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피한 슬픔, 지금 누가 겪고 있는가

by 홍종민


회피한 슬픔은 증발하지 않는다


한 남성이 있었다. 40대 중반. 회사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화제를 돌렸다.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입버릇처럼 했다. 친구들은 그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의 아내는 알고 있었다. 남편이 밤마다 악몽을 꾼다는 것을. 잠결에 "미안해"라고 중얼거린다는 것을.


이런 현상은 어디서나 발견된다. 슬픔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기억을 지우면 도시를 떠나면 그 감정도 함께 사라질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피부로 실감한다.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신이 회피한 슬픔은 증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기 중에 떠돌다가 당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스며든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이 바로 그랬다. 클레멘타인과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그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감정은 살아서 움직였다. 회피는 해결이 아니라 전염의 시작이었다. 바로 이거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대신 짊어진다


그 남성을 다시 보자. 그는 20년 전 아버지와 다퉜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버지는 일주일 후 돌아가셨다. 화해할 기회가 없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견뎠다. "어쩔 수 없었어" "이미 지나간 일이야".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다. 강한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저 아들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슬픔을 느끼지 않은 게 아니라 피한 거였다. 20년간 그 감정을 회피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딸이 중학생이 되면서 이유 없이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 같아요". 딸은 매일 울었다. 왜 우는지 자신도 몰랐다. 알고 보니 딸이 아버지의 죄책감을 대신 짊어지고 있었던 거다.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투사적 동일시가 바로 이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밀어내는 심리 작용. 중요한 건 투사된 감정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것은 다른 형태로 다른 관계에서 다른 시간에 반복된다. 그렇게 작동한다.


투사적 동일시의 작동 방식은 이렇다. 첫째, 감당 못 할 감정이 생긴다. 둘째, 무의식이 그 감정을 나쁜 것으로 분류한다. 셋째, 그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넷째, 투사받은 사람이 그 감정을 실제로 느낀다. 다섯째, 투사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편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섯째, 투사된 감정은 증폭되어 돌아온다. 명백하다.


한 중학생이 있었다. 공부를 잘했다. 성적도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시험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시험 보기 싫어요". 학교에 가지 않으려 했다. 부모는 당황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최근 회사에서 승진 탈락했다. 좌절감이 컸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괜찮아. 다음 기회가 있지". 아내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하지만 그 좌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에게 전이됐다. 아들이 아버지의 좌절감을 흡수한 거였다. 그래서 시험이 두려워진 것이다. 실패할까 봐. 아버지의 감정을 대신 느끼고 있었던 거다. 전쟁터였다. 아이는 매일 전투를 치르는 기분이었다.


정신분석가 윌프레드 비온은 이를 담는 것과 담기는 것의 관계로 설명했다. 한 사람이 감당하지 못한 감정을 다른 사람이 받아 안아주는 관계. 엄마가 아기의 불안을 담아주듯 가까운 사람은 자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흡수한다. 문제는 그 감정이 너무 뜨겁거나 독성이 있거나 회피된 것일 때다. 받아주는 사람도 데인다. 산소처럼 필요하다고 착각한다.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도 그랬다. 자신의 실수로 세 자녀를 잃었다. 견딜 수 없는 죄책감. 그래서 맨체스터를 떠나 보스턴으로 갔다. 물리적 거리를 두면 감정도 멀어질 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회피된 감정은 조카 패트릭에게 전달됐다. 리가 차갑게 대할 때마다 패트릭은 불안해졌다. "나 때문에 삼촌이 힘들어하는 거야?". 만약 리가 자신의 죄책감을 직면했다면 패트릭은 그 무게를 짊어지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 식이다.


당신도 지금 회피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가. 지금 당신도 어떤 감정을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닌가. 스스로는 잘 모를 수 있다. 회피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니까. 하지만 세 가지 신호가 있다.


첫째, 그 사람이나 그 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자동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건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둘째, 혼자 있을 때 이유 없이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답답하다. 특정 노래 장소 냄새에 과도하게 반응한다. 셋째, 주변 사람들이 당신 대신 감정을 표현한다. 당신은 담담한데 친구가 대신 화를 내고 당신은 괜찮다는데 가족이 먼저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 신호가 가장 결정적이다. 투사적 동일시의 명확한 증거다. 당신이 느끼지 않는 감정을 주변 사람이 대신 느끼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회피한 감정이 전염된 것이다. 확실하다.


심리치료 현장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한 내담자가 슬픔을 회피하는 순간 상담자가 그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은 방금 네가 회피한 것이다. 그리고 네 내면에 간직되어 있으면서 흥남이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게 만드는 그 슬픔은 네 아버지가 외면해온 것이다"(김형경, 2017: 145). 바로 이거다. 회피된 감정은 공중에 떠돌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착륙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감정을 직면하는 순간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다. 감정이 원래 주인에게 되돌아간다. 주변 사람이 느끼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고 당신이 비로소 자기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시작한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회피하던 사람이 감정을 담기 시작하면 그 감정은 자동으로 원래 자리를 찾아간다.


영화 속 조엘이 고통을 인정했을 때 클레멘타인도 자기 상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리가 만약 자신의 죄책감을 직면했다면 패트릭은 그 무게를 짊어지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직면은 감정의 주인을 되찾는 행위다. 당신이 당신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슬픔은 더 이상 타인을 떠돌지 않는다.


직면으로 가는 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변화는 특별한 게 아니다. 일단 멈추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 40대 남성은 1년에 걸쳐 변화했다. 첫 단계는 멈춤이었다. 도망치려는 그 순간 화제를 돌리려는 그 순간 딱 멈춰 섰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내가 피하려는 감정이 뭐지?". 답이 바로 안 나왔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니 감정이 서서히 올라왔다. 가슴이 조여왔다. 목이 멨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이게 죄책감이구나".


두 번째 단계는 이름 붙이기였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이게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었구나".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은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아니라 이름이 있는 감정이 됐다. 아기가 배고픔과 졸림을 구분하지 못하듯 우리도 복잡한 감정들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름을 붙이면 다룰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느끼기였다. 그냥 느꼈다. 억누르지 말고 밀어내지 말고 그 감정이 온몸을 휩쓸게 뒀다. 10분이면 충분했다. 길어야 30분이었다. 회피하면 평생 가는 고통이 직면하면 30분 만에 흘렀다. 뼛속까지 느꼈다. 이 진실을.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딸의 우울증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죄책감을 직면하자 딸은 더 이상 그 감정을 짊어지지 않아도 됐다. 한 달 후 딸은 웃기 시작했다. 5년 만에 처음 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 중학생 아버지도 변화했다. 회사에서의 좌절감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좌절했어. 서러워. 창피해". 아내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20년 결혼 생활에서 처음이었다. 그러자 아들이 다시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좌절을 직면하자 아들은 더 이상 그 감정을 짊어지지 않아도 됐다.


소설가 김형경은 말했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표현되지 않는 은밀한 부정적 감정을 물려받은 자녀는 탈출구를 찾기 어렵다"(김형경, 2017: 146). 하지만 당신이 지금 직면하면 대물림의 고리는 거기서 끊긴다. 분명하다.


방법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일단 멈춰라. 도망치려는 그 순간 화제를 돌리려는 그 순간 딱 멈춰 서라. 그리고 물어보라. "지금 내가 피하려는 감정이 뭐지?". 답이 바로 안 나와도 괜찮다. 가만히 있으면 감정이 서서히 올라온다. 가슴이 조여오고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럼 됐다. 거기까지만 가도 절반은 성공이다.


다음 단계가 중요하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라. "아, 이게 슬픔이구나" "이게 죄책감이었구나" "이게 분노였구나".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은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아니라 이름이 있는 감정이 된다.


마지막 단계는 느끼는 것이다. 그냥 느껴라. 억누르지 말고 밀어내지 말고 그 감정이 온몸을 휩쓸게 두라. 10분이면 충분하다. 길어야 30분이다. 회피하면 평생 가는 고통이 직면하면 30분 만에 흐른다.


영화 속 몬토크 해변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웃으며 눈밭을 걸었다. 모든 걸 알면서도 다시 아플 걸 알면서도.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오늘 저녁 혼자 있을 때 10분만 시도해보라. 피하던 그 감정을 딱 10분만 느껴보라. 당신이 30년 회피한 슬픔도 10분 직면하면 흐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당신 곁에서 당신의 감정을 대신 짊어지던 사람이 비로소 숨을 쉰다. 당신의 직면이 그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변화는 온다. 반드시 온다. 이제 당신 차례다.


김형경(2017). 소중한 경험. 서울: 사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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