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회사 동생 C와 짜글이 찌개를 먹었다. 맥주도 마셨다. 저번에 2인분이 부족했으니 이번엔 3인분을 시켰다. 내 돈으로 계산할 거니까. 그런데 동생이 고기를 너무 많이 건져 먹는다. 내 몫이 줄어든다. 그래서 잔소리를 했다.
"저번에도 이렇게 먹어서 고기가 부족했잖아."
동생이 화를 낸다.
그리고 대화가 흘러갔다. 내가 퇴직 후 일 년 반 만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책도 냈고, 사업자도 내고, 플랫폼에도 입점했다고. 씨앗을 뿌렸다고.
동생이 말한다. "형은 준비도 안 한 상태에서 퇴직하면 안 돼요."
내가 일궈낸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이 상했다.
나도 동생에게 조언을 했다. 15킬로가 넘는 출퇴근 길을 자전거로 다니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운동은 따로 하라고.
동생이 항변한다. "이것도 운동이에요."
나도 맞선다. "그건 운동이 아니야. 위험한 거야."
찌개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뭔가를 던졌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둘 다 화가 났다.
그런데 내가 도대체 뭘 투사한 걸까?
고기를 건져 먹는 손이 건드린 것
표면만 보면 단순하다. 찌개에서 고기를 많이 건져 먹는 동생에게 불만을 표현한 것이다. 공평하지 않다는 감정이다. 내 돈으로 샀는데, 내가 먹을 게 줄어든다는 억울함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절대로.
잔소리의 내용을 보라. "저번에도 이렇게 먹어서 고기가 부족했잖아." 과거를 끌어온다. 지금 이 순간의 불만이 아니라, 축적된 원망이다.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다는 것. 반복되는 패턴에 대한 분노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저번에 고기가 부족했던 게 정말 동생 때문이었을까?
2인분이 적었던 건 아닐까? 그런데 나는 확신에 차서 동생을 지목했다. "네가 그렇게 먹어서 부족했다"고.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투사라고 부른다. 내 안의 불만족을, 내 안의 결핍감을, 외부의 누군가에게 돌리는 것이다.
김형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투사란 내면 깊숙이 억압해놓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감정들이 외부로 전달되는 방식이라고(김형경, 2017: 145). 표현된 적 없는 감정이 은밀하게 타인에게 투영된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었을까?
인정받지 못한 자의 분노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나는 퇴직 후의 성과를 말했다. 책 출간, 사업자 등록, 홈페이지 운영, 플랫폼 입점. 일 년 반 동안 혼자 버텼고, 이제 뭔가 시작되고 있다고. 씨앗을 뿌렸다고.
동생의 반응은 냉담했다. "형은 준비도 안 한 상태에서 퇴직하면 안 돼요."
이 한마디가 나를 찔렀다. 내가 이룬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이 상했다.
여기서 핵심이 드러난다. 나는 인정을 원했다. 동생에게 내 성과를 인정받고 싶었다. 고생했다, 잘했다, 대단하다.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평가절하였다.
이 상처가 대화 전체를 물들였다.
찌개를 먹기 전부터, 나는 이미 '인정받고 싶은 사람'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돈으로 3인분을 시킨 것도 그 연장선이다. 저번에 부족했으니 이번엔 내가 넉넉하게 살게. 나는 베푸는 사람이다. 형다운 형이다. 그러니 나를 인정해라.
그런데 동생은 고기만 열심히 건져 먹는다. 내 배려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 났다.
김형경의 말을 빌리면, 우월한 자리에서 타인을 심판하는 행위는 본인의 수치심과 죄의식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것이다(김형경, 2017: 146). 어렵게 존재 증명을 해야 했던 자신의 불안감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바로 이거다.
나는 존재 증명이 필요했다. 퇴직 후 일 년 반, 혼자 버텼다. 우울증도 겪었다. 후회도 했다. 그리고 겨우 뭔가를 시작했다. 그 고통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형,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동생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기를 건져 먹었다. 그래서 나는 폭발했다.
고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인정이 문제였다.
형의 자리에서 잔소리를 쏟아내다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나는 동생에게 자전거 출퇴근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15킬로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운동은 따로 하라고. 레저로 타려면 퇴근 후에 하라고.
동생이 항변한다. "이것도 운동이에요."
나는 받아치다. "그건 운동이 아니야. 위험한 거야."
표면적으로는 걱정이다. 동생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형의 마음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다른 것이 있다.
동생은 나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말을 무시했다. 내가 형인데, 인생 경험이 더 많은데, 말해주는 건데. 왜 안 들어?
여기서 나는 '형'의 자리에 서려고 했다. 권위 있는 자, 가르치는 자, 판단하는 자의 자리. 그런데 동생은 그 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김형경은 잔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잔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쏟아낸다고(김형경, 2017: 145). 양육자가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채 자녀에게 쏟아내는 감정들을 자녀는 고스란히 자기의 일부로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어디서 이 잔소리를 배웠을까?
누군가 나에게 "준비도 안 하고 뭘 하냐"고 말했을 것이다. "그게 뭐가 대단하냐"고 평가절하했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내 안에 살아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동생을 향해 튀어나왔다.
"네 방식은 틀렸어. 내 말대로 해."
이것이 잔소리의 정체다. 과거에 내가 당한 것을, 지금 내가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거울: 서로를 비추다
이제 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동생은 왜 화를 냈을까?
"저번에도 이렇게 먹어서 고기가 부족했잖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동생은 뭘 느꼈을까? 아마 이랬을 것이다. 형이 나를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본다. 형 앞에서 마음 편히 밥도 못 먹겠다. 형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동생도 인정을 원했다.
동생은 나의 퇴직 이야기에 "준비도 안 하고 퇴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건 비난일까, 걱정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동생 나름대로 형을 걱정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 걱정이 비난처럼 들렸다. 왜? 나는 이미 '인정받고 싶은 사람'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나는 동생에게 나의 '인정받지 못한 상처'를 투사했다. 동생도 나에게 무언가를 투사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오갔다. 둘 다 상처받았다. 둘 다 화가 났다.
김형경은 이런 현상을 '감정의 전염'이라고 부른다. 세밀하게 느끼든, 둔감하게 넘어가든 우리는 늘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고(김형경, 2017: 147). 가족 내에서는 그런 작용이 한결 정직하게 일어난다고.
찌개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전염되었다. 상처가 상처를 불렀다. 방어가 방어를 낳았다.
내가 투사한 것의 정체
이제 핵심 질문으로 돌아가자. 나는 고기를 많이 먹는 동생에게 도대체 뭘 투사했을까?
첫째, 결핍감이다.
퇴직 후 일 년 반, 나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돈도, 안정도, 인정도. 그 결핍감이 찌개 속 고기에 투영되었다. 고기가 줄어드는 것이 곧 내 몫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3인분이 충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결핍이 렌즈가 되어 세상을 왜곡한 것이다.
둘째, 분노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가 있었다. 일 년 반 동안 혼자 버텼는데, 누구도 "수고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 분노가 동생을 향해 튀어나왔다. "왜 나를 인정하지 않아?"가 "왜 고기만 먹어?"로 변형된 것이다.
셋째, 불안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 걸까? 씨앗을 뿌렸다고 했지만, 정말 싹이 날까? 불안하다. 그 불안을 동생에게 투사했다. "너도 위험해. 자전거 타지 마." 내가 불안하니까, 동생도
불안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넷째, 잔소리의 세습이다.
누군가 나에게 했던 잔소리가 내 안에 살아 있다. "준비도 안 하고", "그게 뭐가 대단해", "네 방식은 틀렸어". 이 목소리들이 내 입을 빌려 동생에게 쏟아졌다. 내가 당한 것을 내가 되풀이하고 있다. 예외가 없다.
투사의 비극: 상처는 전염된다
투사의 가장 큰 비극은 이것이다. 내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내 성과를 말했다. 그런데 기대한 반응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났다. 그 화가 잔소리로 나왔다. 동생은 상처받았다. 동생도 화를 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상처받았다.
처음에 내가 원한 건 뭐였을까? 인정. 따뜻한 말 한마디. "형, 수고했어요." 그런데 내가 한 건? 비난. "왜 고기만 먹어?" "자전거 타지 마."
원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했다. 이것이 무의식의 작동 방식이다. 원하는 것을
직접 요청하지 못하고, 빙빙 돌아서 엉뚱한 곳에 화를 낸다.
김형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표현되지 않는, 은밀한 부정적 감정을 물려받은 자녀는
탈출구를 찾기 어렵다고(김형경, 2017: 146). 그 자녀 역시 부모를 이상화하면서 자기를 비난하는 시선을 갖게 된다고.
나는 동생에게 무언가를 물려주고 있었다. 내 불안을, 내 분노를, 내 결핍감을. 은밀하게, 찌개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알아차림: 거울을 들여다보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분석이 아니다. 변명도 아니다. 알아차림이다.
내가 뭘 느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였는지. 이것을 언어로 만드는 작업이다.
김형경은 자기 분석 노트에 이렇게 메모했다고 한다. "누구든 마주 앉으면 처음 15분 내지 20분 동안 내면의 역전이 감정부터 점검하기. 상대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도록 경계 지키기"(김형경, 2020: 187).
나는 동생과 마주 앉았을 때 내 감정을 점검하지 못했다. 이미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휩싸였다. 동생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고, 그 상처가 공격으로 튀어나왔다.
"마음은 다만 거울일 뿐"이라고 김형경은 중얼거렸다고 한다(김형경, 2020: 187).
내 마음이 동생을 비췄다. 동생의 마음도 나를 비췄다. 그 거울에 비친 건 서로의 모습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찌개 한 그릇은 이미 비워졌다. 맥주잔도 비었다. 동생과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돌이킬 수 없다. 그 자리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음에는 다를 수 있다.
다음에 누군가와 마주 앉으면, 먼저 내 마음을 점검하겠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상처받고 있는지. 그것을 먼저 알아차리겠다.
그리고 인정을 원한다면, 직접 요청하겠다. "나 요즘 힘들었어. 잘하고 있는 것 같아?"라고 물어보겠다. 빙빙 돌리지 않겠다. 고기 타령 하지 않겠다.
김형경의 말처럼, 역전이를 행동화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김형경, 2020: 187). 상대에게서 건너오는 감정에 휩싸여 그대로 반응하지 않는 것. 내면에 분노가 많은 사람에게 반응하여 목소리 높이지 않는 것.
쉽지 않다. 알면서도 당한다. 그래도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나가며
찌개 한 그릇이 이토록 많은 것을 담고 있을 줄이야.
고기 몇 점에 나의 결핍감이, 분노가, 불안이, 오래된 잔소리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동생의 항변에는 동생의 상처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던지고, 상처를 받았다.
그게 관계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니까. 내 안의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상대에게 투사되고, 상대의 것들이 나에게 전염된다.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알아차릴 수는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정말
화난 게 고기 때문인지.
다음에 찌개를 먹을 때는 고기를 세지 않겠다. 대신 내 마음을 세겠다.
그게 내가 투사한 것의 정체였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뿐이었다.
참고문헌
김형경(2017). 『소중한 경험』. 서울: 사람풍경.
김형경(2020). 『만가지 행동』. 서울: 사람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