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지인이 내게 물었다. "제가 이상한 건가요? 회사를 옮길 때마다 똑같은 타입의 상사를 만나요. 마치 아버지의 복사판들 같아요."
둘 중 하나다. 정말 운이 없거나, 무의식이 작동하거나. 하지만 세 번이나 반복된다면 답은 명확하다.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라는 것처럼 불가능한 우연이다. 무의식은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반복해서 우리 앞에 가져다놓는다.
멜라니 클라인의 투사적 동일시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면 멜라니 클라인의 '투사적 동일시' 개념을 알아야 한다. 내 안의 불편한 감정을 남에게 떠넘기는 심리 기제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해"라고 느낄 때, 실은 내가 그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 의사 유범희는 천 과장의 사례를 통해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천 과장은 김 부장을 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가 연상되면서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유범희, 2016: 26).
천 과장의 아버지는 집안의 폭군이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가부장적이었으며 폭력적이었다. 그런데 묘한 건, 큰아들인 천 과장만은 아꼈다는 점이다. 어려운 형편에도 서울 유학을 보낸 사람이 아버지였다.
이런 이중적 메시지가 천 과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미워해야 할까, 고마워해야 할까?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감정을 얼려버렸다. 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담담해서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클라인은 이런 상황을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의 분열로 설명한다. 천 과장에게 아버지는 동시에 두 가지였다. 가족을 괴롭히는 나쁜 아버지, 자신을 아끼는 좋은 아버지. 이 분열을 통합하지 못하면 평생 비슷한 인물과 충돌하게 된다.
세레나 윌리엄스의 코트 위 전쟁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의 2018년 US오픈 결승전을 기억하는가? 심판과의 격렬한 충돌로 경고를 받고 결국 패배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감정 조절 실패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2019년 타임지 인터뷰에서 세레나는 깊은 고백을 했다. "그 심판의 목소리와 말투가 아버지와 너무 닮았어요. 제 아버지는 저와 비너스를 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새벽 4시부터 훈련시켰죠. 사랑이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린 저에게는 너무 가혹했어요."
리처드 윌리엄스, 세레나의 아버지는 두 딸을 테니스 챔피언으로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컴프턴의 위험한 동네에서 총소리를 들으며 연습했고, 인종차별적 야유를 받으며 경기했다. 아버지는 딸들의 보호자이자 동시에 가장 엄격한 감독이었다.
"코트 위에서 권위적인 남성의 목소리를 들으면, 10살의 제가 튀어나와요. 아버지 앞에서 숨죽이던 그 아이가." 세레나는 이후 심리 상담을 받았고, 이제는 심판을 심판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녀의 경우 특히 흥미로운 건, 여성 심판과는 충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남성의 권위적 목소리가 특정한 트리거가 되는 거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선택적 작동이다.
천 과장이 발견한 진실
유범희가 묘사한 천 과장의 각성 과정은 극적이다. "천 과장은 상담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유범희, 2016: 27).
상담 과정에서 천 과장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김 부장과 싸울 때마다 느끼는 그 분노가 사실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는 걸.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아버지를 미워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에 대한 죄책감. 삼중의 죄책감이 분노로 변장하고 있었다.
도널드 위니콧이 말한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 개념을 아버지에게 적용하면, 천 과장의 아버지는 '충분히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일관되어야 하는데, 천 과장의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폭군, 큰아들에게는 후원자였다. 이 분열이 천 과장의 내면도 분열시켰다.
위니콧은 이런 비일관성이 '거짓 자기(false self)'를 만든다고 했다. 천 과장은 아버지 앞에서 '고마워하는 아들'을 연기해야 했고, 어머니 앞에서는 '미안해하는 아들'을 연기해야 했다. 진짜 자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에미넴의 어머니 투사
래퍼 에미넴도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데뷔 초기 그의 가사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2002년 'Cleanin' Out My Closet'에서는 어머니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런데 2013년 'Headlights'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엄마, 미안해요. 당신도 희생자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요." 40대가 된 에미넴은 어머니가 정신질환과 싸우고 있었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흥미로운 건, 에미넴이 여성 프로듀서나 레이블 관계자들과 유독 충돌이 잦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투사했던 거다. 하지만 상담과 성찰을 통해 그는 패턴을 끊었다. 이제는 여성 아티스트들과도 원만하게 협업한다.
에미넴의 경우, 딸 헤일리가 태어난 것이 전환점이었다. 딸을 키우면서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게 됐다. "아, 엄마도 최선을 다했구나. 단지 너무 아팠을 뿐이구나."
반복을 끊는 실천법
그렇다면 어떻게 이 반복의 굴레를 끊을 수 있을까? 유범희는 "무의식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유범희, 2016: 28)고 말한다.
패턴 파악 체크리스트:
충돌하는 상대들의 나이, 성별, 말투의 공통점은?
그들을 대할 때 내 몸의 반응은? (목소리 톤, 자세, 표정)
그때 떠오르는 어린 시절 장면은?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숙제는 무엇인가?
3단계 실천법:
1단계: 신체 감각 알아차리기 (10초) 김 부장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진다면, 그 답답함의 위치와 크기를 느껴본다. 테니스공 크기? 농구공 크기? 어린 시절 느꼈던 그 답답함과 같은가?
2단계: 시간 분리하기 (30초) "이 감정은 2024년의 것인가, 1994년의 것인가?" 천 과장처럼 30년 전 감정일 수 있다.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오래된 감정은 현재에 맞지 않는다. 과거의 분노를 현재에 쏟아내는 건, 썩은 우유를 신선한 컵에 붓는 것과 같다.
3단계: 현재에 닻 내리기 (3분) 발가락을 꿈틀거려본다. 손목시계를 만져본다. 지금 이 순간의 온도와 빛을 느낀다. "나는 어른이고, 선택할 수 있고, 떠날 수도 있다"고 속으로 말한다. 천 과장이 아버지가 아닌 김 부장을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천 과장은 이 과정을 통해 김 부장을 김 부장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세레나도 이제는 심판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는다. 에미넴도 과거의 유령과 작별했다.
바로 여기가 포인트다. 지금 미워하는 그 상사, 정말 그 사람 때문에 화가 나는가? 아니면 20년 전, 30년 전의 누군가 때문인가?
무의식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치유받고 싶어서 신호를 보내는 거다. 마치 길 잃은 아이가 집을 찾듯, 계속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해결을 요구한다.
이제 그 신호를 읽을 때다. 과거를 현재에서 분리하는 것, 그것이 자유의 시작이고 그것이 성장이다. 천 과장도, 세레나도, 에미넴도 그 길을 걸었다.
당신의 차례다. 오늘 만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과거의 유령이 아닌, 현재의 사람으로.
유범희(2016). 다시 프로이트, 내 마음의 상처를 읽다. 서울: 더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