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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분 만에 뒤집히는 마음

by 홍종민

어제 카페에서 두 여자를 봤다.

한 명은 계속 사과하고 있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그때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 목소리가 간절했다. 정말로 미안해하는 게 보였다.

상대방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봤다. 대답이 없었다.

사과하던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나도 그때 진짜 힘들었거든. 근데 네 생각 많이 했어. 너한테 연락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사과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아니 이 정도면 됐잖아. 내가 얼마나 빌어야 돼? 나도 사람인데 실수할 수도 있지.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상대방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뭐?"

"아니 진짜. 나 지금 이렇게 사과하는데도 계속 무시하면 나도 화나거든? 친구 사이에 이렇게까지 해야 돼?"

십 분 전 그 간절한 사과는 어디 갔을까. 미안하다던 사람이 지금은 공격하고 있다. "네가 문제야"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저게 우리 마음이구나.


십 분이 전부다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마음의 두 가지 상태를 구분하면서 하나를 '편집분열 자리' 다른 하나를 '우울 자리'라고 불렀다. 클라인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마음 역시 미숙한 단계에서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발달해간다는 프로이트의 생각에 근본적으로 반대했다(김건중, 2024: 34).

클라인이 본 인간은 달랐다. 평생 동안 한편으로는 공격당할까 봐 불안해서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면서 뾰족해지는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에 여유가 생겨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는 조금 더 느긋한 상태를 그때그때 왔다 갔다 하는 진자 같은 존재였다.

십 분이다. 딱 십 분 만에 사과가 공격으로 바뀌었다. 이게 우리 마음이다.

카페의 그 여자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모두 그렇다. 미안하다고 말하다가 화를 낸다. 이해한다고 하다가 비난한다. 공감하려다가 방어한다.

왜 이러는가.

간단하다. 미안해하는 게 버겁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고통을 마주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게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망간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로. "네가 문제야. 네가 과하게 구는 거야. 내가 이 정도 사과했으면 됐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모든 게 단순해진다. 나는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다. 나는 착하고, 너는 나쁘다.

편하다. 너무 편해서 문제다.


네 탓이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이유


"네 탓이야"라고 말하는 게 왜 쉬울까.

왜냐하면 책임을 안 져도 되니까. 죄책감을 안 느껴도 되니까. 복잡한 현실을 생각 안 해도 되니까.

내 상담실에 오는 사람들 중 절반은 이렇게 말한다. "제 남편이 문제예요." "제 엄마가 이상해요." "제 상사 때문에 제가 우울증에 걸렸어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바깥에 있다. 자기는 늘 피해자다.

이런 내담자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대응하셨어요?"

잠깐 멈칫한다. 그리고 다시 상대방 이야기를 한다. 자기 행동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자기는 그냥 반응했을 뿐이라는 듯이.

"남편이 먼저 그랬어요." "엄마가 저한테 그렇게 말했는걸요." "상사가 저를 그렇게 대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이게 가시 세운 고슴도치의 말투다. 내 주체성을 부인하는 말투. 나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피해자라고 선언하는 말투.

"내가 이렇게 된 건 네 탓이야"라고 말하면서, 역설적으로 내 삶의 통제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게 안전하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책임이 없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무력하다. 왜냐하면 변화의 가능성도 없으니까. 상대방이 바뀌지 않는 한, 나는 영원히 이 고통 속에 머물러야 한다.

카페의 그 여자도 그랬다. 사과하다가 지쳤다.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니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가시를 세웠다. "네가 과하게 구는 거야."

이 말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렸다.

십 분 만에 피해자가 됐다. 십 분 전까지 가해자였던 사람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


그럼 반대는 어떤가. 진짜로 미안해하는 순간. 상대방의 고통을 보는 순간. "네가 힘들었겠구나"라고 말하는 순간.

이게 더 힘들다.

왜냐하면 복잡하니까.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네가 상처받았고 나도 실수했다. 세상이 선악으로 나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 있다.

이 깨달음이 무겁다. 내가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겁다. 상대방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무겁다.

클라인은 이 자리를 '우울 자리'라고 불렀다(김건중, 2024: 35). 이상하지 않은가. 더 건강해 보이는 자리에 왜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 자리는 우울하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우울해진다. 책임을 떠넘길 곳이 없을 때, 우리는 우울해진다. 내 고통의 원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 때, 우리는 우울해진다.

그래서 우울 자리다. 성숙함의 대가는 우울함이다. 관계의 진실을 마주하는 대가는 마음의 무거움이다.

카페의 그 여자가 처음 사과할 때, 그녀는 이 자리에 있었다. "내가 그때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 상대방의 고통을 봤다. 자기 실수를 인정했다. 책임을 졌다.

하지만 십 분을 견디지 못했다. 우울 자리가 너무 무거웠다.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니까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갔다. 가시 세운 고슴도치로.


우리는 모두 진자다


중요한 건 이거다. 우리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성숙해도, 아무리 자기분석을 많이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이 두 자리 사이를 오간다.

클라인이 프로이트와 달랐던 지점이 여기다. 프로이트는 발달 단계를 믿었다. 인간이 미숙한 단계에서 성숙한 단계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마치 계단을 오르듯이.

하지만 클라인은 달랐다. 인간은 평생 이 두 자리를 왔다 갔다 한다고 봤다. 발전이 아니라 진동. 성장이 아니라 왕복.

왜냐하면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도 위협받으면 고슴도치가 된다. 아무리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지치면 방어한다. 아무리 관계를 잘 맺는 사람도 상처받으면 가시를 세운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나는 이십 년 넘게 상담을 하면서 완벽하게 우울 자리에만 머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만약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전혀 돌보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에만 매몰되어 소진될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오간다. 때로는 가시를 세워서 자기를 지키고, 때로는 가시를 내려서 타인을 이해한다. 위협받으면 방어하고, 안전하면 공감한다. 고슴도치가 되었다가 다시 사람이 된다.

문제는 어느 한쪽에 고착되는 거다.


한쪽에 갇힌 사람들


평생 가시만 세우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관계에서 "너 때문에"만 반복하는 사람. 세상을 항상 적과 아군으로만 나누는 사람.

이들은 외롭다. 진짜로 외롭다.

고슴도치는 사랑받을 수 없다. 누가 가시 세운 고슴도치를 안고 싶어 하겠는가. 가까이 다가오면 찔린다. 따뜻하게 대하면 의심한다. "네가 왜 나한테 잘해? 뭔가 속셈이 있는 거 아니야?"

이들이 내 상담실에 오면, 나는 먼저 그 외로움을 본다. 방어 뒤에 숨은 외로움. 공격성 뒤에 가려진 갈망. "나를 이해해줘"라는 절규.

하지만 이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시 세우기가 익숙하니까. 이 방법으로 살아남았으니까. 가시를 내리는 게 더 위험하다고 느껴지니까.

"상대방도 힘들었을 거예요"라고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면, 이들은 격렬하게 반응한다. "선생님도 그 사람 편이세요?" 혹은 "제 고통은 안 중요한가요?"

이들에게 공감은 배신처럼 느껴진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순간,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세게 방어한다. 더 높게 가시를 세운다.

반대로, 평생 마음만 무겁게 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려는 사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타인만 챙기는 사람.

이들은 지친다. 진짜로 지친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있으니까.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제가 부족해서 이렇게 됐어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자기 비난이다.

"그 사람은 책임이 없나요?" 내가 묻는다.

이들은 망설인다. 상대방을 탓하면 안 된다고 배웠으니까. 착한 사람은 모든 걸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네, 하지만... 그 사람도 힘들었을 거예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가시를 세울 용기다. 때로는 "이건 네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것. 모든 책임을 내가 질 필요는 없다고 인정하는 것. 나도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

화를 내라고 말하면, 이들은 두려워한다. "그럼 저 나쁜 사람 아닌가요?" "상대방이 상처받으면 어떡해요?"

하지만 화를 내지 못하면 관계가 병든다. 한쪽만 계속 짐을 지면, 언젠가 무너진다. 착한 사람으로만 살면, 결국 폭발하거나 소멸한다.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용기


건강한 마음은 이 둘 사이를 오간다. 상황에 맞게,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위협받을 때는 가시를 세운다. "이건 네 잘못이야. 나는 이렇게 당할 이유가 없어." 자기를 지킨다. 경계를 설정한다.

안전할 때는 가시를 내린다. "너도 힘들었겠구나. 나도 실수했어." 상대를 이해한다. 책임을 나눈다.

이 왕복 운동이 관계를 살린다. 한쪽에만 고착되지 않는 것. 필요할 때 방어하고, 가능할 때 공감하는 것.

카페의 그 여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십 분밖에 견디지 못했다는 거다. 우울 자리에 딱 십 분 있다가 도망갔다.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니까 견딜 수 없어서.

하지만 생각해보면, 십 분이라도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처음부터 "네 탓이야"라고만 하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라고 먼저 말했다. 우울 자리로 갔다가 다시 나온 거다.

문제는 왕복할 줄 모른다는 것. 우울 자리가 너무 무거워서 도망갔는데, 이제 가시 세운 자리에 고착될 거라는 것. 다시 우울 자리로 돌아갈 줄 모른다는 것.


십 분을 조금씩 늘려가기


내 상담실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내담자가 이 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기 시작할 때다.

처음에는 늘 가시만 세우던 사람이 어느 날 말한다. "사실 그때 제가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요. 남편도 최선을 다한 거였는데." 우울 자리로 간 것이다.

처음에는 늘 마음만 무겁던 사람이 어느 날 말한다. "이번에는 제가 화를 냈어요. '이건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말했어요." 가시를 세울 용기를 낸 것이다.

이 순간들이 치유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 고착되지 않았다는 것. 유연하다는 것.

그리고 조금씩 그 시간이 늘어난다. 처음에는 십 분밖에 못 견뎠던 우울 자리를, 이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견딘다. "내가 미안해"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바로 받아주지 않아도, 조금 더 기다릴 수 있게 된다. 더 무거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게 된다.

혹은 반대로, 평생 마음만 무겁게 지고 살던 사람이 가시를 세우는 연습을 한다. 처음에는 오 분만 화를 내다가, 점점 시간을 늘린다. "네 탓이야"라고 말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는 걸 배운다. 나도 지켜질 가치가 있다는 걸 안다.

카페의 그 여자도 연습이 필요하다. 십 분을 이십 분으로 늘리는 연습. 상대방이 바로 받아주지 않아도, 조금 더 견디는 연습. 내 사과가 진심이라면, 상대방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

그리고 동시에, 가시를 세워도 괜찮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십 분 사과했으면 충분하다. 이제는 "나도 힘들어"라고 말해도 된다. 우울 자리에서 다시 나와도 괜찮다.

중요한 건 왕복이다. 한쪽에만 갇히지 않는 것.


상담자로서 내가 하는 일


나는 이 왕복 운동을 돕는다.

늘 가시만 세우는 사람에게는 우울 자리로 가는 다리를 놓아준다. "상대방은 왜 그랬을 것 같아요?"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 있어요?" 조심스럽게, 천천히, 타인의 관점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늘 마음만 무거운 사람에게는 가시를 세울 허락을 준다. "화내도 돼요." "상대방에게 책임을 물어도 괜찮아요." 자기를 지키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고 알려준다.

이 과정은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익숙한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하니까. 변화가 두렵고, 새로운 자리가 낯설고, 그냥 지금 이대로가 안전하다고 느껴지니까.

하지만 천천히 변한다. 상담실이 안전하다고 느껴지면. 내가 그들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 그때 조금씩 움직인다. 가시를 세우던 자리에서 마음이 무거운 자리로, 마음이 무거운 자리에서 가시를 세우는 자리로.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은 발견한다. 두 자리를 오갈 수 있다는 것을. 한쪽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상황에 맞게,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그게 치유의 순간이다. 완벽한 성숙이 아니라, 자유로운 왕복. 고착이 아니라, 흐름.


완벽할 필요 없다


카페를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저 두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사과하던 사람이 화를 내자, 상대방도 화를 냈다. 둘 다 가시를 세웠다.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뾰족해졌다.

그들의 관계가 끝날까.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한 시간 뒤, 혹은 하루 뒤, 둘 중 한 명이 다시 우울 자리로 갈지도 모른다. "미안해, 내가 너무 심했어." 그러면 상대방도 가시를 내릴 것이다. "나도 미안해."

혹은 둘 다 가시를 세운 채로 헤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평생 그 자리에 머무를 수도 있다. "저 친구가 나쁜 거야"라고 서로 생각하면서.

중요한 건 이거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는 것.

십 분밖에 못 견디는 날도 있고, 한 시간 견디는 날도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날도 있고, 가시만 세우는 날도 있다. 공감하는 날도 있고, 방어하는 날도 있다.

그게 인간이다.

클라인이 옳았다. 우리는 발달 단계를 밟아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평생 이 두 자리를 오간다. 때로는 고슴도치가 되고, 때로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게 괜찮다. 아니, 그게 정상이다.

중요한 건 어느 한쪽에 갇히지 않는 것. 가시만 세우면 외롭고, 마음만 무거우면 지친다. 건강한 마음은 이 둘을 오간다.

당신도 그렇게 해도 된다. 때로는 "네 탓이야"라고 말하고, 때로는 "너도 힘들었겠구나"라고 말하고. 때로는 가시를 세우고, 때로는 가시를 내리고.

완벽하게 성숙할 필요 없다. 진자처럼 오가면 된다. 그게 인간이다.

십 분밖에 못 견뎠어도 괜찮다. 다음에는 이십 분 견디면 된다. 오늘 가시를 세웠어도 괜찮다. 내일은 가시를 내리면 된다.

우리는 모두 진자다. 왔다 갔다 하는 게 우리 본성이다.

한쪽에 멈춰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것.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


참고문헌

김건중(2024). 『마음의 여섯 얼굴』. 에이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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