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은 왜 잠들기 전 그 짓을 하는가

by 홍종민

당신에겐 잠들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문 세 번 확인하기, 베개 각도 맞추기, 알람시계 숫자 확인하기. "그냥 습관이에요." 이렇게 말하며 넘어가는가? 틀렸다. 그건 습관이 아니다. 그건 당신의 무의식이 밤마다 상연하는 비밀스러운 드라마다.

프로이트가 100년 전에 만난 열아홉 살 소녀는 당신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었을 뿐, 본질은 똑같다. 그녀는 밤마다 시계를 모두 치우고, 화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베개를 침대 머리판에서 떼어놓고, 이불을 흔들어 두껍게 만든 뒤 다시 평평하게 눌러야만 잠들 수 있었다. 한두 시간이 걸렸다. 그녀의 부모는 지쳐 쓰러졌다.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그녀는 당신보다 더 정직했을 뿐이다. 당신은 그저 증상을 축소해서 '정상'이라는 가면 뒤에 숨겼을 뿐이다. 다 똑같다.


잠은 의식의 항복이다


사람들은 잠을 단순한 생리현상으로 여긴다. 틀렸다. 잠은 의식이 무의식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순간이다. 깨어 있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통제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그런데 잠드는 순간, 이 모든 통제가 해체된다.

무의식은 이 틈을 노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을. 통제를 잃는 것을. 그래서 의식(儀式)이 필요하다. 깨어 있음에서 잠듦으로 넘어가는 그 위험한 경계에서, 우리는 나름의 안전장치를 만든다.

"단지 조용해야 잠을 잘 수 있어서요." 프로이트의 환자도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이다. 그녀가 정말로 원한 건 조용함이 아니었다. 증거는 명백하다. 그녀는 자기 방과 부모 방 사이의 문을 열어두라고 요구했다. 소음을 차단하려면 문을 닫아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이 모순이 핵심이다. 증상은 늘 자기 자신을 배신한다. 표면적 이유와 실제 욕망이 정면충돌하는 지점, 바로 거기에 진실이 있다.


시계는 왜 치워야 했나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에 의해서 잠을 방해받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시계의 똑딱거림은 성적인 흥분 상태에 있는 음핵의 두근거림과 견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이 느낌으로 인해서 계속 잠에서 깨어났습니다."(프로이트, 2022: 381)

충격적인가? 충격받을 필요 없다. 당신도 매일 이런 식으로 산다. 다만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 소녀에게 시계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었다. 시계는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주기적으로 똑딱거린다. 월경처럼. 성적 흥분처럼. 그녀의 몸이 보내는 신호처럼. 그래서 시계를 치워야 했다. 침대 옆 서랍 속도 안 된다. 아예 방 밖으로.

이건 미친 짓이 아니다. 이건 정확한 은유다. 무의식은 추상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는다. 구체적 사물로 말한다. 시계를 치운다는 건 "나는 내 성적 욕망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것도 밤마다, 의식(儀式)으로.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자기 전에 확인하는 그것, 정돈하는 그것, 반복하는 그것. 전부 이런 식이다. 무언가를 치우는 건 무언가를 부인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정렬하는 건 무언가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늘 그랬다.


베개와 침대 머리판이 닿으면 안 되는 이유


"베개가 침대 머리말의 판자에 닿아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이해하자, 자기가 행한 의식의 핵심적인 의미를 어느 날 털어놓았습니다. 베개는 항상 여자를 의미하고, 곧바로 서 있는 침대의 머리말은 남자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 우리는 이를 마술적인 방식이라고 첨언해도 무방합니다 — 남자와 여자를 서로 분리해 놓으려 했던 것입니다."(프로이트, 2022: 382)

이게 진짜다. 그녀는 부모가 섹스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그들을 분리했다. 베개를 떼어놓고, 문을 열어놓고, 심지어 어렸을 때는 부모 침대 사이에 직접 누워서 물리적으로 가로막았다.

"왜 부모 섹스가 문제인데?"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아직 모르는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의 성관계는 위협이다. 새로운 아이가 생기면? 사랑이 분할된다. 관심이 나뉜다. 나의 절대적 지위가 무너진다. 그래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방해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녀는 아버지를 원했다. 그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어머니에게 불친절했던 이유, 아버지 옆에 누우려 했던 이유, 모든 게 연결된다. 프로이트를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 주변을 봐라. 딸이 아버지에게 집착하고, 엄마를 적대시하는 경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게 인간이다.

이불을 흔들어 두껍게 만들었다 다시 펴는 이유

"만약 베개가 여성을 의미했다면, 깃털 이불의 덮개를 흔들어서 털이 모두 아래로 쏠려 두꺼워진다는 것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여자가 임신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부의 배처럼 불룩해진 부분을 잊지 않고 다시 평평하게 만들곤 했는데, 그 까닭은 부모의 성관계로 인해 다른 아이가 태어나 자신의 경쟁자가 생길까 봐 여러 해에 걸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프로이트, 2022: 383)

보라. 이불을 불룩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편다. 임신시켰다가 취소한다. 생명을 부여했다가 지운다. 이게 바로 무의식이 말하는 방식이다.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된다. 이불이 임신이 될 리 없다. 그런데 무의식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 무의식은 닮은 것을 같은 것으로 본다. 불룩한 것은 임신한 배다. 평평하게 누르는 것은 임신을 취소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이렇게 강력하다.

당신의 강박도 이런 식이다. 물건을 정렬하고, 각도를 맞추고, 숫자를 확인한다. "왜요?" 물으면 대답 못 한다. 그냥 안 하면 불안하다고만 한다. 맞다. 불안의 이유는 의식이 모른다. 무의식만 안다. 그리고 무의식은 말하지 않는다. 단지 행동하게 만든다.


증상은 타협이다


프로이트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 소녀의 의식이 단순히 욕망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는 것.

"취침 의식의 지침들은 환자의 성적 욕구들을 어떤 때는 긍정적으로, 어떤 때는 부정적으로 재현합니다. 취침 의식의 절차들은 부분적으로 성적 욕구를 표현하지만, 또한 부분적으로 그런 욕구를 방어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프로이트, 2022: 384)

이게 핵심이다. 증상은 욕망과 방어의 타협점이다. 나는 아버지를 원한다 + 나는 그걸 원해선 안 된다 = 나는 부모를 분리하는 의식을 행한다. 이 공식이 모든 신경증을 관통한다.

당신의 강박도 마찬가지다. 뭔가를 원한다. 동시에 그걸 원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타협한다.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대신, 상징적으로 행동한다. 시계를 치우고, 베개를 떼어놓고, 이불을 편다.

이게 인간이다. 우리는 결코 직선적으로 살지 못한다. 늘 우회한다. 변형한다. 타협한다. 그리고 그 타협의 흔적이 바로 증상이다.


당신은 매일 밤 무엇과 협상하는가


자, 이제 당신 차례다. 당신이 잠들기 전 하는 그 일. 그게 뭔가?

문 확인? 당신은 무엇이 침입할까 두려운가? 정말 도둑인가? 아니면 당신 안의 무언가가 새어나갈까 두려운 것인가?

베개 각도 조정? 당신은 무엇을 정확히 맞추려는가? 정말 목 편안함인가? 아니면 통제 불가능한 삶에서 최소한 이것만은 내 뜻대로 하겠다는 것인가?

이불 정리? 당신은 무엇을 덮으려는가? 몸인가, 마음인가?

답을 모르겠다면 정상이다. 의식은 늘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은 안다. 그리고 무의식은 매일 밤, 당신이 의식을 잃는 그 경계에서, 진실을 흘린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없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 소녀는 병이고 나는 정상 아닌가요?"

아니다. 경계는 없다. 차이는 정도일 뿐이다. 그 소녀는 두 시간 걸렸고, 당신은 5분 걸린다. 그게 전부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정상인도 나름대로의 취침 의식을 지니며, 일정한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수면을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프로이트, 2022: 378) 봐라. 정상인도 의식이 있다. 다만 '합리화'가 잘 되어 있을 뿐이다.

병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의 차이는 이거다. 병적인 것은 타협에 실패한다. 욕망이 너무 강하거나, 방어가 너무 강해서,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증상이 커진다. 시간이 길어진다. 삶이 방해받는다.

하지만 구조는 똑같다. 우리 모두 뭔가를 억압하고, 뭔가를 타협하고, 뭔가를 의식(儀式)으로 표현한다. 당신이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는다는 건, 당신의 타협이 '적당히' 성공적이라는 뜻일 뿐이다.


분석은 자각이다


그 소녀는 어떻게 나았을까? 프로이트가 마법을 부렸나? 아니다. 단지 물었을 뿐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아요?"

"나는 소녀에게 암시를 주고 또 자기 행위를 해석해 보도록 제안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단호하게 부인하거나 아니면 경멸하는 듯한 의심을 품은 채 나의 제안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최초의 거부적인 반응에 이어서,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프로이트, 2022: 380)

처음엔 거부한다. 당연하다. 누가 자기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싶겠는가? 하지만 질문은 씨앗처럼 작동한다. 물어지고 나면, 마음은 스스로 탐색을 시작한다.

그래서 분석은 강요가 아니다. 설득이 아니다. 단지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게 혹시 이런 의미는 아닐까요?" 이렇게 묻는 순간, 내담자는 자기 안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진실을 발견한다.

"그녀의 노력은 모든 해석들을 스스로 수긍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이 진척을 보일수록, 그녀는 강박적인 취침 의식의 절차들을 그렇게 엄격하게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다."(프로이트, 2022: 380)

증상은 무지 위에서 번성한다. 자각하는 순간, 힘을 잃는다. 왜? 증상의 목적이 '숨기기'이기 때문이다. 드러나면 더 이상 필요 없다. 직접 대면할 수 있으니까.


당신의 의식을 해체하라


그래서 묻는다. 당신의 취침 의식은 무엇인가?

지금 당장 종이를 꺼내라. 잠들기 전 당신이 반드시 하는 일을 써라. 전부 다. 사소한 것도.

그리고 하나씩 물어라. "이게 왜 필요하지? 정말 이 이유 때문일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

답이 바로 안 나와도 괜찮다. 계속 물어라. 일주일, 한 달, 일 년. 무의식은 서두르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한 질문에는 반드시 답한다.

당신이 발견할 것은 놀랍다. 당신의 작은 의식들이 사실은 거대한 드라마였다는 것. 당신이 매일 밤 상연하는 게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욕망과 공포와 사랑과 증오의 복잡한 협상이었다는 것.

이게 자기 분석이다. 치료실에 갈 필요 없다. 단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면 된다. "나는 왜 이러지?"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하다.


모든 증상은 미해결 과제다


프로이트의 통찰은 혁명적이다. 증상은 병이 아니다. 증상은 메시지다.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봐, 우리 이거 아직 해결 안 됐어. 좀 봐줘."

그래서 증상을 억지로 없애려 하면 실패한다. 증상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찢어버린다고 보낸 사람이 사라지나? 아니다. 더 큰 메시지를 보낼 뿐이다.

해결책은 하나다. 메시지를 읽어라.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라. 그리고 응답하라. 그 순간 증상은 임무를 다한다. 사라진다.

당신의 취침 의식도 마찬가지다. 그건 당신의 무의식이 매일 밤 보내는 편지다. "나 여기 있어. 나 좀 봐줘. 우리 이거 아직 안 끝났어."

무시하지 마라. 읽어라.

그게 성장이다. 그게 치유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이다.


참고문헌

지그문트 프로이트/ 임홍빈 외 역(2022). 『정신분석 강의』. 열린책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의 착함이 당신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