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딸을 생각했다. 스타벅스에서 담요 사은품을 받았을 때, 그 순간 떠오른 건 딸이었다. "이거 우리 딸 주면 좋겠다." 이 마음은 진짜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딸은 이것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공짜로 받은 것 안 받아요. 왜 그런 사은품을 주세요? 제대로 선물도 안 하면서." 아버지는 자괴감에 빠졌다. 내 딴에는 생각해서 챙겨준 건데. 딸의 잔소리가 1절에서 끝나지 않을 기세였고, 옆에 있던 아들이 딸을 제지해야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틀렸느냐가 아니다. 아버지도 틀리지 않았고 딸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는 것, 그게 팩트다.
의도와 해석 사이의 심연
무의식은 무엇을 주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주었느냐에서 드러난다. 딸이 거부한 건 담요가 아니었다. 담요의 출처였다. 공짜로 받은 것, 사은품, 제대로 된 선물이 아닌 것.
딸의 무의식이 읽어낸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나는 아빠가 따로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일 만큼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이건 딸의 해석이다. 아버지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의도보다 해석이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정신분석은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브루스 핑크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분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 그가 실제로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도한 바는 그가 말하고 싶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핑크, 2021: 54).
아버지가 의도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딸에게 전달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은품이라는 물건의 형태가 아버지의 의도를 가려버렸다.
의미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 같은 행위도 받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읽힌다. 아버지에게 사은품 담요는 딸을 떠올렸다는 증거였지만, 딸에게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었다.
딸은 담요가 아니라 패턴에 반응했다.
"아빠는 사회성이 부족하다. 그러니 엄마랑 동생이랑 나랑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이 말들은 이번 사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축적된 것들이다. 딸의 무의식에는 수많은 사은품 담요들이 쌓여 있었다. 이번 담요는 단지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반복강박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서 반복한다. 기억하는 대신 행동으로 재현한다. 딸은 아버지와의 과거 경험을 기억하는 대신, 그것을 현재의 상황에서 반복하고 있었다.
칼 쾨니히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의 경험이 어떤 상황을 오해하게 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현재의 사람을 대했던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쾨니히, 2001: 47).
딸은 과거의 아버지를 현재의 아버지에게 덧씌우고 있었다. 과거에 느꼈던 무시당한 감정, 인정받지 못한 경험, 대화가 통하지 않던 좌절감. 이 모든 것이 사은품 담요 하나에 투사되었다.
담요는 더 이상 담요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축적된 서운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야 한다. 딸이 정말로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딸이 직접 말했다. "아빠가 내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화가 났다. 내가 말하면 들어주는 태도를 보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담요 문제가 아니라는 걸 딸 스스로 알고 있었다. 딸이 원하는 건 물건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내 말이 아빠에게 닿았다는 확인. 내가 아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느낌. 이것이 딸의 진짜 욕망이었다.
쾨니히는 조절하려는 소망과 영향을 주려는 소망을 구분한다. "영향을 주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결정에 영향을 주려 할 것이다. 그는 전체적인 조절을 하려고는 않지만, 자신의 욕구와 소망이 고려되기를 바란다"(쾨니히, 2001: 46).
딸은 아버지를 조절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말이 아버지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바랐을 뿐이다. 내가 뭔가를 말했을 때 아버지가 그것을 듣고 고려한다는 느낌, 그것이 딸에게는 사랑의 증거였다.
두 개의 사랑 언어
이것은 인정 욕망이다. 모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다.
핑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담자는 분석가에게서 부모의 이미지나 그와 유사한 권위적인 형상을 찾으려 한다. 그는 분석가에게 승인, 거부, 인정, 처벌 등과 같은 판결을 요구하게 된다"(핑크, 2021: 71).
딸은 아버지에게 승인과 인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사은품 담요를 거부한 것은 단순한 물건 거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인정해달라는 외침이었다. 나를 제대로 봐달라는 호소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외침을 듣지 못했다. 아버지의 귀에는 잔소리로만 들렸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번역이 안 되고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챙김의 형태로 표현된다. 뭔가를 가져다주는 것, 생각나서 건네는 것. 이건 아버지 세대의 전형적인 사랑 언어다.
딸이 원하는 건 다르다. 들림이다. 내 말이 들렸다는 확인, 내 감정이 수용되었다는 느낌. 이건 물건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김형경은 감정의 대물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김형경, 2017: 145).
아버지 세대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일하고 돈을 벌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사랑을 증명했다. 말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 감정을 나누는 것,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이런 것들은 그 세대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담요를 건넨다. 말 대신 물건으로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딸의 세대는 다른 언어를 쓴다. 딸에게는 물건보다 대화가 더 중요하다. 들어주는 것, 반응해주는 것, 내 말에 영향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딸 세대의 사랑 언어다.
아버지의 자괴감은 어디서 오는가.
아버지는 선의로 행동했다. 그런데 잔소리를 들었다. 이 간극에서 자괴감이 발생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야 한다. 아버지의 자괴감 속에는 이런 질문이 숨어 있다. 나는 왜 딸에게 제대로 닿지 못하는가?
이건 사은품 담요의 문제가 아니다. 관계의 문제다. 소통 방식의 문제다.
아버지도 어딘가에서 상처받았다. 자신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 이것은 딸만의 감정이 아니다. 아버지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둘 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둘 다 자신의 사랑이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서로 모르고 있었다.
아들이 딸을 제지한 것도 의미가 있다.
아들은 이 상황의 무의식적 긴장을 감지했다. 1절이 2절, 3절로 넘어가면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이 오갈 걸 알았다. 아들은 가족 시스템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
가족 안에서 각자는 무의식적으로 역할을 배정받는다. 누군가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누군가는 중재하는 사람, 누군가는 침묵하는 사람. 아들은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무엇이 필요했을까?
아버지에게 필요한 건 담요를 더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아니었다. 딸의 말을 듣고 "그랬구나"라고 말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변명하지 않고, 해명하지 않고, 그냥 듣는 것.
"아, 네가 그렇게 느꼈구나."
이 한마디가 딸이 평생 기다려온 선물이다.
딸은 아버지가 자신의 관점을 이해해주기를 바란 게 아니다. 동의해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단지 들어주기를 바랐다. 내 말이 아버지의 귀에 닿았다는 확인, 그것만 있으면 됐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마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서 준 건데 뭐가 문제야?" 혹은 침묵했을 것이다. 둘 다 딸에게는 같은 의미로 읽힌다. 아버지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듣는다는 것은 상대의 말을 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말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상대의 말 때문에 내가 조금이라도 변화하는 것이다.
딸이 원한 건 이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 그것이 딸에게는 존재의 증명이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딸에게는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방식대로 계속 사랑을 표현했다. 물건을 챙겨주고, 뭔가를 가져다주고. 그리고 딸은 계속 같은 불만을 터뜨렸다. 이 패턴이 수십 년간 반복되었다.
프로이트가 말한 반복강박이 여기 있다. 우리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반복한다. 기억하는 대신 행동으로 재현한다. 딸은 과거의 상처를 현재에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다. 역시 아버지는 나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계속 입증하려 한다.
이건 딸이 나빠서가 아니다. 무의식은 원래 그렇게 작동한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도 반복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이 배운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주고,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배운 사랑의 언어다.
그런데 그 언어가 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좌절한다. 왜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 걸까? 왜 딸은 내 사랑을 몰라주는 걸까?
아버지의 자괴감 속에도 인정 욕망이 있다. 나도 인정받고 싶다. 나도 내 노력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 세대는 그런 걸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침묵한다. 혹은 자괴감에 빠진다. 딸에게 직접 말하지 못한다. "나도 너한테 인정받고 싶다"고.
사랑이 사랑으로 도착하려면
이 가족에게 필요한 건 번역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딸의 욕망을 아버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아버지가 담요를 줄 때, 그 행동의 의미를 딸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이걸 줄 때 너를 떠올렸대. 아버지는 그게 사랑 표현이야."
딸이 화를 낼 때, 그 화의 의미를 아버지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딸은 물건이 아니라 대화를 원하는 거예요. 들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가족에게는 이런 번역가가 없다. 그래서 오해가 쌓이고, 상처가 쌓이고,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결국 이 사건의 핵심은 사은품 담요가 아니다.
핵심은 들림이다. 서로의 말이 서로에게 닿고 있느냐의 문제다.
딸은 아버지에게 닿고 싶었다. 아버지도 딸에게 닿고 싶었다. 그런데 둘 다 자신의 방식으로만 닿으려 했다. 상대의 방식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사랑은 의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의 언어로 전달되어야 비로소 사랑으로 인식된다.
아버지의 담요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딸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딸에게는 사랑으로 도착하지 못했다.
딸의 잔소리도 사랑이었다. 아버지와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공격으로 들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상처 입힌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깊이 상처 입힌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희망도 여기 있다.
번역을 배울 수 있다. 상대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내 방식만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아버지가 담요 대신 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법을 배운다면. 딸이 잔소리 대신 아버지의 챙김을 인정해주는 법을 배운다면.
그때 비로소 사랑이 사랑으로 도착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다.
다음에 딸이 뭔가를 말하면, 대답하지 말고 들어보라. 해명하지 말고 들어보라. 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보라.
그리고 한마디만 해보라.
"그랬구나."
그것이 딸이 평생 기다려온 선물이다. 스타벅스 담요보다, 백화점 선물보다, 현금보다 더 귀한 선물이다.
들린다는 느낌. 내 말이 아버지에게 닿았다는 확인. 그것이 딸이 진짜 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형경(2017). 『소중한 경험』. 서울: 사람풍경.
브루스 핑크/ 맹정현 역(2021).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칼 쾨니히/ 이귀행 역(2001). 『자기분석』. 하나의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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