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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인데 왜 옛 상처가 느껴질까.....

by 홍종민

24살에 은퇴한 챔피언


2023년, 나오미 오사카가 다큐멘터리에서 털어놓은 말이 충격이었다.

"코트에 서면 자꾸 어린 시절 코치가 소리치던 게 들려요. 지금은 다른 코치인데도요."

그랜드슬램 4회 우승. 세계 랭킹 1위. 한창 전성기인 24살에 우울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새 코치가 부드럽게 "잘했어"라고 말해도, 그녀 귀엔 옛 코치의 날선 비난 "넌 형편없어"로 들렸다.

왜 그럴까?

명확히 해두자. 이건 단순한 번아웃이 아니다. 예민한 성격 탓도 아니다. 이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심리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거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전이'라 불렀고, 그의 추종자 설리반은 '병렬 왜곡'이라 했다.

같은 현상처럼 보이지만, 작동 방식은 1밀리미터도 다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

이 차이를 모르면? 평생 같은 관계를 반복하는 전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확히 그거다.


프로이트의 전이 - 과거가 현재를 점령하다


전이는 무엇이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시간 여행하는 마음'이라고 답할 것이다.

1890년대 후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내담자들이 자신에게 강렬한 감정을 쏟아냈다. 어떤 이는 프로이트를 열렬히 사랑했고, 어떤 이는 극도로 두려워했다.

처음엔 치료 방해물로 여겼다. 그런데 순간 깨달았다. 이게 바로 치료의 결정적 무기라는 걸.

내담자들은 프로이트를 보는 게 아니었다. 과거의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대부분 부모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지금 상담사한테 그대로 옮겨놓는 거다.

마치 오래된 영화를 지금 스크린에 틀어놓듯.

프로이트는 이걸 '전이(transference)'라 이름 붙였다. 옮긴다는 뜻이다. 딱 그거다. 과거 감정을 지금 사람한테 통째로 옮기는 것.

핵심은 '바꿔치기'다.

상담사는 과거 사람 대신 들어온 거다. 내담자는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다. 30년 전을 살고 있다. 생존이 불가능한 시간 여행이다.

나오미 오사카의 경우를 보자.

프로이트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새 코치를 만났을 때 과거를 '풀어놓고' 있다. 어린 시절 가혹했던 옛 코치와의 경험을, 지금 여기서 다시 살고 있는 거다.

새 코치의 실제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스크린이었고, 그 위에 비춰진 건 과거였다.


무의식에겐 시간이 없다


프로이트는 이걸 무의식으로 설명했다.

무의식에겐 과거와 현재가 구분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욕망과 상처가 냉동실 음식처럼 그대로 보존돼 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오면 쓰나미처럼 다시 살아난다.

조목조목 따져보자.

프로이트는 전이 분석을 치료의 중심에 뒀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전이 분석은 절반 이상의 시간을 차지한다. 내담자가 상담사한테 느끼는 감정을 조목조목 세밀하게 분석하는 거다.

"당신이 지금 나한테 느끼는 이 분노는, 사실 어린 시절 당신을 버렸던 아버지한테 느낀 분노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


여기서 결정적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전이 분석이다. 일반 심리치료는 증상과 문제 해결에 집중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다르다.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이를 분석하는 게 핵심이다.

이게 프로이트가 발견한 가장 혁명적인 통찰이었다. 내담자가 상담자한테 느끼는 감정 그 자체가 치료의 재료라는 거다. 내담자가 "선생님이 절 무시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 프로이트는 "당신은 지금 과거의 누군가를 나한테서 보고 있습니다"라고 해석했다.

이 전이 분석이 없으면 심리치료다. 전이 분석이 있으면 정신분석이다. 그만큼 전이는 정신분석의 심장이다.

내담자가 몇 달, 때로는 몇 년 동안 상담사와의 관계에서 과거를 풀어놓으면, 그 상처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프로이트는 믿었다. 과거를 다시 살면서, 그 과거를 이해하고 넘어서는 거다.

이게 프로이트식 치유의 절대 요소였다.

프로이트식 상담사는 '빈 스크린'이 되려고 노력한다. 자기 색깔을 최대한 지우는 거다.

왜?

내담자가 자기 과거를 더 자유롭게 투사할 수 있도록. 상담사의 개성이 드러나면, 내담자의 순수한 전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상담사는 백지 같은 존재라야 한다. 그게 프로이트의 원칙이었다.

나오미 오사카는 새 코치가 "잘했어"라고 말해도 "넌 형편없어"로 들었다. 그녀 귀엔 옛 코치의 목소리만 들렸다. 새 코치의 실제 말은 그녀 마음에 닿지 못했다.

과거가 현재를 완전히 점령한 상태였다.

프로이트라면 이렇게 진단했을 거다. "그녀는 지금 과거 트라우마를 풀어놓고 있다. 이게 전이의 오묘한 팩트다."


설리반의 병렬 왜곡 - 색안경을 끼고 세상 보기


병렬 왜곡은 뭐냐? 나는 '색안경으로 세상 보기'라고 말한다.

1920-30년대, 해리 스택 설리반은 프로이트와는 다른 길을 갔다. 프로이트가 개인 내면에 집중했다면, 설리반은 관계에 주목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관계의 총합이다."

설리반은 병렬 왜곡(parataxic distortion)을 이렇게 정의했다.

"초기 삶에 가까웠던 사람과의 완성되지 못한 관계의 영향으로 감정과 행동이 왜곡되는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 (채프먼, 2018: 155)


어린 시절 중요한 사람과 제대로 맺지 못한 관계가, 지금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여기서 번쩍 깨달아야 할 게 있다.

이건 특별한 사람만 겪는 게 아니다. 병렬 왜곡은 모든 사람의 일상에서 일어난다. 크든 작든. 예외가 없다.


침묵이 분노로 들릴 때


구체적으로 보자.

어떤 남자가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조용할 때마다 곧 폭발적인 화를 냈다. 침묵은 항상 폭풍 전의 고요였다. 그는 "침묵 = 곧 터질 분노"라는 공식을 배웠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었다.

이제 어른이 된 그가 직장 상사와 회의를 한다. 상사는 몇 분간 조용히 서류를 본다. 그냥 집중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극도로 불안해진다.

상사가 자기한테 화났고, 곧 폭발할 거라고 확신한다. 방어적이 되고, 쓸데없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상사는 당황한다. "내가 뭘 잘못했지?"

단지 서류를 읽고 있었을 뿐인데, 그는 상사의 침묵을 분노의 신호로 '왜곡'해서 본 거다.

바로 이게 병렬 왜곡이다. 이게 현실이다.


전이와의 결정적 차이


전이와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 있다.

"병렬 왜곡에서 한 사람은 경험을 '풀어놓지' 않으며, 단순히 그의 성격 형성기 동안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감정과 행동의 패턴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채프먼, 2018: 156)


무슨 뜻일까? 조목조목 따져보자.


첫째, 전이는 과거를 다시 사는 거다. 내담자는 시간 여행을 한다. 지금이 아니라 30년 전을 산다.


둘째, 병렬 왜곡은 과거에 만들어진 '패턴'을 지금 적용하는 거다. 남자는 어머니와의 경험을 다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어릴 때 배운 "침묵 = 분노"라는 공식을 상사한테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이건 생존 전략이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침묵을 분노로 읽는 건 산소를 마시는 것만큼 절대적이었다. 안 그러면 살 수 없었다.

설리반은 프로이트가 말한 '감정 풀어놓기'를 믿지 않았다.

사람은 치료실에서나 일상에서나 과거를 다시 살지 않는다고 봤다. 그냥 어릴 때 만들어진 관계 패턴을 계속 사용할 뿐이라는 거다. 일종의 법칙이다.


자기실현 예언의 비극


신기한 건, 병렬 왜곡은 양방향이라는 거다.

전이에선 상담사가 주로 가만히 있는다. 하지만 병렬 왜곡에선 두 사람 모두 움직인다.

남자가 상사의 침묵을 분노로 잘못 보고 방어적으로 굴면, 상사는 실제로 짜증이 날 수 있다. "쟤 왜 저래?" 하면서.

그러면 남자의 잘못된 생각이 '자기실현 예언'이 된다. 왜곡이 진짜를 만들어내는 거다.

이게 병렬 왜곡이 치명적인 이유다.

설리반은 불안의 역할도 강조했다. 불안은 본질적으로 관계에서 나온다. 아기는 엄마의 불안을 공감적으로 전달받아 불안해진다.

병렬 왜곡은 바로 이 불안을 피하려는 시도다.

남자가 상사의 침묵을 분노로 보는 건 아무 이유 없는 실수가 아니다.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병렬 왜곡을 통해 그는 예측 못 하는 걸 예측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확신이, 불확실성의 불안보다 낫다.

나오미 오사카로 돌아가보자.

병렬 왜곡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새 코치의 실제 말을 잘못 들은 거다. 새 코치는 진짜로 "잘했어"라고 말했다. 이건 사실이다.

문제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그녀는 이 말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의미 중에서 "비난"이라는 하나만 골랐다. 그녀의 색안경이 그렇게 보이게 만든 거다.

지금 관계가 주인공이다. 과거는 뒤에서 작동하지만, 앞에 있는 건 항상 지금 이 관계다. 그게 병렬 왜곡의 핵심이다.


빈 스크린 vs 진짜 사람


병렬 왜곡에서 상담사나 상담가는 내담자와 진짜 관계를 맺으려 한다. 빈 스크린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모습 그대로 내담자를 만난다.

이게 설리반 방식의 결정적 무기다.

내담자가 자기를 비판적으로 본다고 느끼면, 상담가는 단순히 "당신은 나를 당신 엄마로 보고 있어요"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비판적으로 느낀다는 걸 알겠어요. 내가 실제로 한 말이나 행동 중에 그렇게 느끼게 만든 게 있었나요? 함께 찾아봅시다."

이건 내담자와 상담가가 함께 지금 상호작용을 탐색하는 협력 과정이다. 이게 설리반 방식이다.

과거를 풀어놓는 게 치유의 몫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치유다.


두 개념의 본질적 차이


자 그럼 둘의 차이는 정확히 뭘까?

A.H. 채프먼은 설리반의 이론을 해설하며 이렇게 비유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둘 다 중력 개념을 사용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중력은 뉴턴과 완전히 다르다.

프로이트의 전이와 설리반의 병렬 왜곡도 마찬가지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완전히 다른 걸 말하는 거다. 바로 이거다.

가장 큰 차이는 시간이다.

전이는 과거에서 지금으로 오는 거다. 내담자는 본질적으로 '시간 여행'을 한다. 내담자 머릿속은 과거로 돌아가 있고, 지금은 과거를 다시 사는 무대일 뿐이다.

병렬 왜곡은 지금에 머물러 있다. 내담자는 지금 이 순간 상담사와 만나고 있다. 문제는 내담자가 현재 경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다. 과거에 만든 색안경을 끼고 지금을 보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하면, 전이는 "지금 무대에서 옛날 연극을 다시 하는 것"이고, 병렬 왜곡은 "색안경을 끼고 지금을 보는 것"이다.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다.

상대의 진짜 모습도 다르게 다룬다.

전이에서 상담사는 본질적으로 스크린이다. 상담사의 진짜 성격이나 행동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프로이트가 상담사가 자기 색깔을 지우고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건 이 때문이다. 상담사는 백지라야 한다.

병렬 왜곡에서 상담사는 진짜 사람이다. 상담사의 실제 말과 행동이 중요하다. 내담자의 왜곡은 상담사의 실제 행동에서 시작된다. 상담사의 진짜 모습이 왜곡의 출발점인 셈이다.


시간 투자도 완전히 다르다.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에서 전이 분석은 전체 치료 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몇 달, 몇 년 동안 내담자가 상담사한테 느끼는 감정을 분석한다. 내담자가 과거를 풀어놓으면서 치유된다고 믿었다.

설리반은 달랐다.

"내담자가 상담자의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몇 시간이나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어떤 것을 '풀어놓는다'는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채프먼, 2018: 156)


설리반식 치료는 지금 여기 관계를 직접 다룬다. 과거를 풀어놓는 데 몇 달을 쓰지 않는다. 대신 지금 내담자가 어떤 패턴을 반복하는지 본다. 그 패턴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하고, 새로운 패턴을 경험하게 돕는다.

이게 설리반이 말하는 치유의 본질이다.


나오미 오사카를 진단한다면


나오미 오사카의 경우를 진단해보자.

전이 관점: 그녀는 새 코치를 통해 옛 코치를 다시 경험하고 있다. 과거 학대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다시 살려는 거다.

프로이트식 치료라면 이렇게 처방할 거다. "당신은 지금 과거를 풀어놓고 있어요. 새 코치한테 느끼는 이 공포는 사실 옛 코치한테 느낀 거예요. 몇 달 동안 이 감정을 탐색하면서,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병렬 왜곡 관점: 그녀는 새 코치의 실제 말("잘했어")을 과거 방식("넌 형편없어")으로 잘못 들었다. 지금 상황의 의미를 왜곡해서 본 거다.

설리반식 치료라면 이렇게 처방할 거다. "새 코치가 실제로 뭐라고 했나요? '잘했어'라고 했죠. 그런데 당신한테는 비난처럼 들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함께 살펴봅시다. 그리고 새 코치는 진짜로 당신을 칭찬하고 있다는 걸 경험해봅시다."


어느 게 맞는 개념일까


그런데 어느 게 '맞는' 개념일까?

질문이 잘못됐다. 답은 "둘 다 맞다"이다.

사람 마음은 복잡하다. 때로는 우리가 정말로 과거를 다시 산다(전이). 때로는 우리가 지금을 잘못 본다(병렬 왜곡).

그리고 많은 경우,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채프먼이 강조하듯, 이 두 접근은 완전히 다르다. 혼동하면 자신의 문제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위험하다.

결국, 두 개념 모두 같은 근본 질문을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을 온전히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진짜로 연결될 수 있을까?"


당신의 반복을 다시 보라


명확히 해두자.

당신이 반복하는 그 관계, 그 상처, 그 패턴. 그게 과거를 다시 사는 건지(전이), 지금을 잘못 보는 건지(병렬 왜곡)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구분하지 못하면? 평생 같은 전투를 반복한다.

당신은 왜 같은 유형의 사람한테 상처받는가?
당신은 왜 좋은 사람을 만나도 나쁜 사람으로 보는가?
당신은 왜 새로운 관계에서도 옛 상처를 느끼는가?

이 질문들의 답은 전이와 병렬 왜곡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를 풀어놓거나(전이), 색안경을 벗거나(병렬 왜곡). 둘 중 하나라도 해야 한다. 아니, 둘 다 해야 한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라. 귀 기울여보라.

오늘부터라도 내 반복을 다시 보라. 거기서부터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갇혀 산다. 어떤 이는 과거를 다시 살고, 어떤 이는 과거의 렌즈로 지금을 본다. 하지만 그 차이를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지금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참고문헌: A.H. 채프먼/ 김보연 역(2018). 해리 스택 설리반의 정신치료 기술. 하나의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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