정이 우리 몸 어딘가에 쌓인다. 프로이트가 말한 '문명 속의 불편함'의 21세기 버전이다.

한 20대 청년이 만성 두통으로 찾아왔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본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쉴 새 없이 콘텐츠를 소비했다.

"왜 계속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심심해서요. 아니... 불안해서?"

"뭐가 불안한데요?"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놓치는 것 같아서."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칠까 봐 두려운 마음. 이것이 그의 두통의 한 원인이었다.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뇌가 과부하 상태였던 것이다. 라캉이 말한 '향유의 과잉'이었다.


몸의 언어를 듣는 법: 증상의 해석학


그날 스터디에서 필자는 제안했다.

"우리 각자의 증상을 분석해보면 어떨까요?"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몸의 언어를 들을 수 있을까?


첫째, 시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원인의 시간성'을 추적하는 것.

이 부장: "허리 통증은 작년 퇴직 후 시작됐어요. 주식 시작하면서..." 김 작가: "손목 통증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후..." 박 과장: "가슴 답답함은 승진 누락 후..." 필자: "두통은 늘 평가받을 때..."

증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직, 이별, 사별, 이사 같은 큰 변화가 있었는지. 때로는 기념일이 중요하다. 부모님 기일, 이혼한 날, 사고가 난 날... 프로이트의 '사후성'이 작동하는 순간들.


둘째, 패턴을 찾는 것이다. 라캉의 '반복의 자동성'을 발견하는 것.

언제 아픈지, 누구와 있을 때 아픈지, 어떤 상황에서 악화되는지. 월요일마다 두통이 있다면 출근이 문제일 수 있다. 시댁에 가면 소화가 안 된다면 관계가 문제일 수 있다.


셋째, 은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라캉의 '기표의 은유'를 해독하는 것.

"머리가 깨질 것 같다" → 정신적 압박 "허리가 부러질 것 같다" → 경제적 부담 "손목이 묶인 것 같다" → 창작의 속박 "가슴이 막힌 것 같다" → 감정의 억압 "숨이 막힌다" → 숨 쉴 공간이 없음 "다리에 힘이 없다" → 설 자리가 없음

넷째, 2차 이득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질병 이득'을 분석하는 것.

아프면 무엇이 좋은가? 쉴 수 있는가? 관심받을 수 있는가? 책임을 피할 수 있는가? 이것은 꾀병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아픔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


즉석 카페 세미나: 집단 분석의 장


어느 날, 우리는 카페에서 즉석 세미나를 열었다. 이 부장, 김 작가, 박 과장, 그리고 필자. 카페의 아픈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 몸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요." 필자가 시작했다.

"배고픔, 피곤함, 아픔을 통해서. 하지만 현대 사회는 몸의 소리를 듣지 말라고 가르치죠. 프로이트가 말한 '문명의 억압'이에요."

이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파도 출근하고, 피곤해도 야근하고..."

김 작가가 덧붙였다.

"배고파도 다이어트하라고 하고, 아파도 참으라고 하고..."

박 과장이 한숨 쉬었다.

"그러다 정말 크게 아프면 그제야 병원에 가죠. 그리고 약으로 증상만 없애려 해요."

"하지만 진통제는 통증을 없앨 뿐, 통증의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해요. 라캉이 말했듯 '증상은 진실을 말한다'고요." 필자가 말했다.

카페 사장이 우리 테이블에 왔다.

"여러분 모두 비슷한 시간에 오시네요."

"네, 저희가 카페 단골이죠." 필자가 웃으며 말했다.

"알아요. 10년째 카페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뭔가요?"

"낮 시간에 카페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뭔가 아픈 사람들이에요. 몸이든 마음이든."

사장이 계속했다.

"여기는 현대판 병원이에요. 커피 한 잔이 약이고, 이 공간이 치료실이죠. 사실 저도 10년 전에 대기업 때려치웠어요. 번아웃으로 쓰러진 후에."

"후회 안 하세요?"

"가끔...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니까요. 제 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라캉이 말한 '주체의 자리'를 찾은 거죠."


치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증상의 승화


리더가 소개한 39세 여성과 14세 소녀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39세 여성은 심리치료를 통해 자신의 죄책감을 인식했다. 살아남은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기 파괴적 행동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갖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점차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통과(working through)' 과정이었다.

14세 소녀는 아버지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건강한 방법을 찾았다.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고, 가끔 만났다. 구토는 점차 줄어들었다. 아버지와의 물리적 거리는 여전했지만, 정서적 연결은 회복되었다. 라캉의 '상징적 관계의 재구성'이었다.

치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말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슬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우리 카페 단골들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 부장은 아내에게 주식 투자를 고백했다.

"처음엔 화내더니, 이제는 같이 공부하자고 해요. 허리 통증도 많이 나아졌어요.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의 해제'죠."

김 작가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다.

"그냥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 그걸로 충분해요. 손목도 덜 아프고요. 라캉의 '상상적 동일시'에서 벗어난 거예요."

박 과장은 퇴사 대신 안식월을 신청했다.

"완전히 떠나는 것보다 잠시 쉬는 것부터 시작하려고요. 가슴 답답함이 좀 나아졌어요. '증상의 타협' 형성이죠."

내 친구 영희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죄책감이 컸지만, 자신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등이랑 어깨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나아졌어. 이제야 내 몸이 뭘 말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아."


집단 무의식의 공간, 카페: 현대의 분석 공간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고 했다.

카페는 그 담론들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각자의 증상을 안고 온 사람들이 커피 한 잔에 기대어 하루를 버티는 곳.

필자는 이제 관찰을 멈췄다. 대신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모두 환자이자 분석가다. 서로의 증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 부장: 자본주의의 환상에 갇힌 주체, 경제적 부담을 허리로 표현


김 작가: SNS 시대의 나르시시즘, 창작 불안을 손목으로 표현


박 과장: 신자유주의의 피로한 주체, 억압된 욕망을 가슴으로 표현


필자: 지식으로 불안을 방어하는 주체, 평가 불안을 머리로 표현


리더의 통찰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증상을 적이 아니라 메신저로 보는 것. 몸의 아픔 속에 마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프로이트와 라캉이 평생 추구한 '무의식의 해독'이다.


당신의 몸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증상의 윤리


세미나를 마치며 필자가 물었다.

"여러분의 몸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요?"

이 부장: "허리가 말해요. '그만 좀 무거운 짐을 내려놔.' 초자아의 명령에서 벗어나라고." 김 작가: "손목이 말해요. '억지로 쓰지 마. 쓰고 싶을 때 써.' 대타자의 욕망 말고 내 욕망을 따르라고." 박 과장: "가슴이 말해요. '숨 좀 쉬자. 여유를 가져.' 향유의 과잉에서 벗어나라고." 필자: "머리가 말해요. '생각 좀 그만하고 느껴봐.' 지성화 방어를 멈추라고."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 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당신의 두통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신의 요통은 무엇을 호소하는가? 당신의 불면증은 무엇을 거부하는가? 당신의 소화불량은 무엇을 소화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들이 불편할 수 있다. 차라리 진통제를 먹는 것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진통제는 통증을 없앨 뿐, 통증의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진짜 치유는 몸과 마음이 함께 대화할 때 일어난다. 몸이 하는 말을 마음이 듣고, 마음이 하는 말을 몸이 들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해진다. 프로이트가 꿈꾸던 '자아가 있어야 할 곳에 자아가 있는' 상태.


아픈 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 증상의 존엄


다음 날, 친구 영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네 말대로 했어. 엄마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어."

"죄책감은?"

"있지. 하지만 내 몸이 더 이상 못 버틴대. 등이랑 어깨가 계속 신호를 보내."

"잘 결정했어."

"근데 신기한 게, 결정하고 나니까 통증이 좀 줄어들었어."

"몸이 '고맙다'고 하는 거야. 프로이트가 말한 '증상의 해소'야."

그날 카페에서 필자는 노트에 적었다.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 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듣는 것이다. 라캉이 말했듯, '증상은 주체의 진실'이니까."

아픈 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자. 대신 귀 기울이자.

"내 몸아, 무슨 말을 하고 싶니?"

이 질문으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당신이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내일도 카페에 갈 것이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 치유의 시작이니까.

카페는 계속될 것이다. 아픈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공간으로. 현대판 성당이자 병원으로.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조금씩 치유될 것이다. 몸의 언어를 배우며,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프로이트와 라캉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증상은 적이 아니라 메신저다.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 편지를 읽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참고문헌: 대리언 리더. 『우리는 왜 아플까』 (서울: 동녘사이언스, 2011).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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