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과오가 후회돼네.” 자기분석 리포트
정신분석의 핵심 도구인 자유연상을 통해 자기분석을 시도하던 중, "오늘은 지금, 현실에 지난날의 과오가 후회돼네"라는 문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순간적인 대사를 곱씹어보니,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전이반복'의 개념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과 그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모두 과거의 '전이'가 현재에 출현하는 것일까? 우리의 현재는 과연 과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1부. 후회라는 말의 무게
“오늘은 지금, 현실에 지난날의 과오가 후회돼네.”
그날, 나는 무심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공간에서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내 몸은 즉각 반응했다. 후회의 단어가 목에 걸려, 마치 삼키지 못한 음식처럼 답답하게 막히는 느낌. 말은 분명 밖으로 나왔는데, 동시에 내 안에 갇힌 채 흐르지 못하는 듯했다.
후회란 언제나 과거에 묶여 있는 감정처럼 보인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이번에 느낀 후회는 조금 달랐다. 과거의 장면을 떠올린 것도 아니었는데, 말은 “오늘은 지금”이라는 현재 시제로 시작됐다. 언뜻 어색한 이 겹말 속에는 사실 무의식의 구조가 드러나 있었다. “오늘”이면 이미 “지금”인데, 굳이 겹쳐 쓴 것은 현재가 현재답지 못하다는 무언의 고백이었다.
라캉은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무의식은 우리의 말실수, 반복, 억양, 사소한 표현 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내가 굳이 “오늘은 지금”이라고 겹쳐 말한 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흔적이었다. 지금을 살고 있는데, 여전히 지난날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상태. 후회란 그렇게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눌러앉은 자리에서 솟아난다.
목에 걸린 응어리는 그 사실을 신체로 알려주고 있었다. 후회라는 단어는 이미 입 밖으로 나왔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내용은 여전히 말로 붙잡히지 않았다. 언어는 말해졌으나, 의미는 비어 있었다. 그래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현상을 흔히 본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무의식적 진실은 몸을 통과해 나타난다. 위장이 조여오거나, 목이 막히거나, 가슴이 답답해지는 식으로.
후회의 말은 그래서 단순히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신체의 사건이기도 하다. 목이 막힌다는 건 아직 말해지지 않은 기억, 붙잡히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뜻이다. 언어의 빈틈이 몸에 남긴 흔적, 그게 바로 내가 처음 경험한 ‘후회의 무게’였다.
그 순간 나는 자문했다.
“과연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왜 지금, 왜 오늘에 와서야 이 말이 튀어나온 걸까?”
후회는 단순한 자기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언어로 붙잡지 못한 기억이 다시 나를 찾고 있다는 신호였다. 내가 목으로 느낀 그 응어리는, 무의식이 던져준 작은 열쇠였다.
2부. 다섯 살의 장례식
후회의 응어리를 더듬어가자, 오래 묻어두었던 장면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다섯 살 무렵, 할머니의 장례식.
나는 장례식장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조문객들 사이에 끼지도 않았고, 할머니의 관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않았다. 대신 친구들과 함께 바깥에서 뛰어놀았다. 검은 옷을 입은 어른들의 흐릿한 얼굴, 울음소리와 향 냄새, 분주한 발걸음들. 그 모든 것이 내겐 너무 낯설고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가볍게 지나쳐 버렸다. 아이의 몸은 본능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피해간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 장면을 “과오”라 불렀다. 장례식에서 놀았던 아이, 너무 무심한 아이. 그 기억은 늘 후회의 그림자로 남았다. 하지만 정신분석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잘못이라기보다 생존의 방식이었다. 다섯 살의 아이가 죽음이라는 실재를 감당할 언어를 갖고 있을 리 없다. 라캉이 말한 실재(Real)는 상징화되지 못한 채 갑자기 닥쳐오는 사건이다. 그것은 아이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지만, 말로 붙잡을 수 없어 몸은 즉각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그때 나에게 그 다른 방향은 ‘놀이’였다. 뛰어노는 몸짓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죽음의 무게로부터 벗어나려는 본능적 탈출이었다. 죽음을 모르고 논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논 것이다. 후회는 뒤늦게 덧씌워진 감정일 뿐, 그 순간의 아이에게 놀이는 생존의 언어였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장면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엄마의 모습이다. 분주히 움직이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절차를 챙기느라 내 곁에 머물지 못했던 엄마. 내 눈은 자꾸만 그 바쁜 몸짓을 좇았다.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나는, 결국 친구들 곁으로 달아나듯 숨어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전이가 발생한다. 나는 장례식의 무게를 온전히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엄마가 나를 보지 못한 순간”을 각인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실재의 사건이었지만, 아이의 무의식에는 그것이 “엄마의 부재”라는 상징으로 치환되어 새겨졌다. 그래서 훗날 나는 그 기억을 후회로 불러냈다. 사실 후회의 정체는 죽음의 과오가 아니라, 엄마의 시선에서 놓여났던 쓸쓸함이었다.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의 통찰이 스며든다. 우리가 “후회”라고 부르는 것 중 많은 부분은 실제 잘못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언어로 이름 붙이지 못한 결핍, 그 결핍이 남긴 쓸쓸함 때문이다. 다섯 살의 나는 죽음을 피해 달아난 것이 아니라, 엄마의 시선에서 떨어져 쓸쓸하게 남겨졌던 것이다. 후회는 바로 그 쓸쓸함의 재현이었다.
3부. 엄마의 바쁨과 쓸쓸한 아이
장례식장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죽음의 장면이 아니라, 엄마의 분주한 모습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절차를 챙기고,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의식을 정리하느라 내게는 거의 시선을 주지 못하던 엄마.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는 엄마가 멀어질수록 세상 전체가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엄마 치마폭에 파고든 아이가 아니라, 엄마의 바쁨을 바라보며 홀로 남겨진 아이였다. 그 장면이 내 무의식에 깊게 새겨졌다. 죽음이라는 실재의 무게는 직접 다가오지 않았지만, 엄마의 부재는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정신분석에서 이런 흔적은 흔히 전이라는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전이는 과거의 감정과 관계 패턴이 현재의 상황으로 옮겨오는 현상이다. 나는 지금 후회라는 단어를 말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다섯 살 때 엄마의 부재 경험에 닿아 있다. “엄마가 나를 보지 않았다”는 쓸쓸한 기억이 오늘날의 후회라는 감정으로 옮겨온 것이다.
라캉의 삼계(三界) 틀로 본다면, 상황은 이렇게 설명된다.
실재계: 할머니의 죽음, 감당할 수 없는 사건.
상상계: 엄마의 바쁜 몸짓,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상징계: “나는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는 언어적 흔적, 그것이 훗날 “과오”와 “후회”라는 말로 되살아난다.
즉, 죽음의 실재는 아이의 언어에 담길 수 없었고, 대신 엄마의 부재라는 상징적 구조로 전환되었다. 이 전환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고,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나는 그 기억을 후회로 부른다. 그러나 실은 후회라기보다, 쓸쓸함의 반복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후회가 나를 끊임없이 자책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동시에 나를 무언가로 이끌어왔다는 사실이다. 후회는 단순히 나를 붙잡는 족쇄가 아니라, 무의식의 기억이 현재로 옮겨오며 “다시 들여다보라”고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떠올리며 깨닫는다. 후회의 본질은 잘못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돌봄받지 못한 아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표식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도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그때 나는 쓸쓸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4부. 초자아의 목소리 vs. 나의 목소리
그 기억을 더듬다 보니, 내 안에서 또 다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독립해야제, 언제까지 엄마 치마폭에 있을 거야.”
그 말투는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섯 살의 아이가 스스로 그렇게 말했을 리 없다. 그것은 내 안에 깊숙이 새겨진 타자의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사회가 주입한 규범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목소리를 초자아의 목소리라 부른다.
초자아는 단순한 도덕적 양심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가혹하다. “이렇게 해야 한다.” “언제까지 그럴 거냐.” “이제는 달라져야지.” 이런 명령들은 내게 힘을 주기보다, 더 큰 죄책과 억압을 남긴다. 아이의 쓸쓸함을 이해해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약하다”라고 꾸짖는다.
라캉은 초자아를 “쾌락하라!”라고 명령하는 목소리라고 설명한다. 모순적이게도, 초자아는 금지를 말하면서 동시에 더 큰 향락을 요구한다. “엄마 치마폭에 있지 마라”라는 말은, 동시에 “그러나 그 치마폭을 떠올려라”라는 은밀한 요구를 내포한다. 그래서 초자아의 목소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요구를 던진다. 따라도 부족하고, 거부해도 죄책이 남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쓸쓸하구나, 진정으로 따뜻한 엄마의 품이 그리웠겠네.”
이 말은 전혀 달랐다. 초자아의 꾸짖음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아이에게 직접 건네는 인정이었다. 그 순간, 목에 막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 풀렸다. 목이 가벼워지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후회의 말이 애도의 말로 바뀌자, 몸은 즉각 반응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났다. 나는 더 이상 타자의 목소리를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목소리를 찾았다. 이 차이는 단순한 말투의 변화가 아니다. 무의식의 언어가 바뀔 때, 신체가 달라지고, 감정의 구조가 재편된다.
아이를 꾸짖는 목소리 속에서는 후회가 죄책으로 변했다. 그러나 아이를 인정하는 목소리 속에서는 후회가 슬픔과 애도로 바뀌었다. 슬픔은 목에 걸린 응어리를 조금씩 녹여내며, 나를 앞으로 내미는 힘으로 전환되었다.
나는 깨달았다. 후회란 곧 초자아의 목소리에 갇혀 있을 때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벗어나, 내 스스로의 언어로 아이의 쓸쓸함을 불러낼 때, 후회는 새로운 의미를 띤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옭아매는 쇠사슬이 아니라, 나를 해방시키는 문이 된다.
5부. 과오에서 발판으로
나는 처음에 이 기억을 “지난날의 과오”라고 불렀다.
장례식에서 친구들과 놀았던 아이, 엄마 곁에 붙어 있지 못했던 아이. 그 기억은 늘 죄책의 빛깔을 띠었다. 그러나 아이의 쓸쓸함을 인정하는 순간, 그 기억은 더 이상 과오가 아니었다.
말은 스스로 자리를 바꾸었다.
“지난날의 과오”는 “현실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변환되었다.
언어의 전환은 단순한 표현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의미다.
라캉은 증상을 단순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망 속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증상은 억압된 무의식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목에 느낀 응어리는,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아직 말로 표현되지 못한 무의식의 흔적이었다. 그것을 따라가 언어로 다시 엮자, 응어리는 새로운 의미를 가졌다.
후회는 더 이상 잘못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딛고 서야 할 발판이었다. 발판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종종 그 발판을 ‘잘못’이나 ‘결핍’의 자리에서 만들어낸다. 후회라는 감정은, 사실 나를 붙잡는 쇠사슬이 아니라 나를 밀어내는 힘일 수 있다.
내가 “현실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라고 말했을 때, 몸은 즉각 반응했다. 목의 응어리가 조금 더 풀리며, 후련함이 찾아왔다. 언어는 단순히 머릿속의 개념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리듬이었다.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순간 이해된다. 언어의 변화가 곧 신체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과오는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아가기 위해 딛는 자리다. 후회는 잘못의 그림자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밀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6부. 카페라는 무대와 인정의 욕망
나는 문득 일상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는 나의 모습. 집에서도 할 수 있고, 도서관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굳이 카페에서 하고 싶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은 명확했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자리에서 하고 싶다.”
집은 너무 은밀하고, 도서관은 너무 고요하다. 그곳에서는 나와 나만의 작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카페는 다르다. 타인의 시선이 흘러다니는 곳, 낯선 사람들이 오고 가는 자리, 그 속에서 나는 내 존재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선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욕망이었다. 라캉은 이를 **응시(le regard)**라고 불렀다. 나는 타인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타자의 시선 속에서 나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카페는 바로 그 응시가 오가는 무대였다.
여기서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욕망이 이어지는 것을 본다. 다섯 살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엄마는 분주했고, 나는 쓸쓸했다. 그때의 결핍은 무의식에 깊이 새겨졌다. 이제 성인이 된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 결핍을 메우려 한다. 카페라는 공간은 단순한 작업 공간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이 펼쳐지는 장場이었다.
사람들이 내 글을 보지 않아도 좋다. 단지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고, 그 시선이 스쳐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마치 그때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쓸쓸한 아이가, 이제는 다른 타자의 시선 속에 자신을 다시 세우려는 몸짓 같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욕망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근원적인 갈망이다. 인간은 타자의 언어 속에서 태어나고,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카페를 찾고 싶은 마음 역시, 나의 결핍을 메우려는 자연스러운 시도였다.
따라서 카페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결핍과 현재의 욕망이 겹쳐지는 무대다. 나는 그곳에서, 후회의 언어를 인정의 언어로 바꾸는 연습을 한다. 집에서 혼자 고립된 채 쓰는 글이 아니라, 타자의 흐르는 시선 속에서 쓰는 글. 그것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
7부. 후회에서 후련함으로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돌고 돌아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은 지금, 현실에 지난날의 과오가 후회돼네.”
그 한 줄의 말에서 시작된 여정은, 목의 걸림에서, 다섯 살의 장례식에서, 엄마의 바쁨에서, 초자아의 꾸짖음에서, 그리고 카페의 무대에서 흘러왔다.
처음의 후회는 나를 죄책으로 가뒀다.
그러나 그 후회의 속살을 들여다보니, 그것은 잘못의 증거가 아니라 결핍의 흔적이었다.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 쓸쓸히 남겨졌던 아이, 그 아이의 기억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려온 것이었다.
나는 초자아의 목소리에 오래 붙잡혀 있었다.
“독립해야지.” “언제까지 엄마 치마폭에 있을 거야.”
그 목소리는 내게 힘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죄책과 억압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를 꾸짖는 대신 인정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쓸쓸하구나. 진정으로 따뜻한 엄마의 품이 그리웠겠네.”
그 한마디에 목의 응어리가 풀리며 몸은 후련해졌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신체를 움직이는 힘이다. 후회를 다른 언어로 다시 말했을 때, 몸은 곧장 반응했다. 후회는 애도로 바뀌었고, 애도는 발판으로 전환되었다. “현실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라는 말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라, 주체의 자리를 바꿔놓는 행위였다.
카페라는 무대에 대한 욕망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집과 도서관은 나를 숨기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카페는 시선이 흐르는 곳, 인정이 가능해지는 자리였다. 그것은 다섯 살의 쓸쓸한 아이가,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시선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였다. 나는 그 욕망을 부끄럽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결국, 후회는 나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다른 길로 이끄는 안내판이었다. 목에 걸렸던 응어리는 말로 풀리며, 후회는 후련함으로 변했다.
나는 이제 안다.
후회란 잘못의 낙인이 아니다. 그것은 결핍이 남긴 흔적이며,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다.
후회 속에는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나의 진실이 숨어 있다. 그 진실을 언어로 불러낼 때, 후회는 새로운 리듬을 얻는다.
오늘의 나는 후회를 말하며 시작했지만, 후련함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 리듬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후회의 언어 속에는 쓸쓸한 아이가 숨어 있다. 그 아이에게 꾸짖음 대신 따뜻한 말을 건넬 때, 우리는 모두 새로운 발판을 얻게 된다.
후회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후회는 쇠사슬이 아니라 발판이다. 후회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