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집이 되어준 사람이 있나요?

by 홍종민

영화 '만약에 우리'가 말하는 것

영화를 봤다. '만약에 우리'.

현재는 흑백이다. 과거는 컬러다. 두 사람이 지금을 살아가는 장면은 색이 없다.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릴 때만 화면에 색이 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 헤어지는 순간, 현재가 컬러로 바뀐다.

여주인공이 말한다.

"은호는 나에게 집이 되어주어 고마웠어."

그 한마디에 오래 멈춰 있었다.

집.

물리적인 집이 아니다.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 아니다. 월세 걱정, 이사 문제, 평수 계산과 상관없는 집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 어떤 모습이어도 받아주는 곳. 잠시 쉬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곳. 그게 집이다.

누군가의 집이 되어준다는 것. 그게 사랑이구나 싶었다.


우리는 왜 집을 찾아 헤매는가


정신분석에서 '대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프로이트가 1905년에 충동 이론을 정립하면서 대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충동의 대상. 사랑의 대상.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매는 그것.

여기서 핵심적인 통찰이 있다. 우리가 만나게 될 모든 대상들은 잃어버린 대상의 재발견이라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품이 있었다. 젖가슴이 있었다. 전적으로 안전했던 그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자라면서, 분리되면서, 독립하면서. 그리고 평생 그것을 다시 찾아 헤맨다.

첫사랑에게서 그것을 발견한다. 아, 여기다. 내가 돌아갈 곳. 내가 쉴 곳. 나를 온전히 받아줄 곳. 그런데 헤어진다. 다시 잃어버린다. 또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또 잃어버린다. 이게 반복된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은호를 "집"이라고 부른 건 우연이 아니다. 그녀가 찾아 헤매던 것, 그녀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 그것이 은호라는 사람 안에 있었다. 은호가 잃어버린 대상의 재발견이었던 것이다.


흑백과 컬러 — 무의식의 언어


영화가 흑백과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이 날카롭다.

현재가 흑백이다. 지금 이 순간이 색이 없다. 과거를 회상할 때만 컬러다. 함께했던 시간만 빛난다.

이건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똑같다.

상담실에서 수없이 보는 장면이다. 내담자들이 현재를 이야기할 때와 과거를 이야기할 때 목소리 톤이 달라진다. 지금을 말할 때는 건조하다. 무미건조하다. 색이 없다. 그런데 "그때는요..."라고 과거를 꺼낼 때 갑자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눈빛이 빛난다. 색이 돈다.

왜 그럴까.

현재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로 도망친다. 그때가 좋았다고, 그때는 행복했다고, 그렇게 과거에 컬러를 부여한다.

그런데 영화의 반전은 마지막에 있다. 헤어지는 순간, 현재가 컬러로 바뀐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드디어 현재를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과거에 매달리던 것을 놓았다는 뜻이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했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에서 이것을 '애도 작업'이라고 부른다. 잃어버린 대상을 온전히 슬퍼하고, 받아들이고, 놓아주는 과정. 그 과정을 거쳐야만 현재가 다시 컬러가 된다.


"집이 되어주어 고마웠어"의 정신분석


한 문장을 뜯어보자.

"은호는 나에게 집이 되어주어 고마웠어."

여기에는 세 개의 층위가 있다.

첫 번째, "은호는"이다. 특정한 사람이다. 이름이 있는 사람이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두 번째, "집이 되어주어"다. 은호가 한 것은 무엇인가. 집이 되어준 것이다. 무엇을 해준 게 아니다. 무엇이 되어준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의미였던 것이다.

세 번째, "고마웠어"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은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 층위가 합쳐지면 이렇게 된다. 당신이라는 특정한 사람이 나에게 존재 자체로서 안식처가 되어주었고, 그 시간이 끝났다.

헤어짐의 말이다. 동시에 감사의 말이다. 동시에 애도의 말이다.


집이 된다는 것


사람이 사람에게 집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단순하다. 듣는 것이다.

내담자들이 상담실에 오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사주를 보러 오는 것 같지만, 진짜 이유는 다르다. 자기 이야기를 하러 오는 것이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상담실에서 보는 장면이다. 내담자들이 원하는 건 정확한 예언이 아니다. 들림이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느낌. 내가 존재한다는 확인.

라캉의 제자 장 다비드 나지오의 환자 중에 로이크라는 청년이 있었다. 강박증 환자였다. 매일 밤 창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손잡이를 부러뜨렸다. 왜 그렇게 세게 닫느냐고 물었다.

"누가 뒤에서 칼로 찌를까 봐서요."

집에는 이층에 어머니밖에 없는데 누가 무서우냐고 물었다.

"어머니요."

환상 속에서 어머니가 살인마였다. 어머니의 품이 안전하지 않았다. 집이 집이 아니었다.

집이 된다는 것은 안전하게 품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판단 없이 듣는 것이다. "그랬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다.

영화 속 은호가 여주인공에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별한 것을 해준 게 아니다. 거기 있어준 것이다. 들어준 것이다. 품어준 것이다.


왜 우리는 집을 잃어버리는가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다.

이것이 고통스러운 진실이다. 우리가 찾아 헤매던 집, 드디어 발견한 안식처,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헤어진다. 죽는다. 변한다. 멀어진다.

영화의 두 사람도 헤어진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함께할 수 없다.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

왜 그럴까.

정신분석적 대답은 이렇다. 잃어버린 대상은 재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품이 있었다. 전적인 안전, 완전한 충족, 절대적 사랑. 그것은 환상이다. 실제로 존재한 적 없다. 아기의 환상 속에만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다시 찾으려 한다. 연인에게서, 친구에게서, 상담사에게서.

하지만 그들은 그 환상적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결핍이 있는 인간이다. 나처럼 상처받고, 나처럼 두려워하고, 나처럼 불완전한 존재다.

기대와 현실의 간극. 환상과 실제의 충돌. 거기서 관계가 깨진다.


집을 잃어버린 뒤에 남는 것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자.

헤어지는 순간, 현재가 컬러로 바뀐다.

이것이 핵심이다. 잃어버린 뒤에 색이 돌아온다. 애도한 뒤에 현재가 살아난다.

왜 그럴까.

과거에 매달려 있으면 현재를 살 수 없다. 잃어버린 것을 붙들고 있으면 지금 여기를 볼 수 없다. 그래서 현재가 흑백이었다. 색이 없었다.

그런데 놓아주었다. 고마웠어, 라고 말했다. 당신은 내 집이었어, 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떠났다.

그 순간 현재가 컬러가 됐다.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은 이것을 '우울 포지션'이라고 불렀다. 아기가 어머니를 온전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계다. 이전에는 어머니를 부분 대상으로만 봤다. 좋은 젖가슴, 나쁜 젖가슴. 이분법이었다. 그런데 우울 포지션에 도달하면 깨닫는다. 어머니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불완전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동시에 상실을 깨닫는다. 어머니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어머니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우울' 포지션이다.

하지만 이 우울을 통과해야 성숙한다.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현재를 살 수 있게 된다.


대상관계의 역설


여기서 근본적인 역설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집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그 집일 수는 없다.

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한다. 처음의 설렘이 익숙함이 되고, 익숙함이 무덤덤함이 되고, 무덤덤함이 지루함이 되고. 또는 갈등이 쌓이고, 상처가 쌓이고, 견딜 수 없어지고.

프로이트가 말했다. 우리는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하게 되고 동일한 방식으로 실패하게 된다고.

반복이다. 같은 패턴이 되풀이된다. 왜? 우리가 찾는 것이 환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과 만나도 그 환상은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실망한다. 떠난다. 또 다른 사람을 찾는다. 또 실망한다.

악순환처럼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불완전한 집들


완벽한 집은 없다.

비가 새는 집도 있다. 추운 집도 있다. 좁은 집도 있다. 그래도 집이다. 그래도 거기서 쉴 수 있다. 그래도 거기서 비를 피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완벽하게 들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가끔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지치거나 짜증 내거나 실수할 수도 있다. 그래도 거기 있어준다면. 그래도 내 편이라면. 그래도 돌아갈 곳이 된다면.

충분하다.

정신분석가 위니캇은 이것을 "충분히 좋은 어머니"라고 불렀다. 완벽한 어머니가 아니다. 충분히 좋은 어머니다. 아이의 모든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게 아니다. 적당히 실패하면서, 그래도 거기 있어주면서, 아이가 현실을 배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좋은 집이면 된다.


우리 안의 집


여기서 더 나아가보자.

누군가가 나에게 집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내가 나에게 집이 되어줄 수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누군가에게 기대기만 하는 사람들. 연인이 없으면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 혼자는 도저히 못 견디는 사람들.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건 다른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다. 자기 안에 집을 짓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품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자기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정신분석가 월프레드 비온은 말했다. 분석가는 자신의 욕망, 생각, 기억들을 모두 비운 상태로 분석에 임해야 한다고.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내 안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나의 집이 된다.


집과 집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비롭다.

내가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마주 앉아 있을 때, 갑자기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분명 내 슬픔이 아니다. 내담자의 슬픔이다. 내담자가 억압하고 있는 감정이 나에게로 건너오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투사적 동일시'라고 부른다. 한 사람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현상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그냥 건너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분리된 개인들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집과 집 사이에는 길이 있다. 그 길을 통해 감정이 오간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집에 들어간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영화에서 두 사람은 헤어진다.

떠나는 사람이 있고, 남는 사람이 있다. 집을 나서는 사람이 있고, 빈집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아플까.

둘 다 아프다.

떠나는 사람은 안다. 자기가 상대방의 집이었다는 걸. 자기가 떠나면 상대방이 갈 곳을 잃는다는 걸. 그래서 미안하다. 그래서 무겁다.

남는 사람은 안다. 자기 집이 떠난다는 걸. 돌아갈 곳이 사라진다는 걸. 그래서 두렵다. 그래서 텅 빈다.

그런데 영화는 보여준다. 헤어지는 순간 현재가 컬러가 된다고. 떠남이 끝이 아니라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고마웠어


"고마웠어."

이 말이 갖는 힘이 있다.

원망하지 않는다. 탓하지 않는다. 왜 떠나느냐고, 왜 버리느냐고, 그렇게 묻지 않는다.

대신 고맙다고 한다. 당신이 내 집이었다고 한다. 그 시간이 소중했다고 한다.

이것이 성숙한 이별이다. 잃어버린 것을 온전히 인정하고, 감사하고, 놓아주는 것이다.

상담실에서 이런 이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은 원망한다. 분노한다. 상대방 탓을 한다. 또는 자기 탓을 한다. 자책한다. 자해한다.

"고마웠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다. 자기 감정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온전한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집이란 무엇인가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집이란 무엇인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관계다. 누군가와 누군가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집이 되어주고, 너도 나에게 집이 되어주는 것이다.

집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비가 새도 된다. 좁아도 된다. 충분히 좋으면 된다.

집은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사할 수도 있다. 떠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 시간 동안 집이었다면. 그 시간 동안 쉴 수 있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나에게 집이 될 수 있다. 외부의 집을 잃어버려도, 내 안에 집이 있다면, 거기로 돌아갈 수 있다.


당신에게 집이 되어준 사람이 있나요


이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에게 집이 되어준 사람이 있나요?

어린 시절, 부모님이 그랬을 수도 있다. 학창 시절, 친구가 그랬을 수도 있다. 연인이, 배우자가, 스승이, 상담사가 그랬을 수도 있다.

또는 아무도 없었을 수도 있다. 평생 집을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찾았다가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아직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괜찮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의 집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당신 자신에게 집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상담실이라는 집


상담실은 일시적인 집이다.

내담자가 들어온다. 한 시간 동안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나는 듣는다. 판단하지 않는다. 질문한다. 그들의 억압된 것을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그리고 시간이 끝나면 떠난다. 다음 주에 또 온다. 또 떠난다. 이게 반복된다.

어느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충분히 쉬었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외부의 집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안다. 내 역할이 끝났다는 걸. 일시적인 집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는 걸.

그리고 그들이 떠날 때, 마음속으로 말한다.

고마웠어. 당신이 내 상담실을 찾아와줘서.


마지막으로


영화 '만약에 우리'는 사랑에 대한 영화다. 동시에 상실에 대한 영화다. 동시에 애도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에 대한 영화다.

누군가의 집이 된다는 것. 누군가가 내 집이 되어준다는 것. 그리고 그 집을 잃어버린 뒤에도 살아간다는 것.

현재가 흑백이라면, 아직 과거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놓아줄 때, 고맙다고 말할 때, 현재가 다시 컬러가 된다.

당신에게 집이 되어준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에게, 또는 그 사람의 기억에게,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당신은 나에게 집이 되어주어 고마웠어."

그리고 나서 현재를 살아가면 된다. 컬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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