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가 전화를 걸어왔다.
"다른 유명한 철학관에 예약을 했는데요, 먼저 선생님께 간단하게 상담 받고 싶어서요."
이상했다. 이미 예약한 곳이 있는데 왜 또 전화를 하지?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사를 하려고 하는데요, 방향하고 택일 좀 봐주세요."
아, 이사 상담. 나는 F의 사주를 보고 이사 방향과 좋은 날짜를 꼼꼼히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친구랑 말싸움을 했어요."
뜬금없었다. F는 갑자기 친구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가 자신을 모함했단다. 억울하단다. 오랫동안 지낸 우정인데 정리해야 했단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 사람, 왜 이사 상담하러 전화했으면서 친구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런데 F는 멈추지 않았다. 친구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엔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남자친구 궁합 좀 봐주세요."
F는 현재 나이차가 큰 남자와 함께 산단다. 혼인 신고는 안 했단다. 20살 때 그 남자가 자신을 "걷어주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놓아두고" 독립하고 싶은데 마음이 아프단다.
"그런데 당장은 나올 수 없는 형편이에요."
왜 나올 수 없냐고 물으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F는 이렇게 말했다.
"자영업을 하는 남자가 있는데요, 그 남자랑 궁합 좀 봐주세요. 같이 살 수 있을지."
나는 거절했다. 궁합을 볼 필요가 없다고.
전화를 끊고 나서 이상했다. 이사 상담을 하러 전화했다던 사람이 친구 이야기, 현재 남자 이야기, 새로운 남자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체 뭘 물으러 온 걸까?
그때는 몰랐다. 정신분석을 배우기 전이라.
정신분석을 배우고 난 후, 나는 F의 전화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알았다.
F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프로이트가 쥐인간의 "쥐(Ratten)" 강박증을 한 단어씩 해체했듯이, F의 첫 문장을 해체해보자.
"다른 유명한 철학관에 예약을 했는데요, 먼저 선생님께 간단하게 상담 받고 싶어서요."
"다른" - 이미 하나가 있다는 뜻이다.
"유명한" -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찾고 있다는 뜻이다.
"예약을 했는데요" - 이미 정해진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먼저" - 순서가 있다는 뜻이다. 본격적인 건 나중이고, 이건 가벼운 확인이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 부담 없이. 책임지지 않고. 알아만 보겠다는 뜻이다.
이제 이 문장을 번역해보자.
"나는 이미 한 남자와 살고 있어요(예약한 철학관 = 나이차 큰 동거남). 그런데 더 나은 남자가 생겼어요(유명한 다른 곳 = 자영업 남자). 정식으로 그에게 가기 전에(나중 예약), 먼저 확인하고 싶어요. 가볍게, 부담 없이."
F는 몰랐을 거다. 자기가 뭘 말하는지. 그러나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자신의 상황을 첫 문장에 다 담았던 거다.
무의식은 거짓말을 못한다. 예외가 없다.
친구 이야기는 뭐였을까?
F가 진짜 정리해야 하는 건 친구가 아니었다. 나이차 큰 동거남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함께 산 남자를 떠나려고 해요"라고 말하긴 너무 무거웠던 거다. 너무 죄책감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F의 마음은 이걸 친구로 옮겼다.
"나는 오래된 관계를 정리했어요. 상대가 나를 배신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리허설이었던 거다. F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안전한 대상(친구)으로 먼저 연습한 거다.
이걸 정신분석에서는 '전치(displacement)'라고 부른다. 진짜 문제는 너무 뜨겁다. 만질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은 그걸 다른 곳으로 옮긴다. 덜 위협적인 곳으로. 덜 죄책감 드는 곳으로.
더 재밌는 게 있다. F는 친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배신하려는 사람은 F 자신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산 남자를 두고 새로운 남자에게 가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F는 자신을 배신자로 느끼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무의식이 이걸 뒤집었다. "내가 배신하는 사람"을 "나는 배신당하는 사람"으로.
이걸 '투사(projection)'라고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걸
남한테 던져버리는 거다.
"경제적 형편 때문에 당장은 나올 수 없어요"는 뭘까?
이것도 전치다. 30대 중후반의 성인이 "나는 혼자 살 수 없어요. 누군가 나를 걷어주지 않으면 못 살아요"라고 말하는 건 수치스럽다.
그래서 F는 말한다. "경제적 형편이 안 돼서요."
심리적 불가능성을 경제적 불가능성으로 옮긴 거다.
F의 진짜 문제는 돈이 아니다. "혼자 설 수 없다"는 믿음이다. 20살 때 그 남자가 자신을 "걷어주었다"는 표현을 들어봐라. 여기에 모든 게 담겨 있다. F는 스스로 서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단 한 번도.
이제 전체 그림이 보인다.
F는 전화 통화 내내 같은 이야기를 네 번 반복했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점점 더 진실에 가까이.
첫 번째 - 철학관 이야기:
"이미 예약한 곳이 있는데 다른 유명한 곳도 알아보고 싶어요"
= 이미 남자가 있는데 더 나은 남자가 생겼어요
두 번째 - 친구 이야기:
"오래된 우정을 정리했어요. 친구가 나를 배신했으니까요"
= 오래된 관계를 끝내고 싶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세 번째 - 동거남 이야기:
"오랫동안 함께 살았지만 독립하고 싶어요. 그런데 나갈 수 없어요"
= 떠나고 싶지만 무서워요
네 번째 - 새 남자 이야기:
"자영업 남자와 궁합을 봐주세요"
= 제가 이 남자로 갈아타도 괜찮은지 허락해주세요
네 번의 이야기. 하나의 진실.
그리고 이 모든 게 첫 문장에 이미 암호화되어 있었다.
F가 진짜 묻고 싶었던 건 이거다.
"제가 이 남자를 버리고 저 남자로 갈아타도 괜찮나요?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저를 허락해주세요."
그런데 이걸 직접 말하는 건 너무 무서웠던 거다. 그래서 F는 철학관 이야기로, 친구 이야기로, 경제적 형편 이야기로 에둘러 말했다.
무의식은 정직하다. 그러나 비겁하기도 하다.
그 후로 비슷한 사람들이 계속 왔다.
직업 상담을 하러 와서 엄마 이야기를 하는 사람. 건강 문제를 물으러 와서 상사 이야기를 하는 사람. 결혼 운을 보러 와서 친구의 배신 이야기를 하는 사람.
정신분석을 배우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정작 물어야 할 건 안 묻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지.
이제 나는 안다. 그들은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정확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프로이트는 말했다. "환자는 자신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 말하고 있다."
항상 그렇다.
이 책은 당신에게 정신분석의 눈을 선물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해체하는 법. 그 말 속에 숨겨진 무의식을 읽어내는 법.
"다른 철학관에 예약했는데 또 전화했어요"라는 한 문장에서 그 사람의 전체 삶을 읽어내는 법. "친구가 나를 배신했어요"라는 말에서 진짜 배신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법. "경제적 형편"이라는 말 뒤에 숨은 심리적 불가능성을 발견하는 법.
프로이트가 쥐인간의 강박증을 한 단어씩 해체했듯이, 우리도 일상의 언어를 해체할 수 있다.
이건 어렵지 않다. 단지 귀 기울이는 방식의 문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은 다르게 듣게 될 거다.
당신 친구가 "요즘 너무 바빠서"라고 할 때,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당신 가족이 "너를 위해서"라고 할 때, 그 말에 숨겨진 진짜 욕망을.
당신 자신이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라고 할 때, 그 말이 회피하는 진짜 두려움을.
무의식은 거짓말을 못한다. 그냥 우회할 뿐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 우회로를 읽을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가 들린다. 당신 자신의 진짜 이야기도.
그때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자기 이름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게 된다. 왜 그 사람한테 화가 나는지, 왜 그 선택을 못 하는지, 왜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지. 이제 알게 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알면 달라진다. 알면 선택할 수 있다. 이 책은 당신을 아는 법을 알려준다. 정신분석이라는 가장 정직한 도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