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하여
그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되어 엄마와 진정한 대화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딸들이 있다. 오랫동안 결핍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이제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관계가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임상심리상담사 변지영은 이런 딸들에게 말한다. "나는 서른, 마흔이 되어 엄마와 진정한 대화를 시도하겠다며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늘어놓는 딸들에게 '엄마를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변지영, 2024: 131).
이 말이 냉정하게 들릴 수 있다. 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임상 현장에서 수없이 목격해온 장면들이 있다. 딸이 진실의 카드를 꺼내 드는 순간, 그나마 있던 느슨한 관계마저 끊어지는 것을. 딸이 마음을 여는 순간, 엄마가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것을.
왜 그럴까? 딸의 입장에서 이것은 진실을 말해서 관계를 더 친밀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나 엄마의 입장에서 이것은 순전한 공격이다. '당신은 엄마 자격이 부족했고 당신 때문에 내가 힘들었다'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들은 도망간다. 필사적으로 도망가야만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안의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누군가는 그 누군가가 아니다. 당신이 엄마에 대해 '어떠어떠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결국 당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당신 자아의 일부로 합성된 것을 의식하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이 밝혀낸 불편한 진실이다. 내가 인식한 것은 내 정신세계에서 만들어진 고유한 합성물이다. 실제 엄마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전부를 경험할 수 없고, 전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느끼는 진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내 감정, 내 욕망, 내 기억으로 왜곡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의 기억은 늘 왜곡되거나 욕망에 오염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실제 그 사람이 아니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되어 우유도 치즈도 고기도 과일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합성물이 되듯이,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형성된 '대상'은 이미 그 사람이 아니다. 내 자아의 하부구조라고 보아야 한다.
'진실을 말해서 관계를 푸는 것'이 정말 목적인가? 혹시 '그 악조건 속에서도 나는 살아남았고, 엄마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라고 복수하고 처벌하려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 앞에서 많은 딸들이 멈칫한다. 자신도 몰랐던 욕망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정정하고 싶어 하는 욕망, 그 밑에는 거대한 나르시시즘이 들어 있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이 만들어 내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변지영은 이렇게 정리한다. "딸의 입장에서는 진실을 얘기해서 관계를 더 친밀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순전한 공격이다. '당신은 엄마 자격 부족했고 당신 때문에 내가 힘들었다'밖에 안 되는 것이다"(변지영, 2024: 130).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결코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양육자가 당신을 힘들게 했다면, 그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자원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이 당신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이 아니라 현실 직시다. 당신의 엄마가 정서적으로 결핍된 환경에서 당신을 키웠다면, 그것은 엄마가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다. 엄마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폭력적이었거나, 외도를 했거나, 무능했을 때, 어머니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대개 교회로 가거나, 장녀나 장남에게 융합해서 공생을 시도하거나, 끊임없이 일만 하면서 정서적으로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스스로 고립되었다. 이것은 생존 방식이었다.
이런 구조에서 자라난 딸들은 부모 중 누구와도 정서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평생 큰 결핍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엄마와 대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 대화는 종종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된다.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정신분석가 장 다비드 나지오는 한 청년의 사례를 소개한다. 마리화나를 피우며 컴퓨터만 하는 중독자였다. 연애도 일도 못 했다. 삶을 직면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나지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아기였을 때 불안한 엄마의 품을 파고드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지오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저의 불안이 옮아갔을까 봐 두려워요. 아기였을 때 오마르는 자주 제 품안에서 웅크렸어요. 그럴수록 제 불안이 아이에게 더 스며들 것만 같았죠'"(나지오, 2025: 117).
오늘날 불안 때문에 그가 연애도 일도 못하게 된 것은 불안했던 엄마에게서 온 것이다. 자신의 불안이 어머니의 불안의 연장선임을 이해한다면, 훨씬 덜 불안해질 수 있다. 불안이 어디서 온 것인지만 알아도 훨씬 덜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나지오는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한다. 히스테리 증상으로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가 있었다. 어느 날 건물 홀에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두 눈이 우는 것을 보았다. 얼굴과 동떨어진, 커다랗고 슬픈 두 눈을.
그녀에게는 우울증으로 자살한 여동생이 있었다. 어린 시절 여동생 방 벽에는 피카소 그림의 복사본이 걸려 있었다. 커다랗고 슬픈 눈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가 비둘기를 들고 있는 그림. 세 겹으로 투명하게 겹쳐진 몽타주가 그려졌다. 내담자의 슬픈 눈에 사망한 여동생의 슬픈 눈빛이 더해졌고, 거기에 그림 속 여자아이의 슬픈 눈이 더해졌다.
나지오는 이 사례를 통해 말한다. "어떤 이미지가 아동의 몸과 영혼에 해를 끼칠 수 있다"(나지오, 2025: 100). 부모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감정은 스며든다.
각자의 세계는 각자가 건설한다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방향이 다르다. 연결하고 푸는 것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과업이다. 당신이 믿는 그 '엄마'는 현실의 엄마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 경험, 기억으로 일부 부풀려지고 왜곡된 자신의 내적 대상, 곧 자아의 일부에 다름 아니다.
진실을 말해서 연결을 회복해야 하는 대상은 늘 '그 사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일부다. 관계의 회복도 그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의 '그 사람'과 연결되는 일이다.
죽음을 향해 가는 노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도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파헤치고 뒤집어 다시 들여다볼 힘이 없다. 게다가 각자의 진실은 각자만 안다. 그러니 진실의 이름으로 괴롭히지 말고, 힘들게 살아온 부모들을 그냥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진정한 분리다.
변지영은 이렇게 정리한다. "각자의 세계는 각자가 건설하는 것이다. 연결하고 푸는 것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과업이다. 당신이 믿는 그 '엄마'는 현실의 엄마가 아니다"(변지영, 2024: 131).
엄마에게 말하고 싶은 진실이 있다면, 먼저 물어보라. 이것이 정말 연결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복수를 위한 것인지. 엄마의 부족함이 견딜 수 없다면, 먼저 인정하라. 엄마가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방향을 바꿔라. 실제 엄마가 아니라, 자기 안의 '엄마'와 화해해야 한다.
엄마를 괴롭히지 말라. 그것이 결국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이다.
참고문헌
변지영(2024). 『순간이 빛일지라도 우리는 무한』. 그린비.
장 다비드 나지오/ 임말희 역(2025). 『다시 살아난 클라라』. 눈출판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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