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전화 한 통에 숨은 평생의 결핍
밤 10시, 전화가 울렸다. 전 회사 동생이다. "형, 치킨 먹고 싶은데 카드를 누나가 다 가져가서요. 5만원만..."
나는 프리랜서다. 그 동생보다 연봉이 훨씬 적다. 그런데 그 동생은 자기 친구도, 친누나도 아닌 나한테 전화를 했다. 노총각에 연봉도 괜찮은 사람이 밤늦게 치킨값이 없어서 난리라고?
여기까지만 보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배경을 알고 나면 완전히 다른 그림이 보인다. 그는 과거에 카드빚을 지고 연체를 했다. 월급이 차압당했다. 그리고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친누나가 그의 경제생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또 빚더미에 앉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이제 다시 보자. 이 밤 10시 전화 한 통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기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단순히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맡고 있던 역할들, 그 사람이 제공하던 기능들, 그 사람이 채우고 있던 자리들이 한꺼번에 공백이 된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 공백을 어떻게든 메우려고 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머니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누나가 들어섰다. 그런데 누나는 어머니를 대체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역할 중 일부, 그것도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능만을 가져갔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아마도 이 동생에게 돈을 쓰더라도 허락해주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 맛있는 거 사먹어라"라는 말. 용돈을 주면서 "네가 쓰고 싶은 데 써"라는 말.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통제뿐이다.
어머니의 역할을 두 가지로 나눠보자. 하나는 돌봄이다. 밥 먹었는지 확인하고, 아프면 병원 데려가고, 위험한 일 하지 않게 막는 것. 이건 상대방을 객체로 보는 기능이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락이다. 네가 뭘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네가 뭘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이건 상대방을 주체로 보는 기능이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누나는 돌봄 기능만 가져갔다. 동생이 빚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 동생이 또 실패하지 않게 막는 것. 하지만 허락 기능은 가져가지 않았다. 아니, 가져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누나 자신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사람은 허락을 못 한다. 허락은 상대방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불안한 사람은 상대방의 자율성이 두렵다. 상대방이 스스로 결정하면 뭔가 잘못될 것 같다. 그래서 통제한다.
누나의 통제는 어디서 왔나
누나의 통제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동생은 과거에 카드빚을 지고, 연체를 하고, 월급을 차압당했다. 이런 사람한테 카드를 맡기면 어떻게 되겠나. 누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이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은 가족인데, 이 동생마저 망가지면 어쩌나. 누나의 통제는 순수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걱정과 통제는 다르다. 걱정은 상대방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염려하는 것이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통제는 상대방의 자율성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네가 결정하면 안 돼, 내가 결정할게"라고 말하는 것이다. 카드를 전부 가져간 건 후자다. 성인 남성이, 자기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치킨 한 마리 먹겠다고 허락을 구해야 한다.
누나는 악의로 통제하는 게 아니다. 불안이다. 동생이 또 빚더미에 앉으면 어쩌나. 그 불안이 통제로 나타난다. 나지오는 불안의 전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불안에 떠는 아동이나 소녀나 남자 청년을 만날 때면, 항상 곧바로 그의 부모 중 한 사람이 옮겨주었을지도 모를 불안을 생각해 봐요"(나지오/임말희 역, 2025: 118).
누나의 불안은 어디서 왔을까? 첫째,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제 자신이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사명감. 둘째, 동생의 과거 실패에 대한 기억이 있다. 카드빚, 연체, 차압. 이 기억이 누나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셋째, 그리고 아마도 누나 자신도 과거에 누군가에게 통제당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 번째가 핵심이다. 통제당한 사람이 통제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을 정신분석에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 부른다.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돌아서서 더 약한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잔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가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쏟아내는 것. 양육자가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채 자녀에게 쏟아내는 감정들을 자녀는 고스란히 자기의 일부로 만든다.
누나가 동생을 통제하는 방식은, 누나 자신이 과거에 통제당했던 방식의 재현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어머니가 누나를 그렇게 키웠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누나에게 경제적 자율성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누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자신도 동생에게 똑같이 한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믿으면서.
의식적 동기와 무의식적 동기
여기서 중요한 건, 누나의 의식적 동기와 무의식적 동기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의식적으로는 보호다. "동생이 또 망하면 안 돼." 이건 진심이다. 누나는 정말로 동생을 걱정한다. 동생이 또 빚더미에 앉으면 누나 자신도 힘들어진다.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통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을 수 있다. 어머니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이 가족의 중심이 되는 것.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동생이 자신 없이는 못 사는 존재가 되는 것. 이건 권력욕이 아니다. 존재 증명이다. "나는 이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확인.
누나 역시 어머니의 상실을 애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애도의 방식이 동생을 통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을 수 있다. 어머니가 하던 역할을 자신이 함으로써, 어머니와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것.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동생을 이렇게 돌봤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누나는 어머니의 통제 기능만 기억한다. 허락 기능은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누나 자신이 어머니에게서 허락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생은 왜 저항하지 않는가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동생은 왜 누나의 통제에 저항하지 않을까? 성인이다. 자기 돈이다. "내 카드 내놔"라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과거의 실패가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드빚, 연체, 차압. 이 경험은 그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돈을 못 다루는 사람이다"라는 자기비하. 그리고 누나의 통제는 이 자기비하를 매일매일 확인시켜준다. "네가 돈을 맡으면 안 돼. 네가 카드를 가지면 안 돼. 네가 결정하면 안 돼."
이게 악순환이다. 과거에 실패했다 → 자기비하가 생긴다 → 누군가가 통제한다 → 자기비하가 강화된다 → 스스로 결정할 자신이 없어진다 → 통제에 저항하지 못한다 → 더 통제당한다. 누나의 통제가 사랑에서 출발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동생의 자율성을 더 약화시키고 있다. 선의의 통제가 상대방을 더 무력하게 만드는 역설.
그리고 여기에 어머니의 상실이 겹친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누나가 통제하려 해도 어머니가 중재자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야, 걔도 다 컸는데 좀 내버려둬."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중재자가 사라졌다. 누나의 통제를 막아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동생 입장에서는 이중의 상실이다. 어머니를 잃었고, 동시에 자율성을 잃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상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의식하지 못한다. 그냥 "누나가 좀 심하긴 한데, 내가 예전에 사고 쳤으니까..."라고 합리화한다. 자기비하가 누나의 통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왜 하필 나인가: 선택의 비밀
그럼 이제 핵심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 동생은 왜 나한테 전화했을까?
친구한테 전화하면 되잖아. 5만원쯤 빌려줄 친구가 없나? 있을 거다. 그런데 친구한테 전화하지 않았다. 왜? 친구는 대등한 관계다. "야, 치킨값도 없냐?"는 소리 들을 수 있다. 체면이 깎인다. 대등한 관계에서는 의존이 부끄러운 것이 된다. 친구에게 돈을 빌리면, 자신이 "돈도 없는 놈"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과거의 실패가 다시 떠오른다.
누나한테 전화하면 되잖아. 어차피 돈은 누나가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누나한테 전화하지 않았다. 왜? 당연하다. 누나는 억압자다. "또 뭐 사먹으려고"라는 잔소리가 돌아온다. 자기 돈인데도. 누나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은 통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굴복하는 것이다. "네가 맞아, 나는 돈 관리 못 해, 그러니까 허락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한테 온 거다. 나는 권위는 있되 억압하지 않는 자리다. 전 직장 선배니까 위계는 있다. 하지만 사주상담사니까 "들어주는 사람"이다.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 잔소리하지 않는 사람. 권위와 수용의 조합.
쾨니히는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 "이상적인 대상이 욕망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며, 이들은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어떤 면에서는 정반대이다. 예를 들면, 이상적인 어머니상은 부드럽고 관대하며 뭔가를 주는 사람인데, 실제의 어머니는 차갑고 인색하다"(쾨니히/이귀행 역, 2001: 49).
누나가 통제하고 빼앗는 존재라면, 이 동생이 무의식적으로 찾는 이상적 대상은 허락하고 채워주는 존재다. 그게 내가 배치된 자리다. 나는 누나의 거울상이다. 누나의 정반대. 누나는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래"라고 말해줄 것 같은 사람. 실제로 나는 그렇게 했다. 5만원을 보냈다.
허락의 욕망: 5만원이 아니라 승인
더 깊이 들어가보자. 그가 진짜 원한 건 뭘까? 5만원? 치킨? 아니다. 그가 진짜 원한 건 허락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해줬을 그 말. "그래, 먹어라." 누나에게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그 말. 그는 5만원어치 치킨을 산 게 아니다. 5만원어치 허락을 산 거다. "네가 원하는 걸 해도 괜찮아"라는 승인을 산 거다.
정신분석에서는 요구와 욕망을 구분한다. 표면적 요구는 5만원이다. 하지만 진짜 욕망은 다른 곳에 있다. 환자가 분석가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 그것은 종종 부모에게 받고 싶었던 것의 대체물이다. 승인, 인정, 허락. 부모에게 허락을 구하듯, 권위 있는 존재에게 승인을 구한다.
이 동생이 진짜 원하는 건 뭔가? "치킨 먹어도 돼"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풀어보면 이렇다. "네가 원하는 걸 해도 돼." "네가 스스로 결정해도 돼." "네가 주체로서 존재해도 돼." 이게 허락의 본질이다. 단순히 치킨을 허락하는 게 아니다. 그의 자율성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허락해줄 사람이 사라졌다. 누나는 통제만 한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허락 기능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 나는 사주상담사이기도 하다. 그가 이전에 나한테 상담을 받으면서 뭔가를 털어놓았다. 나는 들어주는 사람이다.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 그게 어머니의 기능 중 하나다. 아이가 뭘 하든 일단 들어주고, "그랬구나"라고 말해주는 기능.
왜 남자인가: 성별의 선택
여기서 성별의 문제도 있다. 그는 남자다. 그리고 누나(여성)에게 통제당하고 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한 대상은 나(남성)다.
여성적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성적 보호자를 찾는 것일 수 있다. 누나가 아닌 형에게. 통제하는 여성이 아닌 허락하는 남성에게. 어쩌면 그는 아버지의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아버지는 어디 있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누나가 통제를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뭘 하고 있었나? 이 동생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무력한 존재였을 것이다. 가족 내에서 힘이 없는 존재. 누나의 통제를 막아주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기능을 외부에서 찾고 있다. 허락해주는 아버지. 보호해주는 아버지. 누나의 통제에서 자신을 구해줄 아버지. 그게 내가 배치된 또 다른 자리다. 나는 어머니의 허락 기능을 대신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보호 기능도 대신하고 있다.
되풀이 강박: 기억하지 못하기에 반복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피분석자가 잊어버린 것들과 억압된 것들 중 어떤 것도 기억해 내지 못하고 대신 그것들을 실연한다. 그는 그것을 기억이 아니라 행위로 재생산한다. 그는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알지 못한 채 그것을 되풀이한다"(프로이트, 2003: 118).
이 동생은 왜 나한테 전화했는지 모른다. "그냥 급해서요"라고 말할 것이다. "형이 생각나서요"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그냥"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있다. 특히 불합리해 보이는 행위일수록 그 이유는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그는 자신의 패턴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 누나에게 통제당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지. 왜 독립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의존적인 관계를 반복하는지. 왜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의존하는지. 그는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행동으로 재현한다. 밤 10시에 전화를 거는 것으로. 5만원을 빌리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으로.
그의 과거를 보자. 카드빚을 졌다. 연체를 했다. 월급을 차압당했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돈 관리를 못 해서? 아니다. 거기에도 무의식적 패턴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충동적으로 쓰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패턴.
과거에 빚을 졌을 때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가 해결해줬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빚을 대신 갚아줬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문제가 생기면 → 누군가에게 의존한다 → 해결된다. 이 패턴이 학습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밤 10시에 치킨이 먹고 싶다 → 돈이 없다 → 누군가에게 전화한다 → 해결해준다. 이것은 자율성의 결여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의존해서 해결하는 패턴. 그리고 이 패턴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것이다. 어머니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줬기 때문에.
역전이: 나는 왜 빌려줬나
정신분석에서 가장 큰 금기는 역전이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분석가가 내담자의 무의식에 도달하는 빠른 길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역전이 감정을 점검하는 것이다. 부모처럼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일게 하는 내담자의 의존성을 알아차린다. 역전이를 통해 내담자의 무의식을 읽고, 중립을 지키면서 해석해준다. 역전이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나는 왜 5만원을 빌려줬을까? 밤 10시에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솔직히 말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된 느낌이 있었다. 프리랜서로 돈이 없는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구원자가 된 느낌.
이것이 역전이다. 그의 의존성이 나에게 돌봐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다. 프리랜서로 불안정한 삶을 살면서,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늘 있다. 그의 전화는 나의 이 욕망을 충족시켜줬다. "나는 필요한 사람이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
우리는 서로의 무의식적 욕망을 교환한 것이다. 그는 허락을 얻었고, 나는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율성을 확인받았고, 나는 존재 가치를 확인받았다. 완벽한 거래였다. 의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 거래.
5만원의 심리적 의미: 수치심의 우회로
그런데 나는 행동으로 옮겼다. 5만원을 보냈다. 이것은 분석적 입장에서 보면 실패다. 나는 그의 전이를 강화시켜버린 것이다. 그가 5만원을 갚으면 관계가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 부채가 쌓인다. "이 형은 허락해주는 사람"이라는 전이가 강화된다. 다음에 또 전화가 올 수 있다. 돈 때문이 아니라, 그 허락이 필요할 때.
하지만 여기서 더 복잡한 층위가 있다. 그의 과거를 생각해보자. 카드빚, 연체, 차압. 그 경험 이후 그는 돈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수치심. 죄의식. 자기비하. 그리고 누나의 통제는 이것을 매일 확인시켜준다. "네가 돈을 못 다루니까 내가 관리하는 거야."
그가 나한테 5만원을 빌린 건, 그 수치심을 우회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누나에게 빌리면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또 뭐 사먹으려고? 네가 왜 그 꼴이 됐는지 알아?" 과거의 실패가 다시 환기된다. 수치심이 자극된다. 친구에게 빌리면 체면이 깎인다. "야, 너 카드도 없냐? 무슨 일이야?" 설명해야 한다. 누나가 카드를 가져갔다고. 그럼 더 창피하다. 성인인데 누나한테 경제권을 뺏겼다고 고백하는 꼴이니까.
나에게 빌리면? 사주상담사에게 상담비를 내듯, 그냥 거래로 위장할 수 있다. 의존이 아니라 거래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형, 나중에 갚을게요"라고 말하면, 이건 의존이 아니라 대출이 된다. 수치심이 덜하다. 그리고 나는 잔소리를 안 한다. 왜 돈이 없는지 묻지 않는다. 그냥 보내준다. 이게 그에게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두 가지 상실의 교차
이 동생에게는 두 가지 상실이 겹쳐 있다. 첫째, 어머니의 상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허락해주는 사람,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사라졌다. 둘째, 자율성의 상실. 과거에 실패한 이후, 그리고 누나의 통제가 시작된 이후, 그는 자신의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상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누나가 이 정도로 통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중재자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야, 걔도 다 컸는데 좀 내버려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누나가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누나는 어머니의 통제 기능만 가져갔다. 허락 기능은 없다.
그래서 이 동생은 허락을 외부에서 찾는다. 어머니의 허락 기능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는다. 그게 내가 배치된 자리다. 나는 어머니의 대체물이 아니다. 어머니의 일부 기능의 대체물이다. 허락하는 기능. 승인하는 기능. "그래, 해도 돼"라고 말해주는 기능.
그리고 이 동생은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도는 힘든 노동이다. 대상이 사라지면,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노동을 통해서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나가 어머니의 자리에 들어섬으로써, 어머니의 상실이 가려졌다. 어머니가 없어도 누군가가 돌봐주니까. 그래서 애도가 미완결 상태로 남아 있다.
패턴을 끊으려면: 질문의 힘
다음에 그가 또 전화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선택지가 있다. 첫째, 또 빌려준다. 그러면 "허락해주는 형"이라는 자리가 고착된다. 그는 계속 나한테 올 것이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허락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그의 패턴을 강화시키는 공범이 된다.
둘째, 거절한다. "미안, 나도 없어." 그러면 그는 다른 곳을 찾을 것이다. 또 다른 "허락해주는 사람"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대상만 바뀌는 것이다.
셋째, 질문한다. "왜 나한테 전화했어?" 이게 핵심이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왜 친구한테 안 했지? 왜 누나한테 안 했지? 왜 하필 형한테? 이 질문이 자기 패턴을 직면하게 만드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물론 그가 이 질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요, 형이 생각나서요"라고 대답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씨앗은 심어진다. "왜 나한테?"라는 질문이 그의 머릿속에 남는다. 나중에 다시 전화하려고 할 때, 잠깐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 "왜 나는 이 사람한테 전화하려고 하지?"
알고 선택하는 것의 의미
정신분석은 이런 거다. 5만원짜리 치킨 뒤에 숨은 평생의 결핍을 읽는 것. 밤 10시 전화 한 통에서 한 인간의 관계 패턴 전체를 보는 것. 그리고 내가 그 패턴의 어디에 서 있는지 직시하는 것.
이 동생의 경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 과거 경제적 실패라는 수치심, 누나의 통제라는 현재의 억압이 겹쳐 있다. 그가 밤 10시에 나한테 전화한 건, 이 모든 것이 응축된 행위다. 어머니의 허락 기능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는 것. 누나의 통제를 우회하는 것. 과거의 수치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무의식은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누나의 경우, 어머니를 잃은 애도 과정에서 동생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있을 수 있다. 그녀의 불안이 동생에 대한 통제로 나타나고 있다. 본인으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선의가 동생의 자율성을 더 약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누나 자신도 과거에 통제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통제당한 사람이 통제하는 사람이 되는 순환.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무의식 속에 어떤 자리로 배치되어 있다. 부모의 자리, 연인의 자리, 친구의 자리, 구원자의 자리. 그 배치를 알면 관계가 보인다. 그 배치를 모르면 끌려다닌다. 배치당한 대로 행동한다. 상대방이 원하는 역할을 그대로 수행한다.
5만원을 빌려주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무의식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의 무의식도 읽었기 때문이다. 나도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원자가 되고 싶었다. 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만나서 5만원이 오간 것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알고 선택하는 것과 모르고 끌려다니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이다. 다음에 그가 전화하면,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또 허락해줄 것인가, 아니면 질문을 던질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제는 알고 하는 것이다. 그게 다르다. 무의식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읽고 선택하는 것. 이것이 정신분석이 일상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거창한 치료실이 필요 없다. 밤 10시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읽어내는 눈이다.
참고문헌:
장 다비드 나지오/ 임말희 역(2025). 『다시 살아난 아기 클라라』. 눈하우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덕하 역(2021). 『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