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닌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책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인도학 강의에서 들은 한마디였다.

“인도인들은 계급을 ‘순리’로 받아들인다”.

그 말이 내게는 불편하게 다가왔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아보게 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떠올랐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그들의 희생은 결국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길 위에서, 제도와 배움, 연민의 철학을 실천했던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법과 제도는 정교해졌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외된다.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지만, 그것은 권력과 결탁해 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그 결과, 국민은 무기력과 혼란에 빠지고, 교육은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품이자 경쟁을 부추기는 도구로 전락했다. 함께 성장하기보다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이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논리는 직장으로 이어져 학벌과 스펙이 능력보다 앞서고, 협력보다 서열과 평가가 우선된다.


이 광경을 다산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배움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어야 한다.

그에게 배움은 권력을 위한 장식이 아니었다.

약자를 일으키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도구였다.

삶 속에서 실천되는 배움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한 세기 넘어, 이반 일리치도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가 더 이상 배움의 장이 아니라, 지식을 상품처럼 사고파는 곳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교육은 본래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제도권 교육은 오히려 사람을 경쟁과 서열 속에 가두었고,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능력을 빼앗아 버렸다.

교실 안에서 배우는 것은 시험을 위한 지식일 뿐, 삶을 위한 지혜로 이어지지 못한다. 오히려 학교는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하는 장치가 되었다.

일리치는 진정한 배움은 강의실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지혜를 키우기 위해서는 학교 울타리 밖의 경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힘을 길러내는 데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다산과 일리치가 건넨 공통된 조언은 이렇다.

배움은 제도나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혜를 키울 수 있을까.

다산이 말했듯, 글의 뜻은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완성된다.

이반 일리치가 강조했듯, 진짜 배움은 학교 울타리 밖, 다양한 경험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싹튼다.


1. 다양한 경험 쌓기

낯선 환경과 낯선 학문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관점을 키워준다.

실패도 역시 중요한 스승이다. 안전한 실패 경험은 판단력을 길러준다.

리더, 조력자, 청중 등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며 시야를 넓힐 수 있다.

2. 깊이 있는 성찰

하루 10분이라도 오늘의 선택과 말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나와 다른 견해를 접했을 때, 왜 동의하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왜?”라는 질문을 습관처럼 던지다 보면, 흩어진 지식이 연결되고 통찰로 자라난다.

3. 실천으로 완성하기

작게라도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겨본다.

깨달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피드백을 반영하여 다시 개선한다.

이러한 반복이 지식을 지혜로 바꾼다.


지혜는 배움 + 경험 + 성찰 + 실천이 만날 때 완성된다.

다산과 일리치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공통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배움은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이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후손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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