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15장

가깝지만 멀어진 그대(道)

by 닌자


일상의 ‘도’ — 장자와 생활의 달인


15장 첫 문장 해설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옛날 도를 잘 따르던 이들은 그 도가 미묘하고 신비로우며,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위의 해석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는 도를 이루었다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면서,


그분들 이야말로 "삶 속에서 도를 구현한 사람들"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노자와 장자는 사유의 결이 닿아 있는 사상가들입니다.


특히 『장자』 양생주 편에 나오는 '포정(고기 써는 백정)과 해우(소 해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한 백정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습니다.


그의 칼질은 도의 경지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낭송 장자 84p



그의 태도는 『도덕경』 15장에서 말하는 도인의 모습과도 겹칩니다.



조심스럽기를, 마치 겨울 냇물 건너듯 하며…


흐트러짐이 없음은, 마치 얼음이 녹기 전 같고…”


도는 미묘하거나 신비로워 깊이를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오랜 시간 갈고닦은 삶의 구체적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조화와 자연스러움일 수 있습니다.

14장에서도 말했지만, 도는 형상이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를 너무 멀게, 높이, 신적인 존재로 올려놓고,

범접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부처의 깨달음


15장에서 문득 붓다가 핍팔라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너무도 깊고 고요한 진리를 깨달으신 붓다는,


깨달음의 환희 속에서 며칠을 고요히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셨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세상에 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선택은, 가득 채운 마음을 비우기 위해,


그 깨달음을 나누기로 결심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심 덕분에,


오늘날까지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라와 전통이 달라지면서,


그 가르침도 다양하게 해석되고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기 불경의 말씀들을 좋아합니다.


붓다의 음성과 숨결이 비교적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는 고정된 것이 아닌 ‘흐름’


다시 생활의 달인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오랜 수련 끝에 도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런 그들도 자신의 분야를 벗어나면 다시 배우고 채워야 합니다.


'도'란 결코 영원히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는 살아 있는 흐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을 하는 것일까요?


마무리


『도덕경』 15장을 통해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는 신비롭고 높은 차원의 진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현장 속에서 조용히 드러나는 어떤 태도이기도 하다.


장자의 포우, 생활의 달인, 그리고 붓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도를 살아낸 사람들 아닐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보이지 않는 도, 함께 찾아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