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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애도

by 홍종민

자주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헤어진 연인, 떠난 부모, 잃어버린 것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힐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상한 건,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자리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새벽에 혼자 울고, 문득문득 그 사람 생각에 하루를 날리고, "이제 그만"이라고 다짐하면서도 똑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이 약이에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세요." "이제 잊어야죠." 그런데 그게 안 된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생각난다. 마치 발목을 붙잡는 손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묶어둔다. 바로 이거다. 상실은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적극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에너지는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먼저 이해해야 할 게 있다. 사랑한다는 건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건 에너지의 투자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생각하고, 걱정하고, 기뻐하고, 화내는 데 드는 모든 에너지 말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리비도'라고 부른다. 어렵게 들리지만 쉽게 말하면 마음의 휘발유다.

한 50대 남자가 상담실을 찾았다. 회사를 20년 다녔는데 구조조정으로 퇴사했다고 했다. 퇴사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매일 아침 7시면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고 했다. 출근 시간이다. 옷을 입다가 멈칫한다. '아, 갈 곳이 없구나.'

"머리로는 알아요. 회사가 이제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그런데 가슴이 모르는 것 같아요."

정확한 표현이다. 머리는 현실을 알지만 마음은 모른다. 그가 20년간 회사에 투자한 심리적 에너지는 여전히 거기 묶여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힘이 없다. 왜 없을까. 이미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없어진 회사에.

휘발유 없는 자동차는 1밀리미터도 움직일 수 없다. 마찬가지다. 심리적 에너지가 과거에 묶여 있으면 현재를 살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에너지가 자동으로 돌아올 거라고. 절대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미 100년 전에 이 문제를 파헤쳤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거기 투자된 에너지는 저절로 회수되지 않는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다. 그 대상을 놓아주지 않는다. 맹정현은 이 메커니즘을 명료하게 정리한다. "대상에 리비도가 투자되면서 조금씩 리비도가 그 대상으로부터 일탈하게 된다"(맹정현, 2015: 49).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이지만 답은 이거다. 기억하라. 잊으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기억하라. 그 대상을 계속 떠올리고, 이야기하고, 느끼다 보면 투자된 에너지가 조금씩 고갈된다. 바닥이 난다. 마치 계좌에서 돈을 조금씩 인출하듯, 그렇게 에너지를 회수하는 것이다.

그 남자에게 나는 계속 회사 이야기를 하게 했다. 첫 출근 날, 승진했을 때, 동료들과의 추억, 힘들었던 프로젝트, 마지막 날의 기억까지. 처음엔 울었다. 분노했다. 그리운 마음과 배신감이 뒤섞였다. 하지만 6개월쯤 지나자 그가 말했다.

"이제 더 할 얘기가 없네요. 다 한 것 같아요."

바로 그 순간이다. 에너지가 바닥난 순간. 그때부터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게 진짜 애도다. 망각이 아니라 완전한 기억. 기억을 통한 소진. 그래야 자유로워진다.


공격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길로 간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한 30대 여성이 있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1년째 집에만 있다고 했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도 나가지 않는다.

"제가 너무 못생겨서요. 제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요. 제가 더 예뻤으면, 제가 더 똑똑했으면 안 헤어졌을 거예요."

나는 말했다. "헤어지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나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답했다. "아니에요. 저는 정말 특별히 못난 사람이에요. 선생님이 모르시는 거예요."


그 순간 알았다. 이건 일반적인 슬픔이 아니다. 자기공격이다. 떠난 건 상대방인데 왜 자기 자신을 때릴까. 여기엔 묘한 메커니즘이 있다. 맹정현은 이를 정확히 짚어낸다. "멜랑꼴리 환자의 자아는 너무도 비약하다. 이들에게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이라는 관점이 있다"(맹정현, 2015: 35).

'제일'이라는 말을 보라. 이게 얼마나 비대한 생각인가. 과대망상증 환자가 "내가 최고로 잘났다"며 자아를 부풀리듯, 이 사람은 "내가 최고로 못났다"며 자아를 부풀린다. 방향은 정반대지만 구조는 같다. 제일이어야 한다.

동네 카페에서 본 한 청년이 생각난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있는데 화면만 들여다본다. 알고 보니 취업 준비생이었다.

"자소서를 써야 하는데 한 줄도 못 쓰겠어요. 제가 뭐라고 회사에 지원을 해요. 저 같은 사람을 누가 뽑겠어요."


그는 낙방의 상처를 애도하지 못했다. 대신 자기 자신을 끝없이 비난하고 있었다. 그 비난에 모든 에너지가 쏟아진다. 새로운 시도를 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자기공격에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무서운 이유가 뭔지 아는가. 보통의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 하지만 자기공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진다.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처음엔 "내가 부족했어"로 시작하지만, 나중엔 "나는 존재 자체가 잘못됐어"까지 간다. 거기까지 가면 생존이 위험해진다.

겉으로는 자아가 쪼그라들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쪼그라든 자아에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다. 내용은 비참하지만 구조는 비대하다. 자기비난이라는 거대한 작업에 모든 리비도가 투자되어 버린다. 새로운 사람을, 새로운 일을 사랑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기억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대상은 이제 없다. 돌아오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어" "돌아올지도 몰라" 같은 환상을 버려라. 이게 첫 번째 관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막힌다.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진짜 슬픔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상 속에 머문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는 애도가 시작되지 않는다.

둘째, 적극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잊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과의 모든 순간을.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사랑했던 순간도 미웠던 순간도 전부. 기억하고 또 기억하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라.

왜 그래야 할까. 투자된 에너지를 회수하려면 그 대상을 적극적으로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택배 배달원이 물건을 회수하러 가듯, 기억을 통해 에너지를 하나씩 가져와야 한다. 고통스럽다. 기억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울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다.

그래도 해야 한다. 이것은 애도 작업이다. 힘든 노동이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노동이다. 하지만 이 노동을 거치지 않으면 자유로워질 수 없다. 에너지는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서 가져와야 한다. 하나하나 챙겨와야 한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사람마다 다르다. 6개월이 걸릴 수도, 2년이 걸릴 수도, 5년이 걸릴 수도 있다. 투자한 에너지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20년 다닌 회사와 3개월 사귄 연인은 다르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 조급함은 오히려 애도를 방해한다.

앞서 말한 그 50대 남자는 6개월이 걸렸다. 회사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서 에너지를 조금씩 회수했다. 그 30대 여성은 아직 진행 중이다. 자기비난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게 먼저다. 잃어버린 연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쏟아붓는 에너지를 회수해야 한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셋째, 자기공격을 멈춰야 한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못나서"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멈추고 물어야 한다. 이게 사실인가. 정말 내 잘못인가. 대부분의 경우 답은 '아니다'다. 상실은 일어난다. 사람은 떠난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한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냥 일어난 일이다.


맹정현은 애도 작업의 끝을 이렇게 표현한다. "애도 작업이 완결되면, 자아는 다시 자유롭게 되고 억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맹정현, 2015: 50). 그때까지는 기억하고 슬퍼하고 울어야 한다. 그게 애도다. 그게 대상을 진짜로 떠나보내는 방법이다.

당신도 지금 누군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가. 여전히 그 사람 생각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가. 그렇다면 회피하지 말라. "잊어야지"라고 다짐하지 말라. 오히려 기억하라. 정면으로 마주하라. 그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라.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기억하고 또 기억하라. 그래야 당신의 에너지가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을, 새로운 일을, 새로운 삶을 사랑할 수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 애도하지 않으면 자기공격으로 간다. 그게 현실이다.


맹정현(2015).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 서울: 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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