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엄마가 있었다. 30대 후반. 아이는 28개월. 놀이터에 가면 늘 긴장했다. 아이가 미끄럼틀에 올라가려고 하면 "안 돼!". 그네를 타려고 하면 "안 돼!". 모래를 만지려고 해도 "안 돼!". 다른 엄마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엄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이가 뭘 하려고 하면 일단 "안 돼!"부터 외치는 엄마들. 그냥 걱정이 많아서?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아니다. 전혀 아니다. 그런 이유라면 가끔씩만 그러면 된다. 하지만 이런 엄마들은 다르다. 소파에 올라가려고 해도 "안 돼!" 서랍을 열려고 해도 "안 돼!" 심지어 장난감을 만지려고 해도 "안 돼!". 피부로 실감한다. 그들의 "안 돼!"에는 뭔가 다른 게 숨어있다는 걸.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그것도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김호순이 분석한 D씨처럼 "D씨의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라고 부르짖는 행동은 친정엄마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28개월 된 아들의 활동성을 왜곡하여 자신의 불안을 투사해 반응하는 현상"(김호순, 2023: 47)인 거다. 바로 이거다.
과잉보호하는 엄마들의 공통점
그 엄마를 다시 보자. 그녀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천식으로 자주 쓰러졌다. 밤마다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10년간 그 공포 속에서 살았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하지만 그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아이를 키우면서 그 공포가 올라왔다. 아이가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어머니가 쓰러지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가 다치면 어떡하지". 아니 정확히는 "아이가 다치면 나는 또 그 무력감을 느껴야 하잖아". 그게 진짜 두려움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절망감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D씨는 친정어머니가 앓고 있던 천식과 병력으로 인해 양육의 만족감과 안정감을 충분히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키울 때 항상 공포스러운 죽음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김호순, 2023: 46-47). 바로 이거다. 과잉보호하는 엄마들의 공통점이다. 아이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작동한다.
한 엄마가 있었다. 40대 초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키웠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 확인했다. "오늘 누구랑 놀았어?" "선생님이 뭐라고 했어?" "다친 데 없어?". 아이는 지쳤다. "엄마 나 괜찮아". 하지만 엄마는 멈출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초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당했다. 3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바빴다. "학교 잘 다녀왔니?"라는 말만 했다. 그녀의 고통은 보이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아들을 키우면서 그때의 기억이 올라왔다. "내 아이는 절대 그렇게 키우지 않겠어".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과잉보호밖에.
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헛이 말한 자기대상의 왜곡된 형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엄마가 아이의 자아 발달을 돕는 대신 자신의 불안을 달래는 도구로 아이를 사용하는 거다. 아이는 더 이상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엄마의 심리적 안정제가 되어버린다. 산소처럼 필요하다고 착각한다.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한 아버지가 있었다. 50대 초반. 고등학생 딸을 키웠다. 딸의 성적을 매일 확인했다. 학원 시간표를 직접 짰다. 친구 만나는 것도 통제했다. "공부에 방해되니까". 딸은 숨이 막혔다. "아빠 좀 그만해". 하지만 아버지는 멈출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어린 시절 가난했다. 대학을 못 갔다. 평생 그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 딸은 절대 나처럼 살지 않게 하겠어". 하지만 딸을 위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열등감을 딸로 해소하려는 거였다. 딸이 성공하면 자신도 성공한 것 같았다. 딸이 실패하면 자신도 실패자가 될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딸은 집이 감옥 같았다.
정신분석가 존 볼비가 말한 안전한 애착의 정반대였다. 아이가 세상을 탐험하고 돌아올 안전한 기지를 제공하는 대신 아예 탐험을 못하게 막아버린 거다. 명백하다.
영화 속에서 본 과잉보호의 진실
영화 <마더>의 혜자를 보라. 그녀는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 도준을 과잉보호한다. 하지만 그 보호의 본질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아들이 잘못했을 때도 무조건 감싸고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도 진실보다는 아들 편들기에만 급급하다.
그런데 영화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혜자의 과보호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절망감에서 나온 거라는 걸. 아들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공포. 그래서 아들을 완전히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려는 거다. 그런 식이다.
이게 바로 과잉보호의 진짜 정체다. 겉으로는 아이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게 떠넘기는 거다. 아이가 독립하면 자신이 버려질까 봐. 아이가 실패하면 자신도 실패자가 될까 봐. 확실하다.
"만일 아이가 계속해서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를 남발하는 어머니를 경험하게 된다면 아이는 이 시기에 발휘되는 자율적 의지와 신체의 자율적 운용을 촉진시키는 자율성의 제한을 받아 많은 부분에서 경험박탈을 일으키게 되고 소극적인 아이가 될 수 있다"(김호순, 2023: 46).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다.
진짜 사랑으로 가는 길
방법이 있다. 복잡하지 않다.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 28개월 아이 엄마는 1년에 걸쳐 변화했다. 첫 단계는 인정이었다. "나는 아이가 다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 무력감을 다시 느낄까 봐 두렵구나". 말로 하니 눈물이 났다. 30년간 숨겨온 두려움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구분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아니야. 아이가 다치는 것과 엄마가 쓰러지는 건 다른 일이야". 이렇게 구분하니 조금 편해졌다. 아이가 넘어지는 걸 봐도 예전만큼 공포스럽지 않았다.
세 번째 단계는 허용이었다. 아이가 미끄럼틀에 올라가려고 할 때 참았다. "안 돼!" 대신 "조심해"라고 말했다. 처음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잘 올라갔다. 내려왔다. 다치지 않았다. "아, 괜찮구나". 그제야 알았다. 아이는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엄마 눈치만 봤는데 이제는 마음껏 뛰어놀았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엄마가 자신의 두려움을 직면하자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불안을 짊어지지 않아도 됐다.
그 초등학생 아들 엄마도 변화했다. "나는 내가 당한 학교폭력의 상처를 아직 치유하지 못했구나". 인정하고 나니 아들에게 매달리는 게 줄어들었다. "엄마가 너를 지켜줄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힘들 때 언제든 말해. 엄마는 네 편이야". 이렇게 말하니 아들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6개월 후 아들은 친구가 많아졌다. 엄마의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니 자기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고등학생 딸 아버지도 변화했다. "나는 내 열등감을 딸로 해소하려 했구나". 인정하고 나니 딸에 대한 통제가 줄어들었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아빠는 모르겠어. 한번 말해줄래?". 처음으로 딸의 말을 들었다. 딸은 의대가 아니라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엔 놀랐다. 하지만 받아들였다. 1년 후 딸은 예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아버지의 열등감에서 자유로워지니 자기 꿈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과잉보호는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엄마 자신이 어린 시절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던 경험. 그 트라우마가 아이에게 투사되는 거다. "내가 받지 못한 보호를 내 아이에게는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아이는 보호받는 게 아니라 질식한다. 자율성을 잃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이거다. 과잉보호하는 엄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아이가 나를 떠나는 것"인데 과잉보호 때문에 결국 아이는 정말로 떠나게 된다는 거다.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분명하다.
진짜 보호는 이런 게 아니다. 아이가 안전한 환경에서 마음대로 탐험할 수 있게 해주는 거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다시 도전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거다. 위험한 건 미리 치워두되 나머지는 아이가 스스로 경험하게 놔두는 거다.
당신의 "안 돼!"를 한 번 점검해보라. 정말 아이를 위한 건지 아니면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건지. 아이가 다칠까 봐서인지 아니면 아이가 독립할까 봐서인지. 그 차이를 아는 순간 진짜 사랑이 뭔지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는 넘어져야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실패해야 성공하는 법을 안다. 혼자 있어야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당신의 "안 돼!" 대신 "해봐"라고 말할 용기를 가져라. 그게 진짜 사랑이다. 변화는 온다. 반드시 온다. 당신도 할 수 있다.
김호순 외(2023). 모신엄마. 대구: 달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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