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사랑, 그래도 사랑인가

by 홍종민

어느 날 후배가 물었다. "선배, 부모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고 하시는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힐까요? 사랑받는데도 왜 이렇게 외로울까요?" 순간 정신분석가 마이클 아이건의 '독이 든 양분'이라는 책이 번쩍 떠올랐다. 사랑이 독이 될 수 있다니. 그런데 이상한 건, 주위를 보면 너나없이 이런 역설적 고통을 안고 산다는 거다. 근래에 조용하고 빠르게 확산하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상처'다. 상담 전문가들의 통계 없어도 사랑한다면서 상처 주는 관계, 보호한다면서 질식시키는 관계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걸 생생하게 목격한다

김형경은 "부모의 사랑 속에 은밀하게 내포된 독성"(김형경, 2020: 151)을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양분에 독이 들어있다는 건,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이 다 약은 아니라는 거다. 틀림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전쟁


생각해보면 사랑만큼 복잡하고 위험한 감정도 없다. 특히 부모의 사랑은 더 그렇다. 왜일까? 그래서일까. 정신분석가 마이클 아이건이 날카롭게 지적한 것처럼 "부모의 사랑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혼합되어 있다"(아이건, 2009: 10). 이 말이 충격적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사랑의 이면을 모르는 거다.


40대 여성이 상담실을 찾았다. 대기업 임원으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어머니 앞에서만 서면 10살 아이가 된다고 했다. "엄마는 늘 저를 자랑스러워하세요. 그런데 왜 그 자랑스러움이 칼처럼 느껴질까요?" 그녀가 묻자 나는 되물었다.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는 건 당신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성공인가요?"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 (눈물이 핑 돌며) "아... 그거였군요. 엄마는 한 번도 실패한 저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성공한 저만 사랑했어요."

바로 여기다. 사랑이 조건부일 때, 그 사랑은 이미 독이다. 예외가 없다. 성적이 좋을 때만, 말 잘 들을 때만, 성공했을 때만 주어지는 사랑.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심리적 침략이다. 국경 수비대가 한 명도 없는 나라에 침략군이 들어오듯, 조건부 사랑은 아이의 심리적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김형경이 인용한 윌프레드 비온의 1960년대 중반 UN 연설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아는가. "이 세상에는 실제로 나쁜 부모가 존재합니다"(김형경, 2020: 149). 부모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이던 시대에 이런 폭탄선언을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2025년 지금도 이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천지다. 왜일까?

그런 이유일까. 우리는 여전히 '부모는 무조건 선하다'는 집단 최면에 걸려있다. 이 최면이 얼마나 강력한지, "아동폭력 가해자의 80퍼센트는 부모"(김형경, 2020: 150)라는 충격적 통계를 봐도 믿지 않으려 한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부모의 독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건, 그만큼 우리가 부모라는 권위에 중독되어 있다는 증거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도대체 왜 부모의 사랑에는 독이 들어갈까? 아이건은 명쾌하게 답한다. "부모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아이를 덮친다"(아이건, 2009: 9-10). 부모의 불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기증오, 이루지 못한 꿈, 좌절된 욕망, 숨겨진 열등감. 이 모든 심리적 쓰레기가 사랑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아이에게 무차별 투하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부모. "난 너를 위해 모든 걸 포기했어"라고 말하는 부모 말이다. 겉으로는 숭고한 헌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인생의 실패를 아이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행위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빚쟁이가 된다.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채로.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다. 이건 감정적 착취다.

상담실에서 30대 의사를 만났다. 그는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이 의사였어요. 저는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룬 거예요. 제 꿈은 사실 요리사였는데..."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30년 동안 남의 꿈을 살아온 사람의 눈물이었다.


독화된 사랑의 세 가지 치명적 유형


관찰한 결과, 독이 든 사랑에도 뚜렷한 세 가지 유형이 있음을 발견했다. 각각이 어떻게 아이의 영혼을 파괴하는지 보자.


첫째는 질식형 사랑이다. 과잉보호라는 이름의 심리적 감옥. 아이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결정하면서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세뇌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런 부모일수록 자신이 최고의 부모라고 철석같이 믿는다는 거다. 자기도취의 극치다.


둘째는 방치형 사랑이다. 무관심을 자유라고 포장하는 교묘한 학대. "난 네가 알아서 하길 원해"라고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진실은 아이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거다. 겉으로는 민주적이고 진보적으로 보이지만, 정서적 돌봄이 완전히 결여된 심리적 고아 상태다.


셋째는 조건형 사랑이다. 성과와 순응을 대가로 주어지는 거래형 사랑. 100점 맞으면 사랑하고, 1등 하면 인정한다. 이런 사랑을 받은 아이는 평생을 증명하며 산다.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걸 끊임없이 입증하려고.

30대 남성의 사례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는 매년 연봉이 올라도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더 많이 벌어야 해요. 더 성공해야 해요. 그래야 부모님이 저를..."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부모님이 당신을 뭐라고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사랑하실 거예요. 아마도... 아마..."


그게 바로 조건형 사랑이 남긴 치명적 상처다.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 늘 '아마도'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을 성과라는 제단에 자신을 바친다. 하지만 아무리 성공해도 공허함만 커진다. 왜? 그들이 진짜 갈망하는 건 성공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름끼치는 진실이 하나 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부모들 모두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한다고 굳게 믿는다는 거다. 그들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랑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오염됐을 뿐이다. 마치 맑은 물이 녹슨 파이프를 통과하면서 독극물이 되듯이.


역사가 증명한 독의 실체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놀라운 반전이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동시에 그 영향이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불편한 진실도 드러났다. 한마디로 양날의 칼이다. 부모는 생명을 주지만 동시에 상처도 준다. 어김없이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정신분석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물리적 돌봄만으로는 아이가 살 수 없다는 거였다. 밥 주고, 옷 입히고, 재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서적 온기가 없으면 아이는 말 그대로 죽어갔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취약한 아이라도 따뜻한 품에 안기면 기적처럼 살아났다.


일종의 법칙이다.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고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정서적 돌봄 없이는 인간도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작동한다. 산소를 이고 지고 택배 배달원처럼 먼 길을 떠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이 배달이 끊기면 생명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산소에 독이 섞이면 어떻게 될까? 바로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숨은 쉴 수 있다. 하지만 평생 그 독에 중독되어 산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서서히 썩어간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용지물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가 1990년대 말 처음 번역될 때 제목이 《혼들리는 부모들》이었다. '독'이라는 단어조차 쓸 수 없었다.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원제에 가까운 제목을 사용할 수 있었다(김형경, 2020: 150-151). 이게 뭘 의미하는가? 우리가 얼마나 부모의 독성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왜 이토록 인정하기 어려운가? 부모는 무조건 선하다는 집단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부인(denial)이고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다.


독을 해독하고 진짜 사랑으로 나아가기


그렇다면 이 치명적인 독을 어떻게 해독할까? 마이클 아이건은 "양분을 주는 우리의 노력이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독소를 포함하고 있고, 우리 자신도 다양한 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모험이다"(아이건, 2009: 10)라고 했다. 그렇다. 직면이 첫걸음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첫째, 독의 존재를 철저히 인정하라. "우리 부모님은 절대 안 그래"라는 방어적 부정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모든 사랑에는 어느 정도 독이 섞여있다. 그게 불완전한 인간의 숙명이다. 완벽한 부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독과 양분을 냉정하게 구분하라. 부모가 준 것 중에 뭐가 진짜 양분이고 뭐가 치명적 독인지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열심히 살아라"는 양분이지만 "나처럼 살지 마라"는 독이다. 전자는 격려지만 후자는 자기부정과 자기혐오의 대물림이다.


셋째, 독을 과감히 뱉어내라. 심리적으로 독을 토해내는 정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상담, 글쓰기, 예술치료 등을 통해 오랫동안 억압된 감정을 폭발시켜라. "부모님이 미웠어요"라고 처음 인정하는 것도 위대한 치유의 시작이다.

50대 여성의 극적인 사례가 있었다. 20년간 원인모를 우울증에 시달렸다. 약물치료도 소용없었다. 상담 6개월째,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폭탄 같은 고백을 했다.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저를 통해 자신의 허영심을 채웠을 뿐이에요." (격렬히 흐느끼며) "50년 만에 처음 하는 말인데... 왜 이렇게 시원할까요?"

독을 토해낸 거다. 50년 동안 내장을 썩이던 맹독을 드디어 뱉어낸 거다. 그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고질적 우울증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독을 인정하고 뱉어내니 비로소 순수한 양분만 남았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부모를 증오하고 원망하라는 게 절대 아니다. 부모도 그들의 부모에게서 독을 받은 피해자다. 대물림되는 거다.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독의 사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저주받은 대물림을 끊는 것이다.

상담실에서 만난 30대 남성이 감동적인 깨달음을 들려줬다. "이제야 알겠어요. 부모님도 상처받은 아이였구나. 그들이 줄 수 있는 최선을 준 거구나. 비록 그게 독이 섞인 사랑이었지만." 그는 부모를 용서했다. 아니, 이해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자신의 아이에게는 다른 사랑을 주기로.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독이 든 양분이라도 양분은 양분이다.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왜곡됐어도 그 안에 사랑의 씨앗은 있다. 우리는 독을 걸러내고 양분만을 취할 수 있다. 마치 오염된 물도 정수하면 생명수가 되듯이.

마이클 아이건의 통찰이 가슴을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양분을 주며 살아간다"(아이건, 2009: 10). 독이 있어도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게 인간의 숙명이자 희망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독을 줄이고 양분을 늘리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당신이 받은 사랑에도 분명 독이 있을 거다. 당신이 주는 사랑에도 독이 섞여있을 거다. 그래도 절망하지 마라. 인정하고, 직면하고, 정화하면 된다. 완벽한 사랑은 없다. 하지만 덜 독한 사랑, 더 깨끗한 사랑, 더 순수한 사랑은 분명 가능하다. 바로 이게 현실이다.

오늘부터라도 내 사랑의 독성을 점검해보자. 내가 조건부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상처와 결핍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해독해가자. 그것이 진짜 사랑의 시작이다.


마이클 아이건/ 이재훈 역(2009). 독이 든 양분.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김형경(2017). 소중한 경험. 서울: 사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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