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아버지를 닮은 남자와 결혼한다. 이것이 상식이다. 프로이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딸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모델로 배우자를 선택한다고.
틀렸다.
정신분석가 장 다비드 나지오는 수십 년의 임상 경험을 통해 정반대의 패턴을 발견했다. 여자가 배우자를 고를 때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정신분석가인 저의 경험상, 여성들은 남편을 고를 때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이 훨씬 더 커요. 여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모델로 남자를 고른다는 통상의 관념과는 반대죠"(나지오, 2025:80).
나는 이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담실에서 수없이 확인한 사실이다. 겉으로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은데, 속을 들여다보면 어머니다. 여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와의 관계를 배우자에게서 재현한다.
이 역학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인물이 있다. 마리아 칼라스다.
칼라스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가수다. 1923년 뉴욕에서 태어나 1977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프라노로서 그녀의 목소리는 전설이 되었다.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여왕이었고, 전 세계 오페라 무대를 지배했다. 오늘날로 치면 최정상급 팝스타와 할리우드 배우를 합쳐놓은 것 같은 명성을 누렸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스캔들로 타블로이드를 장식하기도 했다. 예술과 스캔들, 천재성과 비극이 뒤엉킨 20세기의 아이콘이었다.
그녀의 비범한 운명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어머니다.
칼라스의 어머니 이반젤리아는 군인의 딸이었다. 엄격했고, 지배적이었고, 음악에 열정적이었다. 딸에게 공포로 음악을 가르쳤다. 일과 훈련에 대한 취향을 물려줬다. 칼라스는 노력 없이도 되는 신동이 아니었다. 같은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자녀에게 성공의 의지를 불어넣은 부모 없이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버지는 집에 없는 때가 많았고 음악에도 거의 관심이 없었다. 성악에 입문하기 위해 마리아는 어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반젤리아는 미래에 거장이 될 딸의 첫 번째 스승이 되었다. 14세의 마리아를 데리고 미국에서 아테네로 건너가 저명한 스페인계 소프라노 엘비라 데 이달고에게 사사받게 했다. 강단이 대단했다. 이런 어머니가 없었다면 라 칼라스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녀의 사이는 시끄러워진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부모에게 종종 배은망덕하게 구는데, 자기한테 잘해준 부모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자녀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컸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전수해준 어머니에게, 마리아가 그랬다.
22세에 그리스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후 모녀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이반젤리아는 딸의 배은망덕함에 상처를 입고 쓸쓸히 말했다. "내가 라 칼라스를 만들었건만, 그녀는 가차 없이 날 버리네." 칼라스도 할 말이 있었다. 엄마가 공포로 자신을 길렀다고, 사랑하는 아빠를 경멸하면서 자신을 양육했다고 원망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학이 나타난다. 흔히 여자 청소년은 엄격하고 간섭하고 지배적인 어머니보다는, 바람둥이일지언정 온유하고 간섭 없고 소극적인 아버지에게 더 애착한다. 이런 딸은 아버지에게는 다정하게 살피는 관대한 사랑을 보이는 반면, 어머니에게는 끈질기게 원한을 품는다. 칼라스가 정확히 그랬다.
그렇다면 칼라스는 사랑하는 아버지 같은 남자와 결혼했을까?
아니다.
겉은 아빠, 속은 엄마
칼라스가 선택한 남자들을 보라. 26세 연상의 남편 바티스타 메네기니. 그녀의 커리어를 20년간 지휘한 극장주였다. 마에스트로 툴리오 세라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 스승. 위대한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그녀를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 입성시킨 인물.
모두 나이 많은 남성들이다. 모두 그녀를 크게 도와준 멘토들이다. 겉으로 보면 인자한 아버지 같다. 하지만 나지오의 분석은 날카롭다.
"마리아는 그녀를 크게 도와준 모든 멘토들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지만, 그들은 모두 어머니 같은 인물이었어요. 그래요! 어머니의 화신들이었죠. 그녀의 선생이자 가이드였던 그 유력한 남성들은 그녀가 사랑한 아버지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그녀의 첫 번째 스승인 어머니, 이반젤리아를 대신한 인물들이었어요"(나지오, 2025:80).
나지오는 이것을 일반화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여자가 배우자를 고르면 속은 엄마, 겉은 아빠인 것을 볼 수 있어요. 마치 그 배우자가 본질적으로 엄마와의 갈등적이고 격한 관계에 영향을 받아 선택되었고, 부차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따스한 애정에 영향을 받아 선택된 것처럼 보이죠"(나지오, 2025:80-81).
칼라스에게 메네기니, 세라핀, 토스카니니는 겉으로 인자한 아버지들이지만 속으론 까탈스런 엄마들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을 넘어서려는 맹렬한 의지를 불러일으킨 까탈스러운 엄마들.
미움도 결속이다
왜 그랬을까. 왜 미워하는 어머니를 닮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무의식의 논리를 본다. 의식적으로 미워한다고 해서 무의식적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된다. 미움도 집착이다. 원한도 결속이다.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 대상에 더 깊이 묶인다. 의식에서 밀어낼수록 무의식에서 강해진다.
칼라스에게 어머니는 성공의 원천이었다. 어머니의 엄격함, 어머니의 요구, 어머니의 기준이 그녀를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로 만들었다. 그녀의 정체성은 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 형성되었다. 어머니를 떠나도, 어머니를 미워해도, 어머니의 방식은 이미 그녀 안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가 남자를 선택할 때, 그녀의 무의식은 자신을 밀어붙여 성장시킬 사람을 찾았다. 어머니처럼.
이것은 칼라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담실에서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해서 본다. 엄마가 싫어서 엄마와 정반대 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말하는 여자들. 그런데 결혼 생활이 깊어질수록 남편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고 호소한다. 처음에는 달랐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엄마랑 똑같다고.
착각이다. 처음부터 같았다. 다만 보지 못했을 뿐이다. 무의식은 처음부터 어머니를 선택했다.
한 내담자가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어머니, 사사건건 간섭하는 어머니,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어머니. 그래서 결혼할 때 의식적으로 어머니와 다른 남자를 골랐다. 과묵하고, 간섭하지 않고,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남자.
결혼 5년 후 그녀가 상담실에 왔다. 남편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대화가 없다고. 자신이 뭘 해도 반응이 없다고. 그녀는 남편의 무관심에 분노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녀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관심이었다.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자신의 일에 개입하고, 자신을 신경 쓰는 것. 결국 어머니가 했던 그것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간섭이 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의식은 달랐다. 무의식은 그 간섭을 관심으로 해석했다. 간섭받는 것이 익숙했고, 그 익숙함이 안전감이었다. 간섭하지 않는 남자를 선택했을 때, 의식은 만족했지만 무의식은 불안했다. 그래서 무의식은 남편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이 그 역할을 하지 않자, 분노했다.
이것이 무의식의 교묘함이다. 의식의 선택을 무의식이 뒤집는다. 어머니와 다른 사람을 골랐는데, 결국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현하게 된다. 상대방이 어머니를 닮아서가 아니다. 내가 상대방을 어머니 자리에 놓기 때문이다.
칼라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처음부터 어머니를 닮은 남자들을 선택했다. 무의식이 노골적으로 작동했다. 그녀에게는 까탈스럽고 요구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자신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위대해질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래서 그녀는 메네기니를 선택했다. 20년간 그녀의 커리어를 지휘한 남편.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매니저였다. 그녀의 일정을 관리하고, 그녀의 계약을 협상하고, 그녀의 공연을 기획했다. 그녀를 돌보면서 동시에 통제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리고 오나시스가 나타났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 늘씬해지고 우아해진 34세의 칼라스는 이 남자와 육체적 쾌락을 발견했다. 메네기니가 첫 사랑이었다면, 오나시스는 첫 애인이었다. 남편과는 안전한 사랑을, 애인과는 성적 쾌감을 경험했다.
하지만 오나시스도 결국 어머니의 변형이었을까? 나지오는 이것을 다른 유형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오나시스와의 관계에서 칼라스는 새로운 몸을 발견했다. 목소리에 동원되어 있던 온몸이 애인의 어루만짐 아래에서 떨리는 새로운 감각을 알게 되었다. 욕망하고 욕망받는 기쁨에 몰입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두 애인 사이에서 조율해야 했다. 가장 신실한 애인인 자기 목소리와 덜 충직한 애인인 오나시스 사이에서. 오나시스가 칼라스의 삶에서 급반전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아프게 했어도 목소리를 잃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의 목소리만이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이었다.
생애 끝 무렵, 53세의 칼라스가 뚫어지라 보았던 것은 오나시스와의 추억 사진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공연 영상들이었다. 그녀는 슬픔으로 죽어갔다. 애인에게 버려져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가장 소중했던 목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심어준 그 열망, 완벽한 목소리에 대한 집착, 그것이 결국 그녀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남자들은 왔다 갔다. 하지만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와 함께했다. 어머니가 길러준 그 목소리.
반복을 자각할 때 선택이 생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첫째, 배우자 선택이 의식적 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상대를 평가해서 결혼한다고 믿는다. 조건을 따지고, 성격을 파악하고, 미래를 계획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의식적 판단 아래에서 무의식이 작동한다. 무의식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상대를 선택한다. 그 기준은 대개 어린 시절 형성된 관계 패턴이다.
둘째, 미워하는 대상에게서 벗어나려면 미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미움은 연결이다. 원한은 결속이다. 어머니가 싫어서 어머니와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고 믿는 순간, 당신은 여전히 어머니에게 묶여 있다. 어머니의 반대가 아니라 어머니와 무관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셋째, 반복은 미완의 과제를 완수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것을 어머니를 닮은 사람에게서 받으려 한다. 어머니에게서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어머니를 닮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 한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믿으면서.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래서 같은 유형의 사람을 계속 선택한다. 그리고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
넷째, 반복을 자각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칼라스는 자신이 왜 그런 남자들을 선택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자각 없이는 변화도 없다. 내가 왜 이런 사람에게 끌리는지, 왜 같은 유형의 관계를 반복하는지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첫걸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반복이 반드시 나쁜가?
칼라스의 경우를 보라. 그녀가 어머니를 닮은 남자들을 선택한 것이 그녀를 불행하게만 만들었는가? 아니다. 그 선택이 그녀를 위대하게 만들기도 했다. 까탈스럽고 요구 많은 멘토들이 그녀를 밀어붙였고, 그녀는 그 압박 속에서 성장했다. 어머니와의 갈등적 관계가 그녀에게 맹렬한 의지를 심어주었고, 그 의지가 그녀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문제는 반복 자체가 아니다. 반복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할 때가 문제다. 자신도 모르게 같은 선택을 반복할 때. 왜 내 인생이 이 모양인지 모를 때.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끌려다닐 때.
반복을 자각하면 선택이 생긴다. 이 패턴을 계속할 것인가, 바꿀 것인가. 칼라스처럼 그 패턴 속에서 위대해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자각 없이는 선택도 없다. 그냥 끌려갈 뿐이다.
당신의 배우자는 누구를 닮았는가.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겉모습 말고, 관계의 역동을 보라. 당신이 그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들. 그 사람과의 갈등 패턴.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것들. 그것이 누구와의 관계를 닮았는가.
대답이 어머니라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의식에서는 벗어났다고 믿지만 무의식에서는 여전히 묶여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다. 당장 관계가 바뀌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해는 자유의 시작이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다니는 것과, 그 힘을 알면서 선택하는 것은 다르다.
칼라스는 평범한 여성이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인생 말기에 그녀는 고백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집이랑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평범한 여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운명은 그렇지가 않았죠." 하지만 나지오의 말처럼, 마리아 칼라스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포기하고 비범한 여성의 삶을 이루었다.
그 비범함의 원천은 어머니였다. 그녀가 미워했던, 그러나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어머니. 그녀가 선택한 모든 남자들 속에 숨어 있던 어머니. 그녀의 목소리 속에 살아 있던 어머니.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아이다. 아버지의 아이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어머니의 아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선택이 시작된다.
참고문헌: 장 다비드 나지오/ 임말희 역(2025). 『다시 살아난 아기 클라라』. 눈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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