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청취자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DJ님, 저한테 어릴 때 기억이 하나 있어요. 다섯 살쯤 됐을 때 엄마가 동생만 안아주고 저는 안 안아줬던 기억이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선명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연애할 때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중요하구나’ 싶으면 먼저 이별을 통보하더라고요. 이게 관련이 있을까요?”
그 순간 DJ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어린 시절 한 장면이 정말 지금의 패턴을 만드는 걸까? 아서 클라크는 “우연한 기억은 없다. 한 개인이 만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상 중에서, 자신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느끼는 것들만을 기억하기로 선택한다”(클라크, 2018: 43)라고 했다. 평생을 좌우하는 가치관이 다섯 살 때 본 엄마의 표정 하나, 아빠가 던진 말 한마디에서 형성된다는 거다. 바로 이거다. 초기 기억은 그냥 추억이 아니라 ‘나의 인생 각본’이다.
기억은 선택이다: 아들러가 발견한 것
알프레드 아들러는 초기 기억을 혁명적으로 재해석한 최초의 학자였다. 프로이트가 초기 기억을 억압된 트라우마의 은폐로 봤다면, 아들러는 정반대였다. "중요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기억은 없다"(클라크, 2018: 42).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장면 자체가 이미 '선택된 메시지'라고 봤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다섯 살 때 "유아용 침대에 누워 있었고, 더럽고 젖은 채로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와서 저에게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클라크, 2018: 36)라는 기억을 떠올린다. 반면 다른 사람은 "가족과 함께 해변에 있었고... 아기인 남동생을 안고 싶었고... 저는 그를 잠시 안아 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클라크, 2018: 49)를 기억한다.
수천 개의 장면 중 왜 하필 그 기억일까? 아들러의 답은 명쾌하다. 그 기억이 "자신에게 경고하거나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자신의 목표에 집중하게 하려고...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자신에게 반복하는 이야기"(클라크, 2018: 43)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람은 평생 "세상은 나를 방치한다"는 가치관으로 살고, 두 번째 사람은 "나는 사랑받고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산다. 예외가 없다. 일종의 법칙이다.
팝스타 레이디 가가의 경우를 보자. 고기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서고, MTV 시상식에서 피를 흘리는 퍼포먼스를 하는 그 가수 말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다섯 살 때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어요. 엄마가 '넌 특별해'라고 말했죠. 근데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했어요. 아무도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 기억이 그녀의 생활양식을 만들었다. "나는 특별하다(자기 신념) + 세상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타인 신념) = 그러므로 내가 증명해야 한다(행동 패턴)." 그래서 그녀는 극단적 퍼포먼스로, 기괴한 패션으로, 끊임없이 "나를 봐달라"고 외친다. 초기 기억이 평생의 무대를 결정한 셈이다.
마이클 잭슨도 비슷했다. "아버지가 리허설 중에 내 춤을 보고 있었어요. 실수하자 아버지 눈빛이... 무서웠어요." 이 한 장면이 그의 완벽주의를 만들었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 타인은 나를 심판한다 + 그러므로 실수는 생존의 위협이다." 그래서 그는 문워크를 수천 번 연습했고, 성형을 반복했고, 결국 무대 위에서만 숨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들러가 말한 "생활양식"—자기, 타인, 세상에 대한 핵심 신념—이 한 장면에서 완성된 것이다.
프로이트의 전이: 기억 속 감정이 현재로 흘러든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다. 그는 초기 기억을 "골치 아프고 성적으로 충만한 갈등과 흔희 관련이 있고, 이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클라크, 2018: 42). 표면 기억은 가짜고, 진짜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트라우마라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자유연상"을 사용했다. 환자가 떠오르는 대로 말하면, 억압된 기억의 조각들이 드러난다고 믿었다.
더 중요한 건 **전이(transference)**다. 환자가 치료자에게 느끼는 감정—사랑, 분노, 의존—은 실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느낀 감정의 재연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치료자에게 "당신은 날 이해 못 해"라고 화를 낸다면, 그건 치료자 때문이 아니라 어릴 적 엄마에게 느낀 좌절이 '전이'된 것이다. 기억 속 감정이 현재 관계로 흘러드는 현상. 프로이트는 이걸 치료의 핵심으로 봤다.
할리우드 배우 브래들리 쿠퍼(영화 '행오버', '어 스타 이즈 본' 주연)를 보자. 그는 알코올 중독을 겪었는데, 치료 과정에서 깨달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화내던 모습... 난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결국 똑같이 술을 마셨어요." 프로이트가 말한 "반복 강박"이다. 싫어하던 부모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재연한다. 왜? 그 감정—공포, 분노, 외로움—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퍼는 치료에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직면해야 했다. 치료자에게 느낀 답답함이 실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전이였던 것이다.
아들러 vs 프로이트: 미래 vs 과거
자, 두 사람의 차이가 보이는가? 아들러는 "기억은 미래를 위한 지도"라고 봤다. 레이디 가가의 "엄마가 '넌 특별해'라고 한" 기억은 억압된 게 아니라, 그녀가 "나는 증명해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 위해 선택한 기억이다. 반면 프로이트는 "기억은 과거 트라우마의 흔적"이라고 봤다. 브래들리 쿠퍼의 알코올 중독은 어린 시절 억압된 감정이 현재 행동에 전이된 것이다.
둘 다 맞다. 그런데 뭐가 더 유용할까? 상황에 따라 다르다. 팝가수 셀레나 고메즈(디즈니 채널 출신, '위자즈 오브 웨이벌리 플레이스' 주연)를 보자. 그녀는 어릴 적 "엄마가 세 가지 일을 하며 나를 키웠어요. 가난했지만 엄마는 웃었어요"라는 기억을 자주 언급한다. 아들러식으로 보면, 이 기억은 "나는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활양식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루푸스 진단 후에도 무대로 돌아왔다. 기억이 그녀에게 "힘"을 준 것이다.
하지만 같은 고메즈가 연애 관계에서 반복된 이별-재결합 패턴을 보였다. 프로이트식으로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부모 이혼)에 대한 억압된 분노와 외로움이 연인에게 전이됐다. "떠날까봐 불안 → 집착 → 질식 → 이별 → 외로움 → 다시 만남"의 반복. 과거 감정이 현재 관계에 계속 흘러든 것이다. 이 경우엔 프로이트 방식—전이를 인식하고, 억압된 감정을 직면—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일까. 두 접근은 경쟁자가 아니라 보완재다. 아들러는 "당신의 기억이 어떤 미래를 만들고 있나?"를 묻고, 프로이트는 "당신의 과거 감정이 지금 누구에게 전이되고 있나?"를 묻는다. 레이디 가가처럼 기억을 동력으로 쓸 수 있다면 아들러가 답이다. 셀레나 고메즈처럼 기억이 올가미가 됐다면 프로이트가 필요하다.
당신의 기억은 무엇을 말하는가
확실한 건 이거다. 초기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레이디 가가의 피아노 앞 장면, 마이클 잭슨의 아버지 눈빛, 브래들리 쿠퍼의 술 취한 아버지, 셀레나 고메즈의 웃는 엄마. 그 기억들이 지금도 그들의 무대, 사랑, 중독, 회복을 결정하고 있다.
3단계 자가진단:
1단계: 당신의 첫 기억을 떠올려보라
5살 이전, 가장 선명한 장면 하나
누가 있었나?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감정이었나?
2단계: 그 기억의 메시지를 명명하라
아들러 방식: "그 장면이 내게 '나는 ___하다, 세상은 ___하다, 그러므로 나는 ___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프로이트 방식: "그 장면 속 감정(분노, 외로움, 두려움)이 지금 누구에게 반복되고 있나?"
3단계: 10초간 느껴보라
그 기억 속 감정을 지금 10초간 가슴으로 느껴보라
정확히 10초. 숫자로 센다
그게 당신의 '각본'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레이디 가가는 "엄마의 '넌 특별해'"를 선택했고, 브래들리 쿠퍼는 "아버지의 분노"를 억압했다. 둘 다 맞는 선택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기억이 지금도 당신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들러든 프로이트든, 기억을 인식하는 순간 당신은 선택권을 되찾는다. 반복할 건지, 바꿀 건지. 당신의 첫 기억을 오늘 한 번 떠올려보라. 그 장면이 당신에게 뭐라고 속삭이는지 귀 기울여보라.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된다.
참고문헌: 아서 클라크/ 박예진, 김영진 공역. 초기 회상의 의미와 해석. 서울 : 학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