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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 인생 2막은 정신분석-10화

by 홍종민


세대를 넘어 흐르는 눈물


학기 12주차 금요일, 가족치료 수업에서 모니카 맥골드릭(Monica McGoldrick)의 『가계도 분석을 통해 본 세계 유명인의 가족비밀』을 읽고 있었다. 교수님이 특히 강조하신 구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족들은 비록 서로 다른 도시에, 때로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더라도, 최소 3세대에서 최대 5세대까지 하나의 거대한 정서적 생태계를 공유한다." (2007, 서울: 학지사)

순간, 할머니 생각이 났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요즘 들어 자꾸 눈물이 나는 나. 작년 봄 퇴사 후부터 시작된 이유 없는 울음. 혹시 이것도 세대간 전이일까?

책을 덮고 창밖을 보았다. 캠퍼스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계절이었다. "가을은 눈물의 계절이야"라고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상담실 창문으로 비친 진실


그날 오후, 실습 상담실에 한 여성이 찾아왔다. 서른여섯, 두 아이의 어머니.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알아차렸다. 그녀의 눈 깊은 곳에 고인 슬픔이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찾아오셨나요?"

내 질문에 그녀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내가 수십 년간 상담을 하면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이었다.

"제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아요. 마치... 누군가의 대본을 따라 연기하는 것 같아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필자는 자신의 가족사를 떠올렸다. 우리 집안에도 보이지 않는 대본이 있었다. 할아버지부터 시작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전해진 대본.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모든 게요. 결혼한 나이, 아이 낳은 시기, 심지어 우울해지는 시기까지..."


스물다섯의 미스터리 - 운명의 패턴


"저는 스물다섯에 결혼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도, 할머니도 모두 스물다섯에 결혼했더라고요."

내담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 놀라운 건 모두 첫 아이를 스물일곱에 낳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서른다섯에 우울증이 왔고요."

"우연이라고 생각하세요?" 필자가 물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너무 정확해서 무서워요. 마치 정해진 각본대로 사는 것 같아요."

맥골드릭은 40년이 넘는 연구를 통해 이런 현상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밝혔다. 가족이라는 유기체가 자신의 미완성 과제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혹시 할머니나 어머니가 스물다섯에 결혼하면서 포기한 것이 있었나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할머니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어머니는 유학을 포기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저는... 저는 대학원을 포기했어요. 정확히 스물다섯에."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3대에 걸쳐 여성들이 스물다섯에 학업의 꿈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가족 무의식에 새겨진 패턴이었다.


필자의 가족 패턴


필자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스터디 시간에 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모두 45세에 위기를 겪었어요."

수진이가 관심을 보였다.

"어떤 위기요?"

"할아버지는 45세에 사업 실패로 야반도주했고, 아버지는 45세에 부도로 자살 시도를 했어요."

"선배님은요?" 지민이가 물었다.

"저는 45세에 극심한 불안 장애가 왔어요. 이유도 없이. 회사는 잘 나가고 있었는데..."

30대 동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찍 퇴직하신 건가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45세의 저주를 피하고 싶었나 봐요."


13세의 저주 - 맥골드릭이 밝힌 충격적 사례


최 교수가 맥골드릭의 가장 유명한 사례를 소개했다. (『가계도 분석을 통해 본 세계 유명인의 가족비밀』, 27-28쪽)

"한 가족의 13세 딸이 가출을 했습니다. 그 시대에 13세 소녀가 혼자 히치하이킹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죠. 안타깝게도 그 소녀는 살해당했습니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부모는 이 끔찍한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딸을 화장하고,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교수님이 잠시 멈추고 우리를 둘러보았다.

"부부는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딸을 낳았죠. 놀라운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새로 태어난 딸도 정확히 13세에 가출을 한 것입니다."

교실에 탄성이 흘렀다.

"다행히 두 번째 딸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교수님이 칠판에 가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는 13세에 죽은 쌍둥이 언니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 너무나 큰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심지어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었습니다."

3세대에 걸쳐 13세라는 나이가 가지는 죽음과 상실의 의미가 반복된 것이다.


사주에 새겨진 가족의 기억


흥미롭게도 동양의 사주명리학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찾을 수 있다. 그날 저녁, 집에서 가족들의 사주를 펼쳐놓고 보았다.

한 집안의 사주를 대대로 펼쳐놓고 보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처럼 비슷한 오행의 기운이 반복된다.

할아버지의 사주에 인성(印星)이 과다했는데, 아버지도, 필자도 같은 패턴이었다. 인성은 학문과 어머니를 상징한다. 할아버지는 못 배운 한이 있었고, 아버지는 대학을 중퇴했고, 필자는 50대에 와서야 대학원에 입학했다.

더 신기한 것은 할머니, 어머니, 아내 모두 식상(食傷)이 강했다는 점이다. 식상은 표현욕과 창작욕을 의미한다. 할머니는 문맹이었지만 이야기꾼이었고, 어머니는 글을 쓰고 싶어했지만 포기했고, 아내는 최근에야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것을 단순히 '팔자'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유기체가 자신의 미완성 과제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집에서의 첫 번째 실수: 아내를 분석하다

학기 12주차 금요일 저녁,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았다.

"당신 요즘 이상해."

"뭐가?"

"자꾸 나를 분석하는 것 같아."

사실이었다. 정신분석을 배운 후로 필자는 모든 것을 분석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아내를.

일주일 전 아침이 떠올랐다. 아내가 간밤의 꿈 이야기를 했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 내가 큰 집에 있는데 방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계속 돌아다니는데 내 방이 없어."

필자는 반사적으로 분석 모드에 들어갔다.

"그건 정체성 혼란을 나타내는 꿈이야. 큰 집은 당신의 정신이고, 방을 못 찾는 건 자아를 찾지 못한다는... 혹시 최근에 역할 갈등이 있어?"

아내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내가 꿈 해석 해달라고 했어?"

"아니, 그냥 도움이 될까 해서..."

"그냥 뭐? 나를 환자 취급하는 거야?"

그날 아내는 필자와 말을 하지 않았다. 침대도 따로 썼다.

말실수 분석 사건

며칠 후, 아내가 친구와 통화하다가 말실수를 했다.

"우리 남편이... 아니, 우리 아들이 요즘..."

전화를 끊고 필자가 웃으며 말했다.

"프로이트식 말실수네. 무의식적으로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나 봐. 돌봐줘야 할 대상으로..."

아내가 쿠션을 집어던졌다.

"또 시작이야? 그냥 말 실수한 건데!"

"말실수에는 무의식이 숨어있어.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그만! 집에서까지 수업하지 마! 난 당신 학생이 아니야!"

필자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 분석이 돌아갔다. '아내의 저항, 전형적인 방어기제. 자신의 무의식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할머니의 눈물, 나의 눈물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서재에서 맥골드릭의 책을 다시 펼쳤다.

"억압된 기억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의식적으로 기억에서 지워버린 사건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박혀서, 더욱 강렬한 영향을 미친다."

문득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평생 울지 못한 눈물을 누군가는 대신 울어주겠지."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할머니는 왜 평생 울지 못했을까?

할머니는 혼외자인 아버지를 낳으셨다. 그 시절, 혼외자를 낳는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다. 할머니는 평생 그 수치심을 안고 사셨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우신 적이 없었다. 강해야 했으니까. 아들을 지켜야 했으니까.

그리고 요즘 필자가 이유 없이 우는 것. 작년 봄 퇴사 후부터 시작된 이 울음. 혹시 할머니의 못다 흘린 눈물이 아닐까?

맥골드릭은 말한다. 감정적 유산은 세대를 거쳐 전해진다고. 한 세대가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다음 세대가 대신 표현하게 된다고.


노트 발견 사건


결정적 사건은 다음 날 일어났다.

아내가 필자의 서재를 청소하다가 노트를 발견했다. '가족 관찰 일지'라고 적힌 노트.

"이게 뭐야?"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3월 15일: 아내가 설거지하며 한숨. 반복 강박적 행동. 장모님도 같은 패턴. 세대간 전이?"

"3월 20일: 아내가 친정엄마와 통화 후 짜증. 모녀 관계의 미해결 갈등? 융의 '그림자' 투사?"

"3월 25일: 아내가 25살 결혼 사진 보며 울먹. 할머니와 같은 나이. 세대간 전이의 증거?"

"4월 2일: 아내의 우울. 시어머니, 장모님 모두 우울증. 3대에 걸친 여성 우울증?"

아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내가 실험용 쥐야? 관찰 대상이야? 우리 가족이 연구 대상이야?"

"아니, 이건 그냥 연습..."

"연습? 나를 갖고, 우리 가족을 갖고 연습을 해?"

아내는 노트를 찢어버렸다.

"오늘 밤 소파에서 자!"

라캉 스터디 긴급 소집

다음 날, 필자는 스터디 모임에 긴급 안건을 올렸다.

"우리가 가족을 분석하는 게 윤리적일까?"

수진이가 웃었다.

"선배님도 당하셨군요. 저도 남자친구한테 차일 뻔했어요."

"왜요?"

"계속 그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분석하려 들었거든요. '네가 지금 화내는 건 아버지에 대한 전이야'라고 했다가..."

30대 남자 동기가 말했다.

"분석가의 딜레마죠. 알면 알수록 관계가 어려워져요."

지민이가 물었다.

"근데 선배님은 왜 아내를 관찰하신 거예요?"

필자는 잠시 생각했다.

"사랑해서?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그게 진짜 이유일까요?" 수진이가 날카롭게 물었다.

"..."

"혹시 통제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분석을 통해 우위에 서려는?"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맞는 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지식을 통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던 것이다.

최 교수의 조언

수업 시간에 최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가족을 분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위험합니다."

"왜요?"

"맥골드릭도 경고했죠. 가족은 너무 가까워서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고. 전이와 역전이가 뒤엉킵니다."

"그럼 어떻게..."

"가족의 패턴을 이해하는 것과 가족 구성원을 분석하는 것은 다릅니다. 패턴은 함께 탐구하되, 개인을 분석하지는 마세요."

"하지만 알게 된 것들이 자꾸 보여요."

최 교수가 웃었다.

"그게 정신분석의 저주죠. 한번 열린 눈은 닫을 수 없어요. 하지만 본다고 해서 꼭 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담자의 충격적 고백

그날 오후, 36세 내담자가 충격적 고백을 했다.

"저희 집안 여자들은 모두 첫사랑과 결혼 못 했어요."

"모두요?"

"네. 증조할머니부터 저까지. 4대가 모두."

자세히 들어보니 더 놀라운 패턴이 있었다.

"증조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첫사랑이 독립운동하다 죽었고,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첫사랑을 잃었고, 어머니는 첫사랑이 유학 가서 못 만났고, 저는..."

"당신은요?"

"첫사랑이 교통사고로..."

4대에 걸쳐 첫사랑과의 이별. 그리고 모두 외부적 요인 때문이었다.

"마치 저주 같아요." 그녀가 울먹였다.

"저주가 아니라 패턴이에요. 그리고 이제 당신이 그것을 인식했으니, 바꿀 수 있어요."

탐구해보니 증조할머니가 첫사랑을 잃은 후 "우리 집안 여자들은 첫사랑과 인연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가족 신화가 되어 4대에 걸쳐 현실이 된 것이다.

아내의 반격

그날 저녁, 아내가 씩 웃으며 노트를 꺼냈다.

"나도 당신 분석했어."

"뭐?"

"'남편 관찰 일지'. 당신만 공부해? 나도 책 좀 읽었어."

아내가 읽기 시작했다.

"남편은 전형적인 강박증.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커피도 같은 순서로 타 먹음. 이는 할아버지의 불안을 통제하려는 시도."

"..."

"퇴직 후 정체성 혼란. 대학원은 새로운 정체성 찾기. 할머니의 못다 한 공부를 대신하려는 보상 심리."

"야!"

"아직 있어. 13세 때 할머니 돌아가신 트라우마. 그래서 우리 딸 13세 되는 거 불안해하는 거지?"

"그만!"

아내가 크게 웃었다.

"어때? 분석당하는 기분?"

필자는 할 말을 잃었다. 아내의 분석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가족 비밀의 폭로

아내와 대화하다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사실 우리 엄마도 13세에 언니를 잃었어."

"정말?"

"응. 한 번도 말 안 했지만. 그래서 내가 13세 될 때 엄마가 그렇게 불안해했구나."

맥골드릭의 13세 소녀 사례가 떠올랐다. 우리 집에도 비슷한 패턴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딸이 내년에 13세인데..." 아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아니까, 다르게 할 수 있어."

"어떻게?"

"비밀로 만들지 않는 거야. 딸과 솔직하게 대화하고, 13세를 특별한 성장의 해로 만드는 거지."


세대간 전이를 끊는 방법


스터디에서 세대간 전이를 끊는 방법을 심도있게 토론했다.

"맥골드릭은 다섯 단계를 제시했어요." 수진이가 정리했다.

"첫째, 가족 패턴을 인식하기."

"둘째, 비밀을 밝히기."

"셋째, 감정을 표현하기."

"넷째, 새로운 의미 부여하기."

"다섯째, 다음 세대와 소통하기."

필자는 결심했다. 우리 가족의 비밀을 정리하고, 딸에게는 다른 이야기를 물려주기로.


할머니와의 대화


그날 밤, 꿈에 할머니가 나타났다.

"내 눈물 대신 울어줘서 고맙다."

"할머니, 왜 평생 우시지 않으셨어요?"

"그 시절엔 울 수 없었다. 강해야 했거든."

"할머니 때문에 아버지도, 저도 감정 표현을 못해요."

"알아. 그래서 네가 대신 우는 거야. 이제 그만 울어도 돼."

"정말요?"

"그래. 이제 네 눈물을 울어라. 네 기쁨을 표현해라."

꿈에서 깨어나 진짜로 울었다. 할머니의 눈물이 아닌, 나의 눈물을. 슬픔이 아닌, 해방감의 눈물을.


가족 회의


주말에 가족 회의를 열었다. 아내, 딸, 아들이 모두 모였다.

"오늘은 우리 가족의 비밀과 패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

딸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비밀?"

"우리 집안에는 13세와 관련된 특별한 역사가 있어."

필자는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가족의 역사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13세의 의미, 45세의 패턴, 스물다섯의 선택들.

아들이 물었다.

"그럼 우리도 그렇게 될 운명이에요?"

"아니. 운명이 아니라 패턴이야. 이제 우리가 알았으니 바꿀 수 있어."

아내와의 화해

가족 회의 후, 아내와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미안해. 당신을 분석 대상으로 본 것."

"나도 미안해. 당신도 상처가 있다는 걸 이해 못 했어."

"우리 둘 다 가족의 패턴을 물려받았네."

"그러게. 나는 엄마의 우울을, 당신은 할머니의 한을."

우리는 '상호 분석 금지 조약'을 맺었다.

가족은 분석하지 않기


비밀은 함께 탐구하기


패턴은 인식하되 판단하지 않기


새로운 가족 이야기 함께 쓰기


서로의 감정 존중하기


"그런데," 아내가 덧붙였다. "가끔은 분석도 도움이 돼."

"정말?"

"응.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게 되니까. 단지 방법이 문제였지."

딸과의 특별한 대화

13세를 앞둔 딸과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내년에 네가 13세가 되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특별한 나이야."

"왜요?"

"변화의 나이거든.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그 나이에 중요한 선택을 했어."

"무서운 일이 생기는 건 아니죠?"

"아니.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될 거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딸이 생각에 잠겼다.

"아빠, 혹시 제가 13세 되는 게 무서우세요?"

"솔직히 조금. 하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

"어디서요?"

"과거에서. 하지만 우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

모니카 맥골드릭의 혁명적 발견

수업에서 맥골드릭의 업적을 더 깊이 공부했다.

"맥골드릭이 대단한 이유는," 최 교수가 설명했다, "개인을 넘어 가족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 거예요."

교수님은 칠판에 가족 지노그램을 그렸다.

"지노그램을 통해 3-5세대의 패턴을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결혼 나이, 이혼 시기, 질병, 죽음, 직업 선택... 모든 것에 패턴이 있어요."

필자도 우리 가족의 지노그램을 그려보았다. 놀라운 패턴들이 드러났다.

남자들: 45세 위기, 사업 실패, 인성(印星) 과다


여자들: 25세 결혼, 우울증, 식상(食傷) 발달


공통: 13세 트라우마, 학업 미완성, 감정 억압


"이걸 보면," 수진이가 말했다, "선배님 가족은 학문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네요."

"맞아. 못 배운 한이 대물림된 거야."


후성유전학과 트라우마 전달


"최근 과학계에서는 후성유전학이 주목받고 있어요." 30대 동기가 설명했다.

"트라우마가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켜서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는 거죠."

"홀로코스트 생존자 연구가 유명하죠." 지민이가 덧붙였다.

"2세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PTSD 증상을 보인다는."

필자는 우리 가족을 생각했다. 할머니의 한, 할아버지의 가난, 전쟁의 상처... 이 모든 것이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까?


침묵의 파괴적 힘


"13세 소녀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침묵이에요." 최 교수가 강조했다.

"말하지 않은 비밀이 더 큰 파괴력을 갖습니다."

필자의 가족에도 많은 침묵이 있었다.

할머니의 혼외자 출산


할아버지의 야반도주


아버지의 자살 시도


어머니의 우울증


이 모든 것이 '쉬쉬'하며 숨겨졌고, 그 침묵이 더 큰 상처를 만들었다.

"침묵은 세 가지 방식으로 전달돼요." 교수님이 설명했다.

"첫째, 비언어적 신호. 특정 주제에 대한 긴장과 회피."

"둘째, 정보의 공백. 빈 곳을 환상으로 채우게 됨."

"셋째, 행동 패턴. 말하지 않아도 반복되는 행동."

새로운 가족 신화 만들기

"이제 우리 가족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해." 아내가 말했다.

"어떤 이야기?"

"13세는 죽음의 나이가 아니라 성장의 나이."

"45세는 실패의 나이가 아니라 전환의 나이."

"25세는 포기의 나이가 아니라 선택의 나이."

우리는 가족 신조를 만들었다.

우리는 과거를 인정하되 거기 갇히지 않는다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표현한다


비밀을 만들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


함께 성장한다


치유의 시작


한 달 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자는 더 이상 이유 없이 울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물을 다 울어낸 것 같았다.

아내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3대째 억압된 창작욕을 드디어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딸은 13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가족의 패턴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운명을 넘어서

맥골드릭은 말했다. "가족의 패턴을 이해하고, 비밀을 밝히고, 침묵을 깨뜨릴 때, 우리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할머니의 슬픔이 내 눈에 고였다면, 이제 그 눈물을 닦아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대학원 다니면서 우리 가족이 치유되고 있어. 고마워."

"나도. 당신이 이해해줘서."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다. 조상들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를 물려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는 저자이기도 하다.

다음 학기에는 '가족치료' 심화 과정을 들을 예정이다.

이번엔 아내도 청강하고 싶다고 했다.

"같이 공부하면 서로 분석 안 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제안이 맞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분석보다 불완전한 이해가 낫다.

특히 가족에게는.

과거를 이해하되 거기에 갇히지 않고,

패턴을 인식하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가족의 유산을 존중하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

이것이 세대간 전이를 넘어서는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할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

당신의 눈물은 제가 다 울었습니다.

이제는 제 눈물을, 제 기쁨을 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딸에게는 눈물이 아닌 웃음을 물려주겠습니다.


참고문헌: Monica McGoldrick(모니카 맥골드릭), 남순현·황영훈 역, 『가계도 분석을 통해 본 세계 유명인의 가족비밀』 (2007), 27-28쪽, 서울: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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