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과 공감의 차이

by 홍종민

친구가 힘들어한다. 당신은 진심으로 그를 위로하고 싶다. "너무 안됐다. 정말 힘들겠다. 내가 다 속상하네." 이렇게 말하면서 친구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런데 왜일까. 친구의 얼굴이 더 굳어진다. 당신의 위로가 오히려 친구를 더 움츠러들게 만든 것이다.

이게 팩트다. 우리는 위로와 공감을 구분하지 못한다.

당신이 선의로 건넨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동정이었다. 동정은 상대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든다. "안됐다"는 말 속에는 "나는 괜찮은데 너만 불쌍하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상대는 당신의 시선 아래로 내려간다. 당신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상대는 아래에서 동정받는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진짜 공감은 다르다. 공감은 상대와 같은 높이에 서는 것이다. "너 지금 이런 기분이구나" 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을 함께 보는 것이다. 이게 공감이다.


동정은 왜 상처가 되는가

40대 중반 컴퓨터 기술자 래리의 이야기를 보자.(클라크, 2025: 140-142) 그는 여자친구 멜리사와 그녀의 13살 아들 제이슨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불안증이 있는 래리에게 제이슨은 너무 버거운 존재다. 제이슨은 래리를 "패배자 래리"라고 부르고, 래리가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래리가 상담사를 찾아갔다. 첫 번째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힘드시겠어요. 저는 제 아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절대 가만두지 않았어요."

"이런 일을 참으실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문제가 아닌 걸요."

"얼마나 더 참아야 하겠어요? 이미 충분히 오래 참으신 것 같아요."(클라크, 2025: 140-141)

이 상담사는 친절했다. 래리의 편을 들어줬다. 래리가 옳고 제이슨이 틀렸다고 확인해줬다. 그런데 이게 도움이 됐을까?

안 됐다. 예외가 없다.

이 상담사는 래리를 동정했다. "안타깝다"고 했다. "힘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래리가 왜 힘든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래리가 제이슨에게서 무엇을 느끼는지, 이 상황이 래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탐색하지 않았다. 단지 "네가 옳다, 제이슨이 틀렸다, 너는 피해자다"라고 확인해줬을 뿐이다.

이런 위로는 일시적인 안도감을 준다. '내 편이 있구나' 싶어서 잠깐 기분이 나아진다. 그런데 그게 다다. 래리는 여전히 제이슨과 살아야 하고,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더 나쁜 건, 이제 래리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상담사가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나는 충분히 참았어. 더 이상 참을 필요 없어." 이런 생각이 고착된다. 그러면 래리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제이슨을 이해하려고 노력할까? 멜리사와 대화할까? 아니다. 그냥 폭발하거나 떠날 것이다.

동정은 변화를 막는다. 그게 동정의 본질이다.


공감은 질문이다

두 번째 상담사를 보자. 같은 상황에서 이 상담사는 다르게 반응했다.

"함께 살게 된 상황이 모두에게 큰 변화였을 텐데, 제이슨 때문에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느끼시는군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드시나요?"

"제이슨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셨는데, 그런 식으로 상처 주는 반응을 받으셨군요."

"그 말에 완전히 납득이 되지는 않으시는 것 같네요."(클라크, 2025: 141-142)

이 상담사는 래리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네가 옳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래리의 감정을 정확하게 짚어줬다. "너 지금 막막하구나." "너 지금 상처받았구나." "너 지금 멜리사 말에 납득 안 되는구나." 이렇게 확인해줬다.

차이가 보이는가?

첫 번째 상담사는 판단했다. "제이슨이 나쁘다. 너는 피해자다." 이건 동정이다.

두 번째 상담사는 질문했다. "너 지금 어떤 기분이니? 이게 너한테 무슨 의미니?" 이게 공감이다.

공감은 답을 주지 않는다. 공감은 질문을 던진다. 상대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다. 래리가 왜 제이슨 때문에 힘든지, 제이슨의 거부가 래리에게 무엇을 건드리는지, 멜리사의 설명이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런 걸 래리 스스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게 진짜 도움이다. 래리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 나는 제이슨한테 거부당하는 게 무섭구나.' '나는 멜리사가 내 편이 아니라고 느끼는구나.' '나는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구나.' 이런 걸 알게 되면, 래리는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 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왜 동정하는가

내 상담실에도 래리 같은 사람들이 온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한 가지 패턴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공감받고 싶어서 오는데, 정작 자신을 동정해주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동정은 편하다. 동정은 "네가 옳다"고 말해준다. "너는 피해자다. 상대가 나쁘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이런 말은 즉각적인 안도감을 준다. 내가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니까.

반면 공감은 불편하다. 공감은 질문한다. "너 왜 힘들어?" "이게 너한테 무슨 의미야?" "너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이런 질문은 나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안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직장 상사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동정하는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네 상사 정말 최악이다. 그런 사람 밑에서 어떻게 일해? 너무 불쌍하다."

공감하는 친구는 이렇게 묻는다. "네 상사가 뭐라고 했을 때 제일 화났어?"

차이가 보이는가?

동정은 상사를 악당으로 만든다. 나는 피해자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그냥 상사가 바뀌거나 내가 떠날 때까지 참으면 된다.

공감은 나에게 초점을 맞춘다. 내가 왜 화났는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혹시 상사의 말이 내 어떤 상처를 건드린 건 아닌지, 혹시 내가 과민반응한 건 아닌지, 혹시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불편하다. 그런데 이 불편함이 나를 성장시킨다.


동정의 위험성

동정에는 세 가지 위험이 있다.

첫째, 동정은 상대를 고착시킨다. "너는 피해자야"라는 정체성을 고정시킨다. 피해자는 무력하다. 피해자는 자기 인생을 선택할 수 없다. 그냥 당하기만 한다. 동정은 이런 무력감을 강화한다.

내 내담자 중 한 명이 있었다. 30대 여성인데, 남편이 외도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고, 모두가 그녀에게 동정을 보냈다. "너무 불쌍하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런 남편이랑 헤어져라."

이런 반응들이 그녀를 도왔을까? 안 도왔다. 오히려 그녀는 피해자 정체성에 갇혔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나는 피해자야. 남편이 나쁜 거야.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녀는 변하지 못했다. 남편과 헤어지지도, 관계를 회복하지도 못했다. 그냥 피해자로 머물렀다. 동정이 그녀를 거기에 묶어둔 것이다.

둘째, 동정은 관계를 수직적으로 만든다. 동정하는 사람은 위에 있고, 동정받는 사람은 아래에 있다. "나는 괜찮은데 너만 불쌍하다"는 구도다. 이런 관계에서는 진짜 연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주상담을 하면서 나는 이걸 매일 목격한다. 어떤 상담사들은 내담자를 동정한다. "당신 팔자가 기구하네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내담자를 안타까워한다. 그러면 내담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일시적으로 위로받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느낌만 더 강해진다.

반면 공감하는 상담사는 다르다. "당신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느꼈어요?" "그때 당신한테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예요?" 이렇게 묻는다. 이건 내담자를 동등한 주체로 대하는 것이다. 내담자는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셋째, 동정은 해결을 막는다. 동정은 상대의 편을 들어준다. "네가 옳아. 상대가 틀렸어." 이런 식으로 확인해준다. 그러면 문제는 외부에 있게 된다. '상대가 변해야 해. 상황이 바뀌어야 해.' 이런 생각만 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뭔가? 상대의 행동? 아니다. 상황? 아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동정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공감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게 만든다.


공감은 어떻게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공감해야 할까? 나는 거의 20년 동안 이 질문과 씨름했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명리학과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나는 몇 가지 원칙을 발견했다.

첫째, 판단하지 마라. 누가 옳고 그른지 평가하지 마라. 상대가 피해자인지 아닌지 규정하지 마라. 그냥 상대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만 확인하라.

"너 지금 화났구나." "너 지금 서운하구나." "너 지금 무섭구나."

이게 다다. 여기에 "네가 옳아" "상대가 틀렸어" 같은 판단을 덧붙이지 마라. 감정만 확인하라.

둘째, 질문하라. 상대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궁금해하라. 진짜로 궁금해하라. 알고 있는 척하지 마라.

"그때 뭐가 제일 힘들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너한테 그게 무슨 의미야?"

이런 질문들은 상대를 자기 내면으로 안내한다. 상대는 자신의 감정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이게 치유의 시작이다.

셋째, 기다려라. 답을 서두르지 마라. 상대가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라. 침묵을 견뎌라.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못 견딘다. 상대가 잠시 말을 멈추면 바로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조언을 해야 할 것 같다. 위로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게 가장 큰 실수다.

침묵 속에서 생각이 일어난다. 침묵 속에서 깨달음이 온다. 당신이 침묵을 채워버리면, 상대는 자기 생각을 할 기회를 잃는다. 기다려라. 그냥 함께 있어라.


일상에서 만나는 동정의 함정

우리는 매일 동정과 공감 사이에서 선택한다. 친구가 힘들어할 때, 가족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동료가 넋두리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직장 동료가 상사한테 혼났다고 한다. 당신은 뭐라고 말할까?

동정: "너무하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 상사 원래 성격이 더러운 거 알잖아."

공감: "많이 속상했겠다. 어떤 부분에서 제일 화났어?"

친구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운다. 당신은 뭐라고 말할까?

동정: "그 남자 인간 말종이다. 너 같은 여자를 떠나다니. 네가 너무 좋은 거야."

공감: "정말 힘들겠다. 지금 어떤 기분이야?"

자녀가 학교에서 친구한테 따돌림 당했다고 한다. 당신은 뭐라고 말할까?

동정: "그 애들이 너를 괴롭히는 게 잘못이야. 선생님한테 말씀드릴게."

공감: "많이 슬펐겠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엄마한테 얘기해줄래?"

차이가 보이는가?

동정은 즉각적으로 편을 가른다. 누가 나쁘고 누가 피해자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보호하려고 한다. 이건 본능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면 그 고통을 빨리 없애주고 싶다. 그런데 이 본능이 오히려 상대를 약하게 만든다.

공감은 즉각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는다. 상대가 자기 이야기를 할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 안에서 상대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해결책을 찾는다.


공감이 어려운 이유

공감이 좋다는 건 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공감하지 못할까?

첫째, 공감은 시간이 걸린다. 동정은 빠르다. "안됐다" "힘들겠다" "상대가 나쁘다" 이런 말은 즉각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감은 느리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고, 답을 기다려야 한다. 바쁜 현대인에게 이 시간이 없다.

둘째, 공감은 불편하다. 동정은 편하다. "네가 옳아"라고 말하면 끝이다. 그런데 공감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너 왜 그렇게 느꼈어?" "이게 너한테 무슨 의미야?" 이런 질문들은 상대뿐 아니라 나 자신도 불편하게 만든다. 상대의 고통 속에 머물러야 하니까.

셋째, 공감은 기술이다. 동정은 본능이다. 누군가 아파하면 "안됐다"고 느끼는 건 본능이다. 그런데 공감은 학습이 필요하다. 어떻게 질문할지, 어떻게 침묵할지, 어떻게 기다릴지. 이건 배워야 한다.

나도 처음엔 못했다. 명리학을 공부하고 사주상담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담자들을 동정했다. "힘드셨겠어요." "안타깝네요." 이런 말을 하면서 내담자의 편을 들어줬다. 그게 좋은 상담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내담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계속 왔다. 왜일까? 내가 그들을 피해자 위치에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나는 달라졌다. 공감이 뭔지 알게 됐다.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그러자 내담자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도움이었다.


공감의 힘

공감은 상대를 변화시킨다. 어떻게?

공감은 상대를 주체로 만든다. "너는 피해자가 아니야. 너는 선택할 수 있는 주체야."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이게 힘을 준다.

래리를 다시 보자. 첫 번째 상담사는 래리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너는 참을 필요 없어. 제이슨이 나쁜 거야." 이런 말을 들은 래리는 어떻게 행동할까? 아마 제이슨에게 화를 내거나, 멜리사한테 제이슨을 통제하라고 요구하거나, 아예 관계를 포기할 것이다.

두 번째 상담사는 래리를 주체로 만들었다. "너 지금 어떤 기분이야? 이게 너한테 무슨 의미야?" 이런 질문을 받은 래리는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나는 왜 제이슨 때문에 이렇게 힘들까?' '제이슨의 거부가 내 어떤 상처를 건드리는 걸까?' '나는 진짜 뭘 원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을 통해 래리는 깨닫는다. 자신이 제이슨에게서 아버지로서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신이 가족이라는 소속감을 갈망한다는 것을. 자신이 거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런 깨달음이 선택을 가능하게 만든다. 래리는 이제 선택할 수 있다. 제이슨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멜리사와 솔직하게 대화할 수도 있고,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천천히 관계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피해자는 선택할 수 없지만, 주체는 선택할 수 있다.

공감은 또한 상대를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동정은 표면만 본다. "너 힘들구나. 안됐다." 이게 다다. 그런데 공감은 깊이 들어간다. "너 왜 힘들어?" "이게 너한테 무슨 의미야?" 이런 질문들은 표면 아래의 진짜 감정, 진짜 욕구, 진짜 상처를 드러낸다.

내 상담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 한 여성 내담자가 왔다. 남편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남편이 뭐라고 했을 때 제일 무시당한다고 느꼈어요?"

그녀는 구체적인 상황을 말했다. 자기가 직장에서 승진했는데 남편이 "그래?"라고만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순간 어떤 기분이었어요?"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한테 인정받고 싶었어요. 내가 잘했다고, 대단하다고 말해주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남편은 관심이 없었어요."

이게 진짜 문제였다.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나를 무시한다"였지만, 깊이 들어가니 "나는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이 욕구를 인식하자 그녀는 변했다. 남편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유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이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사주상담에서의 공감

내가 명리학과 정신분석을 통합하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전통적인 사주상담은 동정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당신 팔자가 기구하네요." "배우자 운이 약하네요."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이런 말들은 내담자를 피해자로 만든다. '나는 팔자가 나빠서 불행한 거야.' '내 사주가 이래서 어쩔 수 없어.' 이런 생각이 고착된다. 내담자는 무력해진다.

나는 다르게 접근한다. 사주를 보되, 내담자를 피해자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질문한다.

"지금 제일 힘든 게 뭐예요?" "이 상황이 당신한테 무슨 의미예요?"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사주는 도구다. 내담자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도구. 천간은 의식을 보여주고, 지지는 무의식을 보여준다. 육친은 관계 패턴을 보여준다. 이런 정보를 가지고 나는 내담자의 내면을 탐색한다. 그런데 이 탐색을 내담자 스스로 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내담자 사주에 상관이 강하다고 하자. 전통적 상담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권위에 저항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래서 직장생활이 힘들 거예요."

나는 이렇게 묻는다. "직장에서 상사랑 갈등이 있으세요? 어떤 상황에서 제일 힘들어요?"

내담자가 구체적인 상황을 말한다. 상사가 자기 의견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묻는다. "상사가 당신 의견을 무시할 때 어떤 기분이에요?"

내담자는 말한다.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요. 내가 투명인간 같아요."

이게 핵심이다. 상관이 강하다는 사주 정보가 아니라, 내담자가 존중받고 싶다는 욕구. 이 욕구를 인식하면 내담자는 선택할 수 있다. 상사를 바꾸려고 하는 대신, 존중받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자기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고,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사주는 운명이 아니다. 사주는 내담자를 이해하는 렌즈다. 이 렌즈를 통해 내담자의 무의식을 보고, 질문을 던지고, 내담자가 스스로 답을 찾게 돕는다. 이게 내가 하는 명리심리상담이다.


동정을 넘어서

우리는 동정에서 공감으로 넘어가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한국 사회는 동정의 문화다. "불쌍하다" "안됐다" "힘들겠다" 이런 말을 쉽게 한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즉각적으로 편을 가른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한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한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분명히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는 상황들이 있다. 범죄, 학대, 폭력.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갈등을 이런 프레임으로 보는 건 문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부부 갈등, 부모-자녀 갈등, 직장 내 갈등. 이런 상황에서 누가 100% 피해자고 누가 100% 가해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편을 가르려고 한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판단하려고 한다. 이게 동정의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갈등을 고착시킨다.

공감의 프레임은 다르다. "양쪽 다 힘들구나. 너는 왜 힘들고, 저 사람은 왜 힘들까?" 이렇게 접근한다.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한다. 양쪽의 감정과 욕구를 다 들여다본다.

이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특히 자기가 관련된 갈등에서는 더 어렵다. 자기 감정이 북받치니까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제3자가 필요하다. 상담사, 치료사, 멘토. 공감할 수 있는 제3자.

나는 그 제3자가 되려고 한다. 명리심리상담사로서, 내 역할은 내담자의 편을 드는 게 아니다. 내담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담자의 감정을 확인하고, 질문을 던지고, 내담자가 스스로 답을 찾게 돕는 것이다.

이게 진짜 도움이다. 진짜 치유다.


결론: 공감은 선택이다

매일 우리는 선택한다. 동정할 것인가, 공감할 것인가.

누군가 당신에게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안됐다" 할 것인가? "너 왜 힘들어?" 물을 것인가?

전자는 동정이다. 후자는 공감이다.

동정은 쉽다. 빠르다. 그 순간 위로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공감은 어렵다. 느리다. 불편하다. 그런데 진짜 변화를 만든다.

나는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걸 확인했다. 동정받은 사람들은 돌아온다.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공감받은 사람들은 성장한다. 스스로 답을 찾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동정하는 사람? 공감하는 사람?

당신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싶은가? 피해자로 고착시킬 것인가? 주체로 세울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공감은 배울 수 있다. 나도 배웠다. 당신도 배울 수 있다.

판단하지 말고 들어라. 조언하지 말고 질문하라. 동의하지 말고 확인하라.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라.

이게 공감이다.

이게 진짜 위로다.

이게 진짜 도움이다.


참고문헌

클라크, 아서/ 신성만 외 역(2025). 『심리치료를 위한 공감의 기술』. 학지사.


해담 사주 명리 상담 : 네이버 엑스퍼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잘해도 빰이 석 대: 초자아의 폭정과 죄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