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전치

by 홍종민

타인을 위로하는 척 자기를 위로받는 사람들

"선생님 지금 미술관 가서 신선놀음 하실 때가 아니신 것 같은데요 �"

웃는 이모지가 붙어 있다. 농담처럼 보인다. 친근한 조언처럼 들린다.

아니다. 이건 찔림이다.

라벤더는 나를 위로하러 온 게 아니다. 자기를 위로받으러 온 거다. 나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자기 걱정을 말하는 거다. 내 선택을 조언하는 척하면서 자기 선택을 검증받는 거다.

위로는 가면이다. 진짜 욕망은 그 뒤에 숨어 있다.


전치의 구조

대상은 대체된다. 원래 향하던 곳이 막히면 다른 곳으로 간다. 젖가슴이 없으면 손가락을 빤다. 손가락이 없으면 장난감을 빤다. 충동은 원래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뿐이다(맹정현, 2022: 68).

이게 전치다.

라벤더의 욕망을 보자.

원래 욕망: 자기가 위로받고 싶다


전치된 표현: 나를 위로한다


자기에게 향해야 할 위로가 나에게로 옮겨갔다. "나 위로해줘"를 직접 말하지 못하니까 "선생님 위로해드릴게요"로 바꾼 거다.

욕망의 대상이 전치됐다. 자기에서 타인으로.


목적의 전환

충동은 원래 목적이 막히면 다른 목적으로 전환된다. 성적인 충동이 예술로 전환되듯이, 위로받고 싶은 욕망이 위로하는 행위로 전환된다(맹정현, 2022: 163).

라벨더의 경우를 보자.

원래 목적: 위로받기


전환된 목적: 위로하기


받는 것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수동이 능동으로 바뀌었다. 욕망의 방향이 뒤집혔다.

왜 이런 전환이 일어나는가.

"나 위로해줘"는 직접적이다. 약해 보인다. 민망하다. 그래서 뒤집는다. "내가 위로해줄게"로. 이러면 능동적으로 보인다. 강해 보인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인다.

전치는 욕망을 숨기는 가장 흔한 방법이다.

라벤더의 말들

라벤더가 나에게 한 말들을 하나씩 보자.

"직장 다시 들어가시면 안정감 느끼실 거예요."

이건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나에게? 아니다. 라벤더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라벤더도 프리랜서 전향에 실패했다. 임금체불 당했다. 노동청 다녀왔다. 다시 직장을 구해야 한다. 불안하다. 자존심 상한다.

그래서 나에게 말한다. "직장 들어가면 안정감 느끼실 거예요."

이 말을 나에게 하면서 자기가 듣는 거다. "그래, 직장 들어가면 안정감 느낄 수 있어. 괜찮아."

나를 위로하는 형식으로 자기를 설득하고 있다.

"투잡으로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것도 마찬가지다. 라벤더 자신의 고민이다. 당장 전업 프리랜서는 어렵다. 직장 다니면서 부업으로 해야 하나. 그 고민을 나에게 던지면서 자기 답을 찾는 거다.

"결과적으로 잘 되실 거예요."

이건 가장 솔직한 문장이다. 라벤더가 듣고 싶은 말이다. "잘 될 거야. 괜찮을 거야." 나에게 말하면서 자기가 듣는 거다.

모든 위로가 전치되어 있다. 나에게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향해 있다.


대상의 연쇄

모든 대상 뒤에는 원초적 대상이 있다. 지금 빠는 것 뒤에 원래 빨고 싶었던 것이 있다. 지금 위로하는 사람 뒤에 원래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맹정현, 2022: 69).

라벤더가 나를 위로할 때, 그 뒤에는 누가 있는가.

라벤더 자신이다.

라벤더는 나를 위로하면서 자기를 위로하고 있다. 나는 대체 대상이다. 원초적 대상은 라벤더 자신이다.

그런데 왜 자기를 직접 위로하지 못하는가.

자기를 위로하려면 먼저 자기가 힘들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자기가 약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자기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 그래서 전치한다. 타인을 위로하는 형식으로 자기를 위로한다.


찔림의 정체

"선생님 지금 미술관 가서 신선놀음 하실 때가 아니신 것 같은데요 �"

이 문장을 다시 보자.

나는 힘들다고 했다. 수입이 별로라고 했다. 다시 닭장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술관이나 가서 머리나 식혀야겠다"고 했다.

라벤더는 이 말에 반응했다. 웃는 이모지를 붙였지만, 이건 웃는 게 아니다. 찌르는 거다.

왜 찔렀을까.

라벤더도 힘들다. 임금체불 당했다. 노동청 다녀왔다. 무직 상태다. 그런데 나는 미술관 간다고 한다. 힘들다면서 미술관이라니.

전치가 깨지는 순간이다.

라벤더는 나를 위로하면서 자기를 위로받고 있었다. 동병상련을 통해 연대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힘들지. 그러니까 괜찮아."

그런데 내가 미술관 간다고 했다. 힘들다면서 여유를 부린다. 동병상련이 깨진다. 연대가 무너진다.

라벤더의 무의식이 반응한다. "나도 힘든데 당신은 미술관이요? 나는 노동청 다녀오느라 바빴는데?"

"신선놀음 하실 때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이건 조언이 아니다. 항의다. "나랑 같이 힘들어해 줘요. 혼자 편해지지 말아요."

웃는 이모지는 이 항의를 숨기는 포장지다. 농담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다. 하지만 진짜 감정은 이모지 뒤에 있다.


동병상련의 함정

라벤더와 나는 둘 다 힘들다. 그래서 대화가 이어진다. 서로의 처지가 비슷하니까. 서로의 고통이 겹치니까.

그런데 이 대화가 서로를 위로하는가.

아니다. 서로의 불안을 확인하는 거다. 서로의 불행을 나누는 거다. 나눈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다. 오히려 확산된다.

라벤더가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때, 라벤더의 불안이 함께 전해진다. "잘 되실 거예요"라는 말 속에 "잘 되겠지?"라는 불안이 들어있다. "안정감 느끼실 거예요"라는 말 속에 "안정감을 잃은 나"가 들어있다.

나는 라벤더의 위로를 받으면서 동시에 라벤더의 불안을 받는다. 위로받는 게 아니라 불안에 감염되는 거다.

동병상련은 위로처럼 느껴진다. 같은 처지의 사람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동병상련은 연대가 아니다. 같이 힘들어하는 것은 함께 나아가는 것과 다르다. 서로의 불행을 확인하는 것은 서로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다.


직접 주면 거부한다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라벤더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직접 해줬다. "잘 될 거예요"라고.

라벤더의 반응은 이랬다.

"무작정 잘되리라는 헛된희망보다는 정확히 잘되게끔 수립을 하고 움직여보고... 열심히 했으니 잘 될 거야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거부했다. 세게 거부했다. 느낌표 세 개.

왜 거부했을까.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막상 들으니까 못 받는 거다. 직접 받으면 자기가 그걸 원했다는 게 드러나니까. "나 위로받고 싶었어"가 티나니까. 그래서 오히려 부정한다. "아니야, 난 그런 헛된 희망 안 믿어"라고.

전치된 욕망은 직접 채워주면 거부된다.

왜냐하면 전치의 목적 자체가 욕망을 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로받고 싶다는 걸 숨기려고 타인을 위로하는 형식으로 바꾼 건데, 직접 위로해주면 그 숨김이 무너진다. 욕망이 드러난다. 그게 민망하다.

그래서 거부한다. "난 그런 거 필요 없어"라고.

그런데 라벤더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그냥 내 희망사항�"

무의식이 슬쩍 나왔다. "내 희망사항"이라고. 자기가 원한다는 걸 인정한 거다. 살짝.

전치는 이렇게 풀린다. 한 번에 확 풀리지 않는다. 거부하다가 슬쩍 인정하고, 다시 부정하다가 또 슬쩍 인정하고. 그렇게 조금씩 자기 욕망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맞아요, 희망사항이죠. 그래서 듣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라벤더의 대답.

"헛된 희망은 발전이 없습니다.. 깨지는 현실로 고뇌만 남을 뿐.."

또 거부했다. 더 세게 거부했다.

이게 뭔가. 욕망을 인정하면 실망할까 봐 무서운 거다.

"잘 될 거야"를 믿었다가 안 되면? 더 아프다. 희망을 품었다가 깨지면 희망 없을 때보다 더 아프다. 그래서 미리 차단한다. "난 그런 거 안 믿어. 희망 같은 거 없어."

이게 방어다. 희망을 갖지 않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도 없으니까.

라벤더가 위로를 거부하는 진짜 이유가 여기 있다. 위로를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긴다. 희망이 생기면 기대가 생긴다. 기대가 생기면 실망할 수 있다. 실망하면 아프다.

그래서 처음부터 막는다. "헛된 희망", "발전이 없다", "고뇌만 남을 뿐". 희망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두 번 거부하면 더 밀어붙이면 안 된다. 라벤더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자기 욕망을 직면할 준비. 희망을 품을 준비. 실망할 용기.

"그치, 현실은 냉정하지."

이렇게 받아주고 빠져야 한다. 라벤더의 방어를 인정해주면서 물러나야 한다.

상담은 타이밍이다. 내담자가 준비됐을 때 열린다. 준비 안 됐을 때 밀어붙이면 문이 더 굳게 닫힌다.

라벤더는 아직 문 앞에 서 있다. 문을 열 준비가 안 됐다. 그러니까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한다. 억지로 열면 안 된다.


전치의 해제

전치를 해제한다는 것은 욕망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라벤더가 나에게 넘긴 욕망을 라벤더에게 돌려줘야 한다.

"라벤더씨, 나 위로하지 말고 그냥 힘들다고 해요."

이 말이 전치를 해제한다. 라벤더가 나에게 돌린 욕망을 다시 라벤더에게로 돌려보내는 거다.

"힘들다"고 직접 말하는 것. 이게 전치의 해제다.

타인을 위로하는 형식으로 자기를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직접 "나 힘들어, 위로해줘"라고 말하는 것. 수동을 수동으로 표현하는 것. 욕망을 뒤집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것.

그게 어렵다. 약해 보이니까. 민망하니까.

그래서 전치한다. 그래서 평생 대체물만 빤다. 그래서 진짜 만족은 얻지 못한다.

마무리

라벤더가 나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뭔가.

"선생님도 힘드시죠? 저도 힘들어요. 누가 좀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이게 전치되기 전의 욕망이다.

이 욕망을 직접 말했다면, 나는 답해줄 수 있었다.

"힘들지. 나도 힘들어. 그런데 괜찮아. 라벤더씨도 괜찮아."

이게 진짜 위로다. 전치되지 않은 위로. 대체물이 아닌 원래 대상에게 주는 위로.

타인을 위로하는 척하지 마라. 자기가 위로받고 싶으면 직접 말해라. 욕망을 전치하지 마라. 대상을 대체하지 마라.

그래야 진짜 만족이 가능하다.


참고문헌

맹정현(2022). 『프로이트 패러다임』. 서울: 위고.


해담 사주 명리 상담 : 네이버 엑스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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