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이별을 했다. 3년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담담했다. "괜찮아, 서로 안 맞았던 것 같아." 그런데 며칠 후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의 모습은 달랐다. 커피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요즘 이상해. 그 사람 생각이 자꾸 나는데,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런데 또 내가 화내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안에서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나는 그녀와 똑같은 허전함—마치 내가 누군가를 잃은 것 같은 먹먹함. 다른 하나는 그녀를 위로해야 한다는 강한 충동—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압박감.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친구들과 커피 마실 때는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 두 감정이 서로 다른 곳에서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은 그녀의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고, 다른 한쪽은 그녀를 구해내야 한다는 역할을 떠맡는 것 같았다.
평소엔 안 그랬다. 친구를 만나도, 지인과 대화해도 이런 강렬한 감정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녀의 깊은 상실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내 안의 뭔가를 건드린 것이다. 바로 이게 과거의 관계 패턴이 현재로 침투해 들어오는 순간이다.
대상관계이론의 핵심은 간단하다. 우리는 어릴 적 엄마와의 관계를 두 가지 버전으로 저장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 표상'—그때 내가 느꼈던 나 자신의 모습. 다른 하나는 '대상 표상'—그때 내가 경험했던 엄마의 모습.
예를 들어보자. 엄마가 나를 야단쳤던 순간. 그 순간 나는 '잘못한 아이'였고, 엄마는 '화난 어른'이었다. 이 두 이미지가 하나의 세트로 내 무의식에 저장된다. "아동이 내면화하는 것은 초기 양육자의 이미지나 표상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경험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내면화된다"(장정은, 2021: 134). 관계 자체가 통째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바로 이거다. 엄마가 화낸 그 장면이 내 안에 저장될 때, 두 개가 세트로 들어온다. '잘못한 나'와 '화난 엄마'. 이 둘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항상 함께 움직인다. 엄마가 슬퍼했던 장면도 마찬가지다. '위로하는 나'와 '슬픈 엄마'가 세트로 저장된다.
이 저장된 관계 패턴은 평소엔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일상적 대화, 가벼운 만남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 조건이 갖춰지면 깨어난다. 깊은 슬픔, 강한 분노, 극심한 불안. 이런 강렬한 감정 상황에서 과거의 패턴이 현재로 침투한다.
내가 친구를 만났을 때 일어난 일도 바로 이거였다. 그녀의 이별이라는 깊은 상실감이 내 안의 오래된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을 깨운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평소엔 절대 느끼지 않던 감정들이 올라왔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내 안에 저장된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이 현재 관계에서 다시 작동하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일치적 동일시. 다른 하나는 상보적 동일시.
일치적 동일시는 상대방의 '자기 표상'을 내가 느끼는 것이다. 친구가 경험하는 '버려진 사람'의 감정을 내가 그대로 느낀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를 잃은 것 같은 먹먹함, 가슴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을 느꼈다. 이건 내 상실감이 아니다. 그녀의 자기 표상이 내 안에서 작동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친구의 내면에는 '버려진 사람'이라는 자기 표상이 있다. 애인과 헤어진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을 '버려진 사람'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그 '버려진 사람'을 느낀 것이다. 마치 내가 버려진 것처럼. 이게 일치적 동일시다. 상대방의 자기 표상에 내가 일치해버리는 것.
상보적 동일시는 상대방의 '대상 표상'을 내가 떠맡는 것이다. 친구의 내면에는 '위로해주는 엄마'라는 대상 표상이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그 역할로 만들려 했다. 그래서 나는 자동으로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약이야" 같은 말을 하려고 했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니다. 그녀의 대상 표상이 나를 그 자리로 밀어넣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친구의 내면에는 '버려진 사람(자기)'과 '떠난 애인(대상)'이라는 세트가 저장되어 있다. 이 세트가 현재 우리 관계에서 작동할 때,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하다. 하나는 내가 '버려진 사람'을 느끼는 것(일치적). 다른 하나는 내가 '위로하는 엄마' 역할을 하는 것(상보적). 그날 카페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했다.
이게 바로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평소엔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깊은 감정 상황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두 가지 방식으로 상대방을 끌어당긴다. 일치적 동일시로 상대방이 나의 감정을 느끼게 만들거나, 상보적 동일시로 상대방을 특정 역할로 밀어넣거나.
정신분석가 스타터가 소개한 폴이라는 변호사의 사례를 보자. "그의 아버지는 엄하고 비판적이었고, 폴이 한 행동에 대해 결코 만족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폴이 어느 날 방청소를 했다면, 그것은 어제 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폴이 A학점을 받아오면 A플러스를 받았어야만 했다"(Stadter, 2006: 57).
폴의 내면에 저장된 것은 뭘까? '부족한 아들(자기 표상)'과 '실망한 아버지(대상 표상)'. 이 세트가 폴 안에 들어있다. 평소엔 조용하다. 하지만 특정 상황—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을 때, 평가받는 상황에 처할 때—이 세트가 깨어난다.
폴의 치료자는 폴과의 관계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일치적 동일시로 자신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어주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평소 다른 환자들과 작업할 때는 이런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폴 앞에서는 달랐다. 폴의 '부족한 자기 표상'을 치료자가 느낀 것이다. 이게 일치적 동일시다.
동시에 치료자는 상보적 동일시도 경험했다. 폴에게 실망감을 느꼈고, 그가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갈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평소 치료자는 이렇게 판단적이지 않다. 하지만 폴의 '실망한 아버지' 대상 표상이 치료자를 그 역할로 밀어넣었다. 이게 상보적 동일시다.
정리하면 이렇다. 폴의 내면에는 '부족한 나'와 '실망한 아버지'라는 세트가 있다. 이 세트가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작동할 때, 치료자는 두 가지를 느낀다. '나도 부족하다'(일치적)와 '폴이 실망스럽다'(상보적). 두 가지가 동시에 올라온다.
더 놀라운 건, 폴과 함께 일한 후배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녀는 다른 동료들과 일할 때는 우수했고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폴과 일할 때만 이상하게 무능해졌다. "그녀는 사임 인터뷰에서 폴과 일하는 동안 위협하는 느낌이 많았으며, 그와 하는 일에서 이상하게 자신이 무능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Stadter, 2006: 61).
바로 이거다. 폴의 '부족한 자기 표상'이 그녀에게 일치적 동일시로 전달됐다. 평소엔 유능하던 사람이 특정 관계에서만 무능해진다. 상대방의 자기 표상을 내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가 케이스먼트가 소개한 P부인의 사례도 같은 맥락이다. "P부인의 어머니는 남동생을 낳은 후, 그녀를 다루기가 어려워지자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나중에는 그녀가 네 살 때 그녀가 먹기를 거절해서 정상 체중을 회복할 때까지 그녀를 고향에 보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Casement, 2003: 37).
P부인의 내면에 저장된 것은 뭘까? '소리를 듣는 아이(자기 표상)'와 '소리 지르는 엄마(대상 표상)'. 이 세트가 P부인 안에 들어있다. 평소엔 조용하다. P부인은 괜찮은 엄마였다. 아들과 잘 지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 특정 상황에서 이 세트가 깨어났다. P부인은 화가 나서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날 밤, 아들이 잠든 후 넋을 잃고 울었다. 왜 그랬을까? "소리를 지르는 엄마였던 환자가 그 소리를 듣는 자녀인 아들과 동일시했음을 볼 수 있게 해준다"(Casement, 2003: 38).
P부인은 상보적 동일시로 '소리 지르는 엄마'라는 대상 표상을 재연했다. 동시에 일치적 동일시로 아들을 통해 '소리를 듣는 아이'라는 자기 표상을 경험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한 것이다. 자신은 엄마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아들 안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느꼈다.
그날 카페에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두 가지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하나는 그녀와 함께 슬픔에 빠지는 것(일치적 동일시). 다른 하나는 그녀를 구해내야 한다는 것(상보적 동일시). 둘 다 자연스럽고, 둘 다 피할 수 없다. 깊은 감정 상황에서는 누구나 이 두 가지를 느낀다.
문제는 거기 머물러 있느냐, 빠져나오느냐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어떤 마음이 드세요?" 위로도, 조언도 아니었다. 그냥 질문이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사실은… 그 사람한테 화가 나. 왜 나를 떠났는지. 나를 혼자 남겨두고." 그 순간, 무언가 풀렸다.
그게 바로 중립의 힘이다. 일치적 동일시로 그녀의 슬픔을 느끼되, 거기 완전히 빠지지는 않는 것. 상보적 동일시로 역할을 인식하되, 그 역할을 연기하지 않는 것. 바로 그 사이에 서는 게 진짜 도움이다. "치료자는 맛을 보며 통째로 삼키지는 않는다. 이렇게 해서 치료자는 환자의 내적 대상 세계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 구조를 조명한다"(바우어, 2023: 133).
내가 위로자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자, 친구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화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풀렸다. 더 이상 나를 구원자로 만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 사람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사랑, 화, 죄책감, 그리움—을 꺼냈다. 나는 위로하거나 조언하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카페를 나설 때 그녀가 말했다. "오늘 이야기해서 좋았어. 뭔가… 좀 가벼워진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단지 일치적 동일시와 상보적 동일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을 뿐이다. 그녀의 슬픔을 느끼되 빠지지 않고, 역할을 인식하되 연기하지 않았다.
당신도 경험할 것이다. 누군가 깊은 슬픔에 빠졌을 때, 누군가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누군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평소엔 느끼지 않던 강렬한 감정들이 올라올 것이다. 일치적 동일시로 상대의 감정에 빠져들 것이다. 상보적 동일시로 특정 역할을 떠맡게 될 것이다.
그때 기억하라. 이 두 가지는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상대방 안에 저장된 '자기 표상'을 당신이 느끼거나(일치적), 상대방 안에 저장된 '대상 표상'의 역할을 당신이 하게 되거나(상보적). 둘 다 자연스럽고, 둘 다 피할 수 없다.
끌려 들어가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 머물러 있는 것은 잘못이다. 느끼되 빠지지 말고, 인식하되 연기하지 말라. 일치적 동일시와 상보적 동일시 사이, 그 중립의 공간이 바로 진짜 만남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뿐이다.
참고문헌: 그레고리 바우어/ 정남운 역(2023). 지금-여기에서의 전이 분석. 학지사. 장정은(2021). 정신분석으로 상담하기. 서울: 학지사. Michael Stadter. (1996). Object Relations Brief Therapy. 이재훈, 김도애 역(2006). 대상관계 단기치료.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Patrick Casement. (1985). On Learning from the Patient. 이재훈 역(2003). 환자로부터 배우기.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방기연(2021). 상담심리학. 서울: 교육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