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유독 짜증이 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친절해질까?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그게 아니다. 이십 대 시절 김형경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대하는 방식이 달라서 자신이 위선자인가 의문을 품었다는 거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는 매 순간 상대방의 무의식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영화 <메멘토>의 레너드를 보자. 그는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10분마다 기억을 잃지만, 신기하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낀다. 테디를 만나면 설명할 수 없는 의심과 분노가 솟구치고, 나탈리 앞에서는 강한 보호 욕구를 느끼며, 샘미를 떠올릴 때는 묘한 동질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정작 레너드 자신은 이 차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기억이 없으니까.
바로 이게 정신분석에서는 '역전이', 심리학에서는 '역할 반응'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핵심이다. 김형경은 "내 쪽에서 고스란히 상대의 무의식을 비추는 상태"(김형경, 2020: 183).라고 했다. 우리 마음은 상대방의 마음을 반사하는 거울인 것이다. 레너드처럼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이 현상은 작동한다. 아니, 오히려 더 순수하게 작동한다고 봐야 한다.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화학 반응
레너드가 테디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을 자세히 보면, 그것은 테디 자신의 불안과 죄책감이 레너드에게 전달된 것이다. 테디는 겉으로는 친절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레너드를 이용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 무의식적 감정이 레너드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불편함으로 나타나는 거다. 레너드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몸으로 느낀다. "이 사람 뭔가 이상해."
프로이드가 발견한 '동일시' 개념으로 보면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상대방의 무의식적 감정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한다. 레너드가 나탈리에게 느끼는 보호 욕구는 나탈리 자신이 느끼는 무력감과 취약함을 거울처럼 반영한 것이다. 나탈리는 남자친구 지미를 잃고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했고, 이 무의식적 욕구가 레너드에게 전달되어 그로 하여금 보호자 역할을 하게 만든다.
위니코트가 말한 '참자아'와 '거짓자아' 개념도 여기서 중요하다. 나탈리의 거짓자아는 "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라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이지만, 참자아는 보호받고 싶어하는 상처받은 아이다. 레너드는 나탈리의 거짓자아가 아닌 참자아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반응한 것이다. 기억은 없어도 감정은 정확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레너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역할을 떠맡는다는 거다. 나탈리가 "당신이 도와줘야 해"라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레너드는 자동으로 그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역할 반응의 무서운 점이다. 상대방이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역할을 우리가 자동으로 떠맡게 되는 거다.
상담실에서도 이런 역전이, 즉 역할 반응이 비일비재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내담자를 만났는데 상담사가 유독 슬픔을 느낀다면, 그 사람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억압된 슬픔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내담자는 상담사로 하여금 계속 충고하고 싶게 만들고, 다른 내담자는 자꾸 위로해주고 싶게 만든다.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다. 상대방의 무의식적 욕구가 전달되는 거다. 마음은 정말 거울과 같다. 그게 팩트다.
라캉이 밝힌 전이의 무서운 진실
<블랙 스완>의 니나를 보면 역전이 현상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니나의 어머니 에리카는 딸과 함께 있을 때마다 묘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겉으로는 니나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니나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자신의 실패한 꿈에 대한 좌절감이 뒤섞여 있다. 에리카 자신도 발레리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한이 고스란히 딸에게 전달되고 있는 거다.
라캉의 '전이' 이론으로 보면, 니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니나에게 투사하고 있다. 발레리나가 되지 못한 자신의 한을 딸을 통해 풀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딸이 자신보다 성공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시기심을 품고 있다. 이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들이 니나에게 전달되어 니나로 하여금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만든다. 니나가 거울을 보면서 자꾸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머니의 상반된 감정들이 니나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거다.
김형경은 "역전이를 처음 알아차리던 날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김형경, 2020: 184).라고 했다. 한낮의 찻집에서 후배와 만남을 가졌는데, 갑자기 숨 막히는 암울함과 통곡하고 싶은 슬픔에 휩싸였다는 거다. 알고 보니 그것은 후배가 억압하고 있던 감정이었다. 니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딸의 연습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불안과 초조함은 사실 니나 자신이 느끼고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이다.
<파이트 클럽>의 내레이터와 타일러의 관계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내레이터는 타일러를 만날 때마다 묘한 해방감과 동시에 깊은 불안감을 느낀다. 타일러의 무의식에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파괴 욕구가 가득하고, 이것이 내레이터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그를 점점 더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그런데 정작 타일러 자신은 이런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다. 아니, 자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레이터가 타일러에게 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일러가 억압하고 있는 분노가 내레이터 자신의 억압된 분노와 공명하는 거다. 그래서 내레이터는 타일러와 함께 있을 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이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게 내레이터 자신의 분열된 마음이었다는 반전이 나오지만, 그전까지는 완벽한 역전이 관계였다.
역할 반응을 행동화하지 않는 기술
김형경은 "역전이를 행동화하지 않는 일이었다"(김형경, 2020: 187).라고 말했다. 상대방의 감정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휩쓸려 반응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김형경 자신도 독서 모임에서 "역전이 전쟁"을 벌였다고 고백한다. 냉소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여성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똑같이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나갔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여성에게는 아이 달래듯 차근차근한 말투를 사용했다는 거다.
<메멘토>의 레너드처럼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는 이런 구분이 더욱 어렵다. 그는 상대방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즉석에서 반응해버린다. 테디가 불안해하면 레너드도 불안해지고, 나탈리가 화를 내면 레너드도 함께 화를 낸다. 기억이 없으니 "아, 이건 내 감정이 아니구나"라고 거리를 둘 수가 없다.
위니코트의 '충분히 좋은 어머니' 개념이 여기서 중요하다. 좋은 치료자나 좋은 어머니는 내담자나 아이의 감정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울음을 들으면서도 자신까지 함께 울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가 울면 어머니는 아이의 슬픔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이건 아이의 감정이고 나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경계를 유지한다.
레너드가 만약 기억을 갖고 있었다면, 테디의 불안을 느끼면서도 "아, 이건 테디의 감정이구나. 그가 뭔가 숨기고 있구나"라고 거리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순수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거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을 보자. 그는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여러 기억 속 인물들을 만난다. 각각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다른데, 이는 그들이 가진 무의식적 감정들이 조엘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의사 하워드에게서는 권위에 대한 불안을, 간호사 메리에게서는 금지된 사랑에 대한 갈망을, 기술자 스탠에게서는 일상의 권태를 느낀다. 기억을 지우는 과정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조엘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반사하고 있다.
하지만 조엘은 점점 이런 감정들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라고 깨닫는 순간들이 늘어나면서 그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찾아간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사랑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그녀의 무의식적 욕구에 반응한 것이었는지를 구분하게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조엘은 성장한다. 상대방의 거울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 상담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상담사가 내담자를 만나고 나서 "오늘은 왜 이렇게 우울하지?"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내담자의 억압된 우울감이 전달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이를 알아차리고 "이건 내 감정이 아니라 내담자의 감정이구나"라고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전문가와 일반인의 차이다. 김형경이 일상에서 "마음은 다만 거울일 뿐"이라고 중얼거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울 속에서 진짜 나를 찾기
결국 역전이든 역할 반응이든, 핵심은 '나'와 '상대방'을 구분하는 것이다. <메멘토>의 레너드가 만약 기억을 되찾는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거다. 어떤 감정이 진짜 자신의 것이고, 어떤 감정이 상대방에게서 온 것인지 구분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라캉이 말한 '주체의 분열'도 여기서 나타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한다. 레너드가 복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과연 진짜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아내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의 죄책감이 전달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복수라는 형태로 바뀐 것일까? 영화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게 인간 마음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김형경은 "마음은 다만 거울일 뿐"(김형경, 2020: 187).이라고 했다. 거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안에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처럼 말이다. 그는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짜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자신만의 마음을 찾아가는 거다. 클레멘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녀의 무의식적 욕구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조엘이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에게 "만나자, 몬탁에서"라고 말하는 장면이 바로 그 순간이다. 이때 조엘은 더 이상 클레멘타인의 거울이 아니다. 자신의 진짜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비록 그 사랑이 아픔을 동반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게 진짜 관계의 시작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만날 때 "어? 내가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지?"라고 느낀다면,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자. 이 감정이 정말 내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무의식이 전달된 것인지 말이다. 그런 구분을 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상대방의 거울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 말이다.
김형경이 일상에서 "처음 15분 내지 20분 동안 내면의 역전이 감정부터 점검하기"라고 자신에게 다짐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이런 점검을 할 수 있다. "지금 이 감정이 내 것일까, 상대방 것일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진짜 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다.
그게 바로 성숙한 관계의 시작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되 동화되지 않고, 공감하되 압도당하지 않는 것. 마음의 거울 역할을 하되 그 거울 뒤에 있는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때서야 우리는 진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참고문헌:
김형경(2020). 만가지 행동. 서울: 사람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