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도 빰이 석 대: 초자아의 폭정과 죄의 역설

by 홍종민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왜 나쁜 짓을 하는가?

"나쁜 사람이니까요." 대부분 이렇게 답한다.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프로이트는 충격적인 발견을 했다. 죄를 지어서 죄의식이 생기는 게 아니다. 죄의식을 완화시키기 위해 죄를 짓는다. 순서가 뒤집혔다. 인과관계가 전복됐다. 우리가 알던 모든 상식이 무너진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천천히 따라와 보라.


먼저 죄의식이 있다

한 30대 남성이 있었다. 그는 늘 불안했다. 이유를 몰랐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뭔가 잘못한 것 같았다. 막연한 죄책감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기분이었다.

어느 날 그는 회사 돈을 횡령했다. 소액이었다. 들킬 게 뻔했다. 실제로 들켰다.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편해졌다. 죄책감이 사라졌다.

왜?

이제 그에게는 죄가 있다. 진짜 죄가. 막연했던 죄의식에 이름이 붙었다. 형태가 생겼다. 처벌도 받았다. 정산이 끝났다. 그래서 편해진 거다.

정신분석가 맹정현은 이렇게 설명한다. "나쁜 사람이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처벌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죠. 요컨대 죄를 지어서 죄의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을 완화시키기 위해 죄를 짓는 겁니다"(맹정현, 2022: 270).

처벌에 대한 욕구. 이 말이 핵심이다. 우리 안에는 처벌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징벌을 갈구하는 마음이 있다.

미친 소리 같은가? 그렇지 않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다.


처벌을 갈구하는 마음

어릴 때를 떠올려 보라. 부모에게 혼나기 전, 그 불안한 시간. 뭔가 잘못했다. 들킬 것 같다. 심장이 뛴다. 땀이 난다. 언제 혼날지 모른다. 그 기다림이 가장 괴로웠다.

차라리 빨리 혼나고 싶었다. 매를 맞고 싶었다. 끝내고 싶었다.

혼나고 나면 어땠나? 울긴 울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무거웠던 짐이 내려갔다. 용서받은 느낌이었다.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처벌에 대한 욕구다. 우리는 처벌을 통해 해방된다. 벌을 받음으로써 죄에서 풀려난다. 이건 거래다. 고통을 지불하고 마음의 평화를 산다.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거다. 부모는 더 이상 없다. 혼내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죄의식은 여전히 있다. 이유 없이 밀려온다. 형체 없이 달라붙는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는다. 처벌받을 명분을 만든다.


초자아라는 폭군

자아 안에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초자아라고 부른다. 이 녀석은 감시한다. 끊임없이 감시한다. 당신이 뭘 하든 지켜본다. 당신이 뭘 생각하든 알고 있다.

초자아는 내면의 판사다. 검사이기도 하다. 때로는 사형집행인이기도 하다. 이 녀석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잠을 자도, 꿈을 꿔도, 초자아는 깨어 있다.

자아 이상은 응원한다. "넌 잘할 수 있어." "넌 특별해." 하지만 초자아는 다르다. 초자아는 비난한다. "왜 그것밖에 못 해?" "넌 부족해." 쉬지 않고 비난한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못하면 비난하는 거니까.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초자아는 잘해도 비난한다.


잘해도 빰이 석 대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잘해도 빰이 석 대."

이 속담이 초자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초자아는 내가 잘해도 나를 비난하고, 내가 못해도 나를 비난한다. 자아가 못하면 당연히 "왜 그렇게 못났니?"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자아가 잘하면? 오히려 "나랑 맞먹으려고?"라고 하면서 비난한다.

맹정현은 분명히 말한다. "초자아와의 관계는 꼼짝없이 갇히게 되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죠"(맹정현, 2022: 282).

이건 미친 짓이다. 어떻게 해도 비난받는다. 못해도 맞고, 잘해도 맞는다. 탈출구가 없다. 막다른 골목이다.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감시하면서 잘해도 빰을 때리고 못해도 빰을 때리는 것. 그게 바로 초자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초자아의 기원

초자아는 어디서 왔나. 부모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의 금지 명령이다. "하지 마." "그러면 안 돼." "착한 아이는 그러지 않아." 이런 말들이 쌓이고 쌓여 초자아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부모가 아무리 엄격해도, 초자아는 더 엄격하다. 부모가 아무리 가혹해도, 초자아는 더 가혹하다. 왜?

아이는 부모의 말을 그대로 내면화하지 않는다. 과장해서 내면화한다. 증폭시켜서 내면화한다. 부모가 "조심해"라고 하면, 아이의 초자아는 "절대 실수하면 안 돼"라고 명령한다. 부모가 "착하게 굴어"라고 하면, 아이의 초자아는 "완벽하게 착해야 해"라고 요구한다.

더 무서운 건 이거다. 착한 부모 밑에서도 가혹한 초자아가 생길 수 있다. 너그러운 부모 밑에서도 잔인한 초자아가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는 부모의 실제 모습만 내면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원하는 바를 내면화한다. 부모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읽어낸다. 부모의 욕망을 내면화한다.

그래서 초자아는 부모보다 더 무섭다. 원본보다 복사본이 더 선명하다.


승리할 수 없는 게임

한 40대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직장에서 인정받았다. 가정도 잘 꾸렸다. 아이들도 잘 키웠다. 남들이 보기엔 성공한 삶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늘 불안했다. 성취해도 기쁘지 않았다. 칭찬받아도 뿌듯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더 잘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의 성공이 우연인 것 같았다. 곧 들통날 것 같았다.

이게 초자아의 작동 방식이다. 당신이 잘하면, 초자아는 기준을 올린다. 더 잘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당신이 더 잘하면, 초자아는 기준을 또 올린다. 끝이 없다.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

잘해도 빰이 석 대. 못해도 빰이 석 대. 항상 부족하다. 항상 모자란다. 항상 죄인이다.


죄의식의 선행

이제 퍼즐이 맞춰진다.

초자아는 끊임없이 비난한다. 당신이 뭘 해도 비난한다. 그래서 당신은 늘 죄의식을 느낀다. 이유 없이 죄책감에 시달린다. 막연하게 잘못한 것 같다.

이 죄의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완벽해지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건 실패한다. 아까 말했다. 잘해도 빰이 석 대. 더 잘해봤자 기준만 올라간다.

둘째, 실제로 죄를 짓는다. 처벌받을 명분을 만든다. 그리고 처벌받는다. 그러면 죄의식이 해소된다. 일시적으로나마 편해진다.

역설적이다. 죄를 지어야 죄에서 풀려난다. 처벌받아야 죄의식에서 벗어난다.


반복되는 자기 파괴

이걸 알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잘나가다가 스스로 망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행복할 때 불안해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성공 직전에 포기하는가.

처벌에 대한 욕구다.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성공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잘되면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망친다. 스스로 실패한다. 스스로 처벌을 자초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 초자아가 조용해진다. 잠시나마.

한 50대 남성을 만났다. 그는 사업이 잘될 때마다 바람을 피웠다. 들킬 위험이 큰 상대와. 들킬 방식으로. 결국 들켰다. 가정이 파탄났다. 사업도 기울었다.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나는 안다. 그는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성공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초자아가 비난했다. "네가 뭐라고." "네 주제에." "곧 들통날 거야." 그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다. 차라리 진짜 죄를 짓고 진짜 처벌을 받는 게 나았다. 막연한 죄의식보다 구체적인 처벌이 나았다.


멜랑콜리의 자기비난

우울증 환자를 보면 이게 극명해진다.

우울증 환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난한다. "나는 못났다." "나는 쓸모없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주변에서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 오히려 반박한다. "당신은 몰라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못난 사람이에요."

위로가 통하지 않는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다. "그 상황이었다면 누구나 그랬을 거예요"라고 해도 먹히지 않는다. 환자는 자신이 특별히 나쁘다고 확신한다. 누구보다 못났다고 믿는다.

이게 무슨 뜻인가. 우울증 환자의 자기비난에는 진실이 있다는 거다.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 모두에게는 비난받을 구석이 있다.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 감추고 싶은 면이 있다. 우울증 환자는 그걸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우울증 환자의 자기비난은 사실 초자아의 공격이다. 내면의 폭군이 자아를 짓밟는 거다. 환자는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초자아에게 공격당하는 거다.


원망 어린 슬픔

우울증 환자는 슬프기만 한 게 아니다. 화가 나 있다. 분노가 있다. 나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우울증 환자의 슬픔이 해를 입힌 자에 대한 격노, 해를 가하도록 놔둔 자신에 대한 격노로 물들어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죠"(나지오, 2025: 152).

그런데 그 분노를 바깥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으로 돌린다. 자신을 공격한다. 자신을 비난한다. 자신을 처벌한다.

이것도 초자아의 작동이다. 초자아는 자아를 공격한다. 쉬지 않고 공격한다. 자아는 무너진다. 쪼그라든다. 그게 우울증이다.


잘못된 게임에서 벗어나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이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잘해도 빰이 석 대라는 걸 알아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초자아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건 승리할 수 없는 게임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둘째, 초자아의 목소리를 알아차려야 한다. "넌 부족해." "넌 자격이 없어." "넌 잘못했어." 이런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게 내 목소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건 내면화된 타자의 목소리다. 부모의 목소리다. 사회의 목소리다. 내 목소리가 아니다.

셋째, 게임에서 내려와야 한다. 초자아의 비난에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더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야 한다. 죄를 지어서 처벌받으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그냥 그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리고, 놓아주어야 한다.


죄의식 너머

우리 마음은 거울이다. 바깥의 것을 비춘다. 초자아의 비난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건너온 거다. 부모에게서. 사회에게서. 문화에게서.

거울은 비추기만 한다. 판단하지 않는다. 좋다 나쁘다 말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비춘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초자아의 비난을 듣되, 믿지 않을 수 있다. 죄의식을 느끼되, 거기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거울처럼 비추고, 거울처럼 놓아줄 수 있다.

잘해도 빰이 석 대라는 걸 안다면, 더 이상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못해도 빰이 석 대라는 걸 안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맞을 거다. 그렇다면 맞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이게 진짜 자유다. 초자아의 폭정에서 벗어난 자유다. 승리할 수 없는 게임에서 내려온 자유다.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슨 죄의식을 안고 사는가?

이유 없이 불안한가? 막연하게 잘못한 것 같은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가? 들킬 것 같은가?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초자아가 당신을 괴롭히는 거다. 내면의 폭군이 당신을 감시하는 거다.

당신은 죄를 지어야 편해지는가? 처벌받아야 마음이 놓이는가? 스스로 망쳐야 안심이 되는가?

그건 해결책이 아니다. 죄의식을 완화시키기 위해 죄를 짓는 건, 결국 또 다른 죄의식을 낳는다. 끝없는 악순환이다.

잘해도 빰이 석 대라는 걸 기억하라. 못해도 빰이 석 대라는 걸 기억하라. 그렇다면 빰을 맞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어차피 맞을 거다.

그리고 맞더라도, 당신은 괜찮다. 당신은 이미 충분하다. 초자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존재할 자격이 있다. 행복할 자격이 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걸 믿는 게 시작이다.


참고문헌

맹정현(2022). 『프로이트 패러다임』. 위고.

장 다비드 나지오/ 임말희 역(2025). 『다시 살아난 아기 클라라』. 눈출판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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