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빼기는 누가 살빼기냐
여름날, 한 남자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미친 듯이 달린다.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산을 올라가며 땀을 흘린다.
다이어트? 천만에.
그가 정말 빼고 싶었던 건 체중이 아니다. 그가 지우고 싶었던 것은 '딕Dick'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영국인 사촌.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00년대 초 한 환자를 치료하며 발견한 사실이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 뚱뚱하니(뚱뚱하다는 독일어로 dick이다.)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프로이트, 2023: 44). 독일어로 '뚱뚱하다'는 뜻의 dick이 환자의 머릿속에서 Dick(이름)으로 바뀌었고, 질투와 살인 충동이 '살빼기'라는 자기 처벌로 방향을 틀었다.
라캉파 정신분석가 브루스 핑크는 이 현상의 구조를 명쾌하게 짚어낸다. 환자는 Dick을 제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대신 dick(뚱뚱함)을 제거한다. 하나의 단어가 다른 의미로 미끄러지면서, 금지된 욕망이 허용 가능한 행동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당신도 이런 적 있지 않나? 누군가에게 화가 났는데 그 사람한테 직접 화낼 수 없어서, 대신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
내가 아는 30대 직장인이 있다. 3개월 동안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했다. 하루 한 끼, 매일 2시간 운동. 건강해지고 싶다고 말했지만 진짜 이유는 달랐다. 직장 상사가 계속 "너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무시했던 것. 상사한테 직접 화낼 수 없으니까, 대신 자기 몸을 학대했다.
우리는 왜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하는가?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으려 하고, 지울 수 없는 사람을 지우려 하고, 표현할 수 없는 화를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프로이트는 이런 환자를 '쥐인간'이라고 불렀다. 쥐가 항문으로 파고드는 끔찍한 형벌을 상상하며 강박에 시달린 남자. 그의 증상은 이상했지만, 그 안에 숨은 욕망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게 바로 우리 안의 '쥐인간'이다.
A 중위인가, B 중위인가, 우체국 직원인가
쥐인간의 가장 유명한 증상이 있다. 안경 요금을 갚는 문제다.
환자는 군대 훈련 중 안경을 잃어버렸다. 새 안경이 우편으로 도착했는데, 한 장교가 A 중위가 요금을 냈으니 갚아라고 말했다. 그 순간 환자의 머릿속에서 강박이 시작됐다.
"A 중위에게 3.80크로네를 갚아야 한다. 만약 갚지 않으면, 사랑하는 여자와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중에 환자는 알게 됐다. A 중위는 돈을 낸 사람이 아니었다. 우체국 직원이 돈을 낸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A 중위에게 갚아야 한다"고 되뇌었다. 그러다가 또 "아니다, B 중위에게 갚아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프로이트가 물었다. "그러면 누구에게 갚을 거요?"
환자는 복잡한 계획을 내놓았다. "A 중위와 B 중위를 우체국으로 데리고 간다. A 중위가 우체국 아가씨에게 3.80크로네를 준다. 우체국 아가씨가 B 중위에게 준다. 그러면 자신이 A 중위에게 3.80크로네를 갚는다"(프로이트, 2023: 24-28).
말이 되나? 안 된다. 실행 불가능하다.
브루스 핑크는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환자는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가? 왜 우체국 아가씨한테 직접 갚지 않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가 정말 갚고 싶은 건 우체국 아가씨에게 진 빚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빚, 아들의 운명
환자의 아버지는 젊었을 때 도박으로 군대 자금을 써버렸다. "아버지는 가난한 여자를 좋아했으면서도 쥐인간의 엄마와 결혼함으로써 제대로 된 결혼을 했다"(핑크, 2021: 124). 동료가 대신 갚아줬던 군대 자금. 아버지는 평생 그 빚을 갚지 못했고, 죄책감 속에 살았다.
이제 환자가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 갚을 수 없다.
핑크는 이것을 주체의 분열이라고 설명한다. 환자는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찢어져 있다. 하나는 아버지의 빚을 갚고 싶은 욕망. 다른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
만약 빚을 갚으면?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 영원히 묶인다. 아버지가 못 한 일을 완수한 착한 아들로 남는다.
만약 빚을 갚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처럼 빚진 사람이 된다. 아버지의 죄를 반복하는 나쁜 아들이 된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쥐인간은 살면서 상당량의 직접적인 성적 쾌락을 포기해 왔으며, 단지 아주 소량의 쾌락에만 몰두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들과 결혼하지 못했고, 결국 죽은 아버지의 소망에 대해 대놓고 반항하지 못했다"(핑크, 2021: 125).
그래서 환자는 실행 불가능한 계획을 세운다. A 중위, B 중위, 우체국 아가씨를 헷갈리며 영원히 빚을 갚지도 못하고 갚지 않지도 못하는 상태로 남는다.
그게 강박증의 본질이다. 선택하지 않기 위한 선택. 결정하지 않기 위한 결정.
당신도 이런 적 있지 않나? 누군가에게 빚진 것 같은데,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갚아야 할 것 같은데, 뭘 갚아야 할지 모르는 것. 그래서 엉뚱한 사람한테 과하게 친절하거나, 필요 없는 선물을 사거나,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을 하는 것.
한 여성이 있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직접 화를 낼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밤마다 폭식했다. 떡볶이, 치킨, 피자. 1년 만에 15킬로그램이 쪘다.
"시어머니한테 화내는 대신, 제 몸을 망가뜨렸어요. 제가 아픈 걸 보면, 남편이라도 제 편을 들어줄까 싶었던 것 같아요."
시어머니한테 화낼 수도 없고, 안 낼 수도 없으니까. 대신 자기 몸을 공격한 것이다.
돌을 치우고, 다시 갖다 놓고
핑크가 주목한 또 다른 증상이 있다. 행한 것의 취소.
환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다닐 길에 있는 돌을 치웠다. "마차가 지나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면 어쩌나. 그녀가 다칠지도 몰라."
착한 남자 아닌가? 아니다.
돌을 치운 지 몇 시간 뒤, 그는 다시 그 길로 돌아가 돌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았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단순한 양가감정으로 봤다. 사랑과 증오가 공존한다고.
하지만 핑크는 더 깊이 파고든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돌을 치우는 순간, 환자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보호하고 싶다." 이것은 주체로서의 선택이고, 욕망의 표현이며, 존재의 선언이다.
그런데 강박증 환자는 바로 이 존재함을 견딜 수 없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 욕망하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무섭다. 왜? 욕망한다는 것은 책임진다는 것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는 자기가 한 행동을 취소한다. 돌을 다시 갖다 놓음으로써,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도 이런 적 있지 않나?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대했다가, 갑자기 차갑게 돌변하는 것. 도와주고 싶었지만 동시에 방해하고 싶은 것.
한 후배가 있었다. 대학원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복잡했다. 교수는 그에게 연구 주제를 주고 지도했지만, 동시에 그의 아이디어를 가로채 자기 논문에 썼다.
어느 날 후배는 교수에게 정성껏 연구 보고서를 작성해 보냈다. 밤새워 만든 자료였다. 그런데 이틀 뒤, 그는 교수 연구실에 가서 "죄송합니다, 자료에 오류가 있어서 다시 확인해야겠습니다"라며 보고서를 회수했다. 그리고 아예 새로운 주제로 바꿔버렸다.
도와준다는 것은 결정이다. "나는 이 사람을 돕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 순간 후배는 두려워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선택하면, 나는 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것이 무서워서, 행동을 취소한 것이다.
돌을 치우고 갖다 놓는 것과 뭐가 다른가? 같은 거다.
언어의 미끄러짐, 주체의 증발
핑크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강박증에서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통로다.
A 중위, B 중위, 우체국 아가씨. 환자는 계속해서 이름을 바꾼다. 갚아야 할 대상을 바꾼다. 왜?
핑크는 이것을 라캉의 기표와 기의로 설명한다. 기표는 말의 겉껍데기다. 소리, 글자, 이름. 기의는 말의 속이다. 의미, 내용, 진짜 가리키는 것.
예를 들어보자. '개'라는 말을 했을 때, '개'라는 글자나 소리가 기표다. 그런데 그 말이 가리키는 진짜 의미—네 발 달린 동물, 충성스러운 친구, 짖는 소리—이것이 기의다.
정상적인 대화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붙어 있다. '개'라고 하면 개를 떠올린다. 단순하다.
그런데 강박증 환자는 다르다. 기표를 계속 바꾸면서 기의에서 도망친다.
환자는 'A 중위'라고 말한다. 하지만 A 중위가 가리키는 진짜 의미는 '아버지'다. '아버지'라는 말은 너무 무겁다. 너무 직접적이다. 그래서 환자는 기표를 바꾼다. 'A 중위'를 'B 중위'로, 'B 중위'를 '우체국 아가씨'로.
겉껍데기(기표)를 계속 바꾸는 동안, 진짜 의미(기의)는 영원히 숨는다.
"나는 누구에게 갚아야 하는가?"—이 질문의 진짜 답은 '아버지'다. 하지만 환자는 그 답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이름을 꺼내놓는다. A 중위, B 중위, 우체국 아가씨...
이것을 라캉은 기표의 연쇄라고 불렀다.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이어지고, 그것이 또 다른 기표로 이어진다. 이 사슬 속에서 진짜 의미(기의)는 영원히 지연된다.
마치 끝없는 릴레이 같은 거다. A가 B에게 바통을 넘기고, B가 C에게 넘기고, C가 D에게 넘긴다. 그런데 결승선은 없다. 계속 달리기만 할 뿐, 도착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기표를 미끄러뜨리는 동안, 환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미끄러진다. "나는 누구에게 갚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지 않기 위해, 환자는 계속해서 이름을 바꾸고 계획을 바꾸고 행동을 취소한다.
그게 강박증의 본질이다.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욕망하는 자로서 책임지지 않기.
당신이 하는 말, 정말 당신의 말인가
한국어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하나의 소리가 여러 뜻을 가질 때, 무의식은 그 틈을 이용한다.
'배'를 생각해 보자. 배(ship), 배(belly), 배(pear). 모두 같은 발음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다.
"배가 아프다"는 말. 주변에서 자주 듣는다. 표면적으로는 소화불량. 하지만 실제로는? 질투심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 직장인이 있었다. 회사 동기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주일 동안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병원에 갔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중에야 그는 깨달았다. 진짜 배가 아팠던 것은 맞지만, 병은 아니었다. 동기가 성공하는 것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바로 이거다.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밤'도 그렇다. 밤(night)과 밤(chestnut). 꿈에서 누군가 밤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면? 그것은 정말 밤을 먹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지만, 밤(night)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암시할 수도 있다.
'눈'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눈(eye)과 눈(snow). "눈이 부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햇빛 때문일 수도, 눈(snow)의 반사 때문일 수도, 아름다운 사람을 봐서일 수도 있다.
우리말은 교묘하다. 무의식이 숨어들기 딱 좋은 구조다. 핑크가 말한 기표의 미끄러짐이 한국어에서는 더 쉽게 일어난다.
기도가 저주로, 방어가 욕망으로
환자는 나쁜 생각을 막기 위해 기도문의 첫 글자를 따서 주문을 만들었다. 끝에 '아멘amen'을 붙였다. 신성한 기도 아닌가.
천만에.
프로이트가 그 주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환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 철자를 재배열한 것이었다. 특히 여자 이름에 있는 's'를 amen 바로 앞에 놓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의 '정액Samen'을 사랑하는 여자와 접촉하도록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상상 속에서 그는 그 여자와 수음을 한 것이다"(프로이트, 2023: 81).
amen(아멘)과 Samen(정액)의 음성적 유사성. 신성한 기도가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탈바꿈한다.
핑크는 여기서 강박증의 핵심을 본다. 방어 자체가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 환자는 나쁜 생각을 막으려고 기도한다. 하지만 그 기도 속에 나쁜 생각이 숨어 있다. 지우려는 것이 지우려는 방법 안으로 들어온다.
무의식은 교묘하다. 우리가 억압하는 것은 억압하는 행위 속으로 돌아온다.
우리말에도 이런 역설이 있다. '조심'이라는 말. 조심(操心)은 본래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심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오히려 불안을 전염시킨다. 조심하라는 말 자체가 위험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격려'도 그렇다. "힘내!"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가 지금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다.
위로가 상처를 확인하는 행위가 되고, 기도가 저주가 되고, 방어가 공격이 된다.
우리 안의 쥐인간
당신도 조금씩 쥐인간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다이어트를 하며 자기 자신을 처벌한다.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화가 났지만, 그 화를 표현할 수 없어서.
누군가는 강박적으로 청소를 한다. 표면적으로는 깨끗함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씻어낼 수 없는 죄책감과 싸우는 것.
누군가는 일 중독에 시달린다. 성공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멈추는 순간 마주쳐야 할 공허함을 회피하는 것.
핑크는 말한다. 강박증 환자는 존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고.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고. 욕망하지만 욕망하지 않는 척한다고.
왜?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욕망한다는 것이 너무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선택한다는 것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환자에게 말했다. "감정은 정당하다고. 죄책감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고. 다만 그 죄책감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가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라고"(프로이트, 2023: 31).
그게 핵심이다.
당신이 느끼는 불안, 죄책감, 강박은 이유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진짜 이유가 무의식 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그 이유를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말을 들어보라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이 새어 나오는 틈이고, 욕망이 변장하는 가면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조차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dick이 Dick으로, A 중위가 B 중위로, 돌 치우기가 돌 갖다 놓기로, 기도가 저주로 바뀌듯이. 그것이 언어의 무의식이고,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쥐인간의 목소리다.
그러니 당신의 말을 들어보라.
"살을 빼야 해"라고 말할 때, 정말 살을 빼고 싶은 건가? 아니면 누군가를 지우고 싶은 건가?
"배가 아파"라고 말할 때, 정말 배가 아픈 건가? 아니면 누군가의 성공이 괴로운 건가?
"조심해"라고 말할 때, 정말 안전을 바라는 건가? 아니면 불안을 나누고 싶은 건가?
"갚아야 해"라고 말할 때, 정말 그 사람에게 갚고 싶은 건가? 아니면 갚을 수 없는 다른 누군가에게 갚고 싶은 건가?
당신이 하는 말 속에 당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숨어 있다.
당신의 강박 뒤에 숨은 욕망을 찾는 세 가지 질문:
내가 지금 피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언어의 미끄러짐을 멈춰라)
내가 지금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는가? (행동의 취소를 멈춰라)
내가 지금 갚으려고 하는 빚은 정말 내 빚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빚을 대신 지려는 건가?)
이 질문들에 답하다 보면, 당신은 당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하는 말이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강박이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지금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어. 너는 지금 선택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 너는 지금 존재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
그 목소리를 들어라. 그것이 쥐인간의 목소리고, 동시에 당신의 목소리다.
참고문헌
프로이트, 지그문트(2023). 『쥐인간: 강박신경증의 한 사례에 대한 고찰』. 열린책들.
핑크, 브루스/ 맹정현 옮김(2021).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