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명리학의 기호, 라캉의 기표

by 홍종민

2019년 깊은 겨울, 나는 책상 위에 펼쳐놓은 만세력(萬歲曆)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이 22개의 기호는 단순한 부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 문명이 우주와 인간을 이해하고 표현해온 상징 체계였다. 라캉이 말한 '기표(signifier)'의 완벽한 예시였다. 의미를 담는 그릇이면서, 그 의미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미끄러지는.


갑(甲)이라는 기호를 보자. 사전적으로는 '첫 번째 천간'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궁무진하다. 갑목(甲木)은 큰 나무, 동쪽, 봄, 청색, 간장, 분노, 인(仁), 시작, 리더십, 고집, 아버지... 하나의 기호가 수십 개의 의미로 확산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의미는 맥락에 따라, 조합에 따라, 해석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다. 라캉이 말한 '기표의 미끄러짐(glissement du signifiant)'이 바로 이것이었다.

상담실에서 나는 매일 이 기호들의 춤을 목격한다. 같은 갑목 일간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가. 어떤 이에게 갑목은 '든든한 보호자'이고, 어떤 이에게는 '답답한 권위자'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외로운 거목'이다. 기호는 같지만 각자의 무의식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같은 기호, 다른 읽기


2020년 봄,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서로 다른 명리학자 10명에게 같은 사주를 해석하게 했다. 1985년 3월 15일 오후 2시생, 을축년(乙丑年) 기묘월(己卯月) 정사일(丁巳日) 정미시(丁未時). 결과는 놀라웠다. 10명이 10가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누구는 '예술가적 기질'을 강조했고, 누구는 '사업가 자질'을 봤으며, 누구는 '학자의 운명'이라 했다. 같은 기호, 다른 읽기.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한 '기표의 다의성(polysemy)'이었다.


천간과 지지의 조합은 더욱 복잡한 의미망을 만든다. 갑자(甲子)는 갑목과 자수의 만남이다. 목생화(木生火)? 아니다. 자수 속에는 계수(癸水)가 숨어있다. 수생목(水生木)이다. 하지만 자(子)는 또한 쥐띠이고, 북쪽이며, 한겨울이고, 자정이다. 이 모든 의미가 중첩되고 간섭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화학적 결합이다.

한 내담자가 자신의 일주(日柱) 갑자(甲子)에 대해 물었다. "갑자가 무슨 의미인가요?" 나는 역으로 물었다. "당신에게 갑자는 어떤 느낌인가요?"

그녀는 한참 생각하다 답했다. "차가운 물 위에 홀로 선 나무 같아요."

완벽한 해석이었다. 그녀의 무의식이 기호를 읽어낸 것이다. 갑목의 고독과 자수의 차가움이 그녀의 정서 상태와 정확히 일치했다.


육친이라는 관계의 기표


육친(六親)은 명리학에서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기호 체계다. 비견(比肩), 겁재(劫財), 식신(食神), 상관(傷官), 정재(正財), 편재(偏財), 정관(正官), 편관(偏官), 정인(正印), 편인(偏印). 열 개의 기호로 모든 인간관계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원형(archetype)이다.

정인(正印)은 전통적으로 어머니를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정인이 어머니는 아니다. 그것은 '돌봄과 보호'라는 기능을 나타내는 기표다. 때로는 스승이 되고, 때로는 멘토가 되며, 때로는 자기 자신의 모성적 측면이 된다. 라캉이 말한 '떠다니는 기표(floating signifier)'처럼, 정인은 상황에 따라 다른 대상에 부착된다.


2021년 여름, 한 남성이 찾아왔다. 서른다섯 살, 미혼. 그의 사주에는 정인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와 관계가 안 좋으신가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뇨, 어머니와 사이는 좋아요. 대신 제가 모든 여자친구를 어머니처럼 돌봐요."

정인이 없는 그는 스스로 정인이 되어 있었다. 결핍이 과잉보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라캉이 말한 '결여(manque)를 메우려는 욕망'이었다.

편관(偏官)은 통제와 압박의 기표다. 전통적으로 남성에게는 자녀, 여성에게는 애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편관은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직장 상사, 사회적 압력, 내면의 비판자, 심지어는 코로나19 같은 외부 위협도 편관으로 경험된다.

한 여성은 사주에 편관이 가득했다. 네 개나 있었다. 전통적 해석으로는 '남자 관계가 복잡하다'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연애를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네 개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험이 저를 압박해요. 마치 네 명의 감시자가 있는 것 같아요."

편관이 시험이라는 현대적 압박으로 나타난 것이다. 기표는 같지만 기의(signified)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식상(食傷)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농경시대에 식신(食神)은 말 그대로 '먹을 것'과 관련되었다. 자녀이자 수확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식상은 창조성과 표현의 기표가 되었다. 유튜버, 작가, 아티스트, 인플루언서... 모두 식상의 현대적 발현이다.

2020년 겨울, 스물여덟의 유튜버가 찾아왔다. 구독자 50만의 성공한 크리에이터였다. 그의 사주는 식상이 넘쳐났다.

"전 자녀는 싫은데 콘텐츠는 계속 낳고 싶어요."

그에게 식신은 아이가 아니라 영상이었다. 매일 새로운 콘텐츠를 '출산'하는 것이 그의 식신 에너지 표출 방식이었다. 라캉이 말한 '기표의 은유적 치환'이 일어난 것이다.


합충형파해의 기표 작용


합(合), 충(沖), 형(刑), 파(破), 해(害). 명리학에서 간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길흉이 아니라 관계의 역동을 보여주는 기표다. 라캉의 언어로 말하면, 기표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의미 효과다.

자오충(子午沖). 쥐와 말의 충돌. 북과 남의 대립. 한밤과 한낮의 충격. 물과 불의 상극.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나쁜 것'으로 읽는 것은 기표의 풍부한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충(沖)은 깨뜨림이자 깨달음이고, 파괴이자 창조이며, 끝이자 시작이다.

2019년 가을, 한 예술가가 찾아왔다. 그해가 그녀에게 자오충이 일어나는 해였다. 전통적으로는 '흉년'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해 이혼했다. 하지만 동시에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다.

"충격이 영감이 됐어요. 깨지면서 깨달았어요."

충이 파괴가 아니라 돌파가 된 것이다. 라캉이 말한 '상징적 거세(symbolic castration)'처럼, 상실을 통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었다.

인사형(寅巳刑)은 더욱 복잡한 기표 작용을 보여준다. 호랑이와 뱀의 형벌. 목과 화의 과도한 생(生). 열정의 자기 파괴. 전통적으로 '무은지형(無恩之刑)'이라 해서 배은망덕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대적 읽기는 다르다. 그것은 과도한 열정이 자기를 태우는 것이고, 창조적 광기이며, 예술적 자기 파괴다.

한 뮤지션은 인사형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에 미쳐서 모든 걸 태워요. 가족도, 건강도, 돈도."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이게 제 스타일이에요. 타오르다 재가 되는 것."

형(刑)이 고통이 아니라 강렬함의 기표가 된 것이다. 라캉이 말한 '주이상스(jouissance)', 고통스러운 즐거움이었다.


해(害)는 가장 음험한 관계다. 자미해(子未害), 축오해(丑午害) 등 여섯 가지가 있다. 겉으로는 화합하지만 속으로는 해치는 관계. 하지만 이것도 단순한 흉이 아니다. 그것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기표다. 편안한 거짓보다 불편한 진실이 나을 때가 있다.

2021년 봄, 한 부부가 찾아왔다. 남편 일주와 아내 일주가 해(害) 관계였다. 10년간 '가면 부부'로 살았다고 했다.

"서로 상처 주기 싫어서 진실을 숨겼어요."

하지만 해(害)의 에너지는 결국 진실을 드러내게 했다. 불륜, 도박, 거짓말... 모든 비밀이 폭로됐다. 파국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진짜 대화를 시작했다.

"해가 오히려 구원이었어요. 가면을 벗고 진짜 우리를 만났으니까."

해가 파괴가 아니라 진실의 기표가 된 것이다.


공망과 부재의 기표


공망(空亡)은 '빈 것', '없는 것'을 의미하는 명리학의 특수한 기표다. 60갑자 중에서 10개씩 묶으면 매번 두 개의 지지가 빠진다. 그것이 공망이다. 전통적으로는 흉하게 본다.

하지만 라캉의 관점에서 공망은 매우 흥미로운 기표다. 그것은 '부재하는 현존(present absence)'이다.

라캉은 "욕망은 결여에서 생긴다"고 했다. 없기 때문에 욕망하고, 비어있기 때문에 채우려 한다. 공망은 바로 이 결여를 나타내는 기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종종 이 빈 곳에서 나온다.

2020년 여름, 한 작가가 찾아왔다. 그의 월지(月支)가 공망이었다. 월지는 부모궁이자 청소년기를 나타낸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열다섯에 고아가 됐죠."

공망이 문자 그대로 '부재'를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그 부재를 글쓰기로 채웠다.

"부모님이 없어서 더 많은 부모를 상상했어요. 모든 작품에 이상적인 부모가 등장해요."

공망은 비어있음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정해진 것이 없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라캉이 말한 '텅 빈 기표(empty signifier)'처럼, 공망은 어떤 의미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홍종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홍종민의 브런치스토리입니다.

87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8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0화9장. 기(氣)와 무의식: 동양의 촉과 서양의 욕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