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감추려 할수록, 그것은 더 크게 말한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을 성공적으로 감췄다고. 억눌러야 할 감정을 완벽하게 억눌렀다고. 하지만 그건 환상이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른 형태로, 다른 시간에, 다른 방식으로 돌아올 뿐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이 간단하고도 강렬한 진실은 백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해졌다. SNS에서 완벽한 삶을 연출하고, 회사에서 프로페셔널한 가면을 쓰고, 가족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현대인들에게, 억압의 귀환은 더 교묘하고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찾아온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상류에 댐이 있어도 강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출구를 찾는 것처럼, 억압된 것이 계속해서 억압될 수 없고, 어느 지점에서 드러날 것"(야콥스, 2024: 148)이라고. 그리고 가장 역설적인 건, "억압된 것은 억압된 내용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바로 그 방어기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게 된다"(야콥스, 2024: 148)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다. 억압된 것은 당신이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돌아온다는 것. 당신의 말실수로, 당신의 실수행위로, 그리고 가장 교묘하게는 당신의 방어기제 그 자체를 통해서 돌아온다는 것.
말실수는 무의식의 정직한 고백이다
"실수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에요."
이 변명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하는가. 하지만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말실수야말로 가장 정직한 말이다. 의식이 검열하지 못한 순간, 무의식이 튀어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려다 '할머니'라고 부른 며느리. 상사에게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려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직장인. 전 애인의 이름을 현재 연인에게 부른 사람. 이들은 모두 "실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의식은 실수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정확하게 말한다.
며느리의 무의식은 시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닌 세대 차이가 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직장인의 무의식은 존경이 아닌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연인의 무의식은 아직 전 애인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다. 말실수는 억압된 진실의 귀환이다.
더 흥미로운 건 사람들이 이런 말실수 후에 보이는 반응이다. 과도하게 부인하거나, 지나치게 해명하거나, 농담으로 넘기려 한다. 왜? 자신도 그 말실수가 진실을 담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감추려 한다. 하지만 감출수록 그 진실은 더 크게 메아리친다.
실수행위, 몸이 말하는 진실
말실수가 언어적 귀환이라면, 실수행위는 신체적 귀환이다.
중요한 회의 자료를 깜빡 잊고 온다. 약속 시간을 착각한다. 열쇠를 계속 잃어버린다. 사람들은 이걸 단순한 건망증이나 부주의로 치부한다. 하지만 당신의 무의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회의에 가기 싫었던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의식은 "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무의식은 "가지 않겠다"고 행동한다. 그리고 무의식이 이긴다. 항상.
한 내담자는 치료 약속에 석 달 연속 5분씩 늦었다. "교통 체증이 심해서요", "알람이 안 울렸어요", "주차 자리를 못 찾았어요." 매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5분이라는 일관된 패턴이 말해주는 건, 그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양가감정. 그래서 5분이라는 절묘한 타협점을 무의식이 선택한 것이다.
더 극적인 예도 있다. 결혼식 전날 계단에서 발을 삐는 신부.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열이 나는 직장인.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 날 차 사고를 내는 사람. 이들의 몸은 의식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걸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억압된 거부감은 증상으로 돌아온다. 몸이 아프다는 건 가장 완벽한 변명이 된다. 아무도 비난할 수 없고, 본인도 죄책감을 덜 느낀다. 무의식은 이걸 안다. 그래서 몸을 통해 말한다.
부인: 가장 투명한 거짓말
"아니, 전혀 화 안 났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주먹을 쥐고 있다. 이를 악물고 있다. 목소리가 떨린다. 하지만 본인은 진심으로 화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이게 부인이다.
부인은 모든 방어기제 중에서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투명하며, 동시에 가장 완고하다. 왜냐하면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완벽했어요. 아무 문제 없는 행복한 가정이었죠."
이렇게 말하는 내담자가 동시에 이런 증상들을 보인다. 사소한 실수에도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비난한다.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민감하다.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런 증상들은 어디서 왔을까? 완벽한 가정에서?
부인의 역설은 이것이다. 부인이 강력할수록, 그 밑에 감춰진 진실도 강력하다는 것. 아무 문제 없었다고 과도하게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 남성 내담자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요. 한 번도 화내시는 걸 본 적이 없고, 항상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셨죠." 그런데 이 내담자는 자신의 감정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슬픈지, 화났는지, 기쁜지 구분을 못 했다. 그저 "이성적으로 판단"할 뿐이었다.
몇 달의 작업 끝에 진실이 드러났다. 아버지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감정을 억압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남자가 울면 못 써", "감정적으로 굴지 마", "네 기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뭘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메시지를 평생 들으며 자란 내담자는 아버지를 이상화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감정 억압 방식을 내사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부인했다.
부인은 고통스러운 진실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방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부인 자체가 그 고통스러운 진실의 존재를 증명한다. 감출 것이 없다면, 부인할 필요도 없으니까.
한 상담 장면을 보자. "Hannah, 당신은 '아니, 화 안 났어요'라고 했지만, 당신이 말하면서 이를 악물고, 바닥을 쿵쿵거렸어요.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그렇게 해석한 나에게 화가 난 것 같아요"(야콥스, 2024: 153).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부인하는 말과 표현하는 몸 사이의 간극, 그 틈새에서 억압된 진실이 새어 나온다.
전치: 안전한 표적을 향한 감정의 이동
상사에게 한 소리 들은 직장인이 집에 와서 배우자에게 짜증을 낸다. 배우자는 아이에게 화를 낸다. 아이는 동생을 때린다. 동생은 강아지를 발로 찬다. 이게 전치의 연쇄다.
전치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에게 감정을 억압하거나 억제하고, 그들이 더 정서적 거리를 두는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게 그 감정을 향하도록 하는 것"(야콥스, 2024: 153)이다. 쉽게 말하면, 진짜 화난 대상에게는 화를 못 내고 엉뚱한 대상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전치는 방어기제 중에서 가장 비겁하고, 동시에 가장 파괴적이다. 왜? 실제 감정의 대상이 아닌 무고한 제3자가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전치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진심으로 배우자가 잘못했다고, 아이가 버릇없다고, 강아지가 말을 안 듣는다고 믿는다. 이게 전치의 교묘함이다. 전치된 감정은 새로운 대상에게 완벽하게 맞춰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여성 내담자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평생 원하는 걸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효녀"를 원했고, 내담자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몰랐다. 아니, 알면 안 됐다.
그 억압된 욕구와 분노는 어디로 갔을까? 남편에게로 전치됐다. "남편이 내 마음을 몰라줘요. 남편이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담을 진행하면서 드러난 진실은, 정작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은 건 어머니였다는 것. 그리고 내담자 자신이 평생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는 것.
남편은 실제로 문제가 있었을까? 있었다. 하지만 내담자가 남편에게 쏟아붓는 분노의 강도는 남편의 잘못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 분노의 상당 부분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화낼 수 없었다. "효녀"는 어머니에게 화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남편이라는 안전한 표적을 찾은 것이다.
전치의 비극은 이중적이다. 첫째, 진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상사와의 문제는 배우자에게 화를 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어머니와의 문제는 남편을 탓한다고 풀리지 않는다. 둘째, 새로운 관계까지 망가진다. 무고한 제3자가 이유도 모른 채 공격받는다.
더 교묘한 전치도 있다. 감정의 대상은 그대로 두고, 감정의 내용만 바꾸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느끼면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미움을 "걱정"으로 전치한다. "네가 걱정돼서 그래." 이 말 뒤에는 종종 분노와 통제욕구가 숨어 있다. 하지만 걱정이라는 포장지는 완벽하다. 누가 걱정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너 때문에 걱정돼서 잠을 못 잔다"는 부모의 말. 이게 정말 사랑과 걱정일까? 아니면 자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분노와 불안이 "걱정"으로 전치된 것일까? 구분하기 어렵다. 당사자도 구분 못 한다. 이게 전치의 완벽함이다.
상담 관계에서도 전치는 일어난다. 내담자가 '작업에 싫증난다'고 이야기한다면, 실은 '상담에 싫증 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상담자인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이야기 속에 상담 관계, 과거 관계, 현재 관계의 감정을 숨긴다. 그리고 그 숨김 자체가 억압된 감정의 존재를 증명한다.
투사: 내 안의 그림자를 당신에게 덧씌우기
"당신은 나한테 실망한 게 분명해요."
이렇게 말하는 내담자에게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내담자는 내가 실망했다고 확신하는가?
투사다. 내담자가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실망을 인정하기엔 너무 고통스럽다. 그래서 그 감정을 나에게 투사한 것이다. 이제 실망한 건 내담자가 아니라 상담자다. 훨씬 견디기 쉽다.
투사는 "실제로는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나 특징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방식"(야콥스, 2024: 149)이다. 구어체로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할 수 있다.
투사는 모든 방어기제 중에서 가장 교묘하고 가장 설득력 있다. 왜? 투사는 타인의 현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서 실제로 존재하는 미세한 단서를 확대하고 과장하기 때문이다. 투사에는 종종 진실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투사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투사 대상은 실제로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한 남성 내담자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이용하려 한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다 이기적이에요. 자기 이익만 챙기죠." 그가 투사하고 있던 건 뭘까? 자기 자신의 이기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걸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착한 아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절대 이기적이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기심을 타인에게 투사했다. 이제 이기적인 건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다. 그는 이기심의 희생자가 됐다. 완벽한 방어다.
투사는 일반적인 방어 수단이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투사는 쉽게 알아차려도 자기 자신의 투사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투사는 투사 대상에게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동반하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투사의 가장 파괴적인 형태는 관계에서 나타난다. "당신은 나를 떠날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연인은 실제로는 자신이 떠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떠나고 싶다는 욕구를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까 봐. 그래서 상대방이 자기를 떠날 거라고 투사한다.
더 비극적인 건, 이 투사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날 떠날 거예요"라고 계속 의심하고 추궁하면, 상대방은 정말로 떠난다. 그러면 투사한 사람은 말한다. "봐요, 내가 맞았죠? 당신은 정말로 날 떠났잖아요." 자신의 의심과 집착이 상대를 떠나게 만들었다는 진실은 보지 못한다.
투사의 또 다른 형태는 긍정적 감정의 투사다. "그 사람은 분명 나를 좋아할 거야." 근거 없는 확신. 실제로는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좋아함을 고백하기 두렵다. 거절당할까 봐. 그래서 상대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투사한다. 훨씬 안전하다.
투사의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열렬히 비난하거나 열렬히 숭배한다. 둘 다 투사다.
그런데 투사에는 더 교묘한 형태가 있다. 바로 '투사적 동일시'다. 멜라니 클라인이 발견한 이 개념은 단순한 투사를 넘어선다. "A(예: 치료자)가 B(예: 내담자)의 감정을 경험하지만, B는 그 감정에 접근할 수 없고, 그 감정을 A에게가 아니라 A 내면으로 '투사한다'. A는 그런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이리둥절해 한다"(야콥스, 2024: 151).
이게 무슨 말인가?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담자가 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도 마치 자기 감정인 것처럼. 상담자는 갑자기 이유 모를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거나,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긴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한다. "왜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이것이 투사적 동일시의 핵심이다. 감정이 사람 사이를 이동한다. B가 견딜 수 없는 감정을 A의 내면 '속으로' 밀어 넣는다. A는 그 감정의 용기가 된다. 그리고 B는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된다. 잠시나마.
한 내담자는 상담 내내 무표정했다. 담담하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끔찍한 경험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상담자인 나는 회기가 끝날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내가 예민해진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내담자들과는 그런 일이 없었다. 오직 이 내담자와의 회기에서만.
이게 투사적 동일시였다. 내담자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래서 그 감정을 나에게 투사했다. 나는 내담자의 슬픔을 대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담자가 느껴야 할, 하지만 느낄 수 없는 그 감정을.
투사적 동일시는 일상에서도 일어난다. 파트너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당신은 이유 없이 불안해진다. 친구가 웃으며 괜찮다고 하는데, 당신은 왠지 모를 분노를 느낀다. 부모님이 걱정 없다고 하시는데, 당신은 견딜 수 없는 걱정에 사로잡힌다.
이럴 때, 그 감정이 정말 당신의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아니면 누군가가 느끼지 못하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당신이 대신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방어기제 자체가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여기서 가장 역설적인 진실에 도달한다. 방어기제는 억압된 것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방어기제 자체가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야콥스가 제시한 Karl의 사례를 보자. Karl이 상담자를 만나러 오는 걸 거부한 것, 그 저항 자체가 무엇을 의미했는가? "Karl이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을 거부한 것은, 늘 그랬던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은 순간에 떠오르는 감정에 대한 방어적인 표현이었다.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그는 압도당하고, 그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정신 병동에 입원시켜졌다고 위협하는 것 같았으며, 이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야콥스, 2024: 147).
그리고 야콥스는 핵심을 짚는다. "나를 만나러 온 것에 대해 Karl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갈등 있는 감정에 대한 단서를 나에게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저항은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던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을 만큼 압도되었고, 지금도 가끔 그 감정으로 인해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야콥스, 2024: 148).
저항이 바로 억압된 감정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부인이 강력할수록, 부인하는 대상의 중요성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다. 전치가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원래 대상을 향한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직접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투사가 활성화된다는 건 자신 안의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활성화됐다는 뜻이다.
방어는 은폐인 동시에 드러냄이다. 이게 프로이트가 발견한 핵심이다. 야콥스의 표현을 다시 가져오면, "억압된 것은 무엇이든 억압된 내용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바로 그 방어기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게 된다"(야콥스, 2024: 148).
댐을 쌓으면 강물이 사라지는가? 아니다. 강물은 다른 경로를 찾는다. 틈새로, 옆으로, 아래로. 억압도 마찬가지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형태로, 다른 시간에, 다른 방식으로 돌아온다. 당신의 말실수로, 당신의 실수행위로, 그리고 당신이 선택한 방어기제 바로 그것을 통해서.
방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특히 상담자는 방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방어에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방어를 존중해야 한다. 효과적인 방어를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방어를 다룰 때는 방식이 중요하다.
'직면'이라는 방법은 오히려 방어를 더 강화하고 더 큰 저항으로 이어진다. 장애물을 공격하면 장애물이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대신 방어를 하게 된 이유를 먼저 이해하도록 하면, 내담자가 방어를 서서히 해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핵심은 존중이다. 방어는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 그 사람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를 공격하면 방어는 더 강해진다. 대신 방어가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려 할 때, 방어는 스스로 내려온다.
당신의 방어를 읽어라
그렇다면 일반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자신의 방어기제를 알아차려라. 당신이 무엇을 부인하는가? 어디로 감정을 전치하는가? 무엇을 투사하는가? 이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하라.
둘째, 방어기제를 공격하지 마라. 방어는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 당신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를 무너뜨리려 하면 방어는 더 강해진다. 대신 방어가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라.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무엇이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셋째, 말실수와 실수행위에 주목하라. 그것들은 무의식의 정직한 메시지다. 무시하지 마라. "그냥 실수"라고 넘기지 마라. 그 실수가 말하려는 진실을 들어라.
넷째, 타인의 방어도 존중하라. 누군가가 강력하게 부인하거나, 감정을 전치하거나, 무언가를 투사할 때, 그건 그 사람이 지금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방어를 직접 공격하면 관계만 망가진다. 대신 방어 뒤에 숨은 고통을 공감하라. 방어 전략으로 사람을 꼬리표처럼 분류하지 마라. "당신은 투사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폭력이다.
억압의 귀환은 멈출 수 없다
이 글의 결론은 희망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완벽하게 감춰도, 그것은 돌아온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억압된 것이 돌아온다는 건, 당신의 무의식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당신의 내면이 여전히 진실을 말하려 한다는 증거다. 당신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말실수를 할 때, 실수행위를 할 때, 방어기제가 작동할 때, 그건 당신의 무의식이 "나 여기 있어, 나를 봐줘"라고 말하는 것이다. 억압된 진실이 "나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어"라고 외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했듯이, 억압된 것은 계속해서 억압될 수 없고 어느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드러남은 억압된 내용을 감추려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바로 그 방어기제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게 억압의 역설이다.
그러니 억압의 귀환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환영하라.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진짜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기회니까. 당신의 말실수를 웃어넘기지 마라. 당신의 실수행위를 자책하지 마라. 당신의 방어기제를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것들은 모두 당신의 무의식이 보내는 편지다. 읽어라. 귀 기울여라. 그리고 대답하라.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이건 저주가 아니다. 기회다.
참고문헌
마이클 야콥스/ 김영근 외 역(2024). 『정신역동상담의 실제』. 학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