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 9월 15일, 장장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친 다산은 마침내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그의 해배는 정조 사후 권력을 쥐었던 노론 벽파가 서서히 힘을 잃고, 순조 장인 김조순의 안동 김씨 세력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장기 유배자들에 대한 사면이 단행된 것이다.
하지만 다산의 마음에는 해배의 기쁨보다 깊은 상실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재에 돌아오기 2년 전, 다산은 벗이자 형인 정약전의 부음을 들었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던 그는 편지를 써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전했다.
“정약전의 큰 그릇과 높은 덕망을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으나, 정조는 생전에 ‘아무개는 형이 아우보다 낫다’라고 평하며 그의 가치를 알아주었다.“
다산은 원통한 죽음을 두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무나 돌멩이도 눈물 흘릴 일이다.”
평생 마음을 터놓고 학문을 논하던 벗이자 스승 같은 형을 잃고,
이제 자신의 연구를 누구와 상의해야 할지 막막해했다.
자신을 끝까지 믿고 인정해 준 사람의 부재는 그에게 깊은 상실감을 남겼다.
정약전 묘지명에 다산은 이렇게 남겼다.
무성하게 숲이야 우거졌지만
묘소의 지세가 농사도 지을 만한 곳이라
예리한 쟁기로 갈아엎지나 않을까
우선 묘지명을 기록해 둔다.
이 묘는 진실로 철인의 뼈가 묻혀있는 곳으로
드러나게도 말고 손대지도 말라.
일찍부터 주공과 공자를 사모하느라
우리들과는 벗도 삼지 않았네.
하류의 평민들과 노닐었으나
살육의 위험만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도 터졌건만
가로막는 사람 때문에 큰 벼슬 못하고
마침내 뒤집히는 난리를 만나
먼 바닷속 풀집으로 귀양살이 갔었네.
정밀한 지식과 밝은 식견을
묵묵히 마음속에만 감추어두고
못잊을 것은 부모님 곁인 양
멀고 먼 곳에서 찾아와 묻혔네.
다산산문선 257p/ 박석무/ 창비
그리운 형을 기리며 지은 묘지명에는, 다산이 품은 형의 기억과 그 시대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산에게 이 기록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형제의 세월과 시대의 상처를 마음 깊이 새긴 기록이었다.
정약용과 정약전, 두 형제는 피로 맺어진 가족이자, 생각과 길을 나누는 학문의 동반자였다.
벼슬길과 유배길, 기쁨과 슬픔, 글 한 줄과 생각 한 자락까지 함께 나누며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었다.
한 사람은 섬에서, 한 사람은 육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편지와 시로 마음을 잇던 세월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형의 부재는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상실이었다.
그럼에도 다산은 형이 남긴 학문과 뜻을 가슴 깊이 품고, 홀로 남은 길을 걸어갔다.
그 길 위에 피어난 사유와 저술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다산’이라는 이름의 품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 품격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길을 묻고 있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자신을 도와준 사돈인 윤서유와 회포를 나누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큰 형님과 친인척 집을 방문하고 인사를 올렸고, 거리가 먼 곳은 편지를 띄워 마음을 전했다.
또한 명망 있는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하며, 유배지에서처럼 글을 쓰고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씁쓸했다.
뜻을 함께하던 벗과 친지는 1801년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거나 먼 유배지로 끌려갔다. 남은 가족들 역시 ‘반역자의 집안’이라는 낙인 속에서 가난과 멸시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 다산은 그 비극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들의 삶과 신념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고인들의 생애와 학문, 인품을 담은 묘지명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그 글들은 단순한 추모문이 아니라, 시대의 폭력 속에서 꺾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증언이자, 후세를 향한 기록이 되었다.
다산에게 학문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배운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는 육경과 사서로 자신을 닦고, 1표 2 서로 국가를 다스리는 길을 제시했다.
그 결실에 바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있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는 책의 목적을 간략히 밝히고 있다.
『경세유표』는 어떤 내용인가. 관제(官制), 군현제(郡縣制), 전제(田制), 부역(賦役), 공시(貢市), 창저(倉儲), 군제(軍制), 과제(科制), 해세(海稅), 상세(商稅), 마정(馬政), 선법(船法) 등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실행 가능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펴서 우리의 오랜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생각에서 저술한 것이다.
『목민심서』는 어떤 내용인가. 현재의 법을 토대로 우리 백성을 다스려보자는 것이다.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을 세 가지 기紀로 삼았고 이(吏) , 호(戶), 예(禮), 병(兵), 형(刑) , 공(工)을 여섯 가지 전典으로 만들어 진황(賑荒)한 단원으로 끝맺었으며 하나의 조목마다 6조條를 포함하였다.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었다.
『흠흠신서』는 어떤 내용인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더러 알지 못하는 게 있기에 경사로써 근본을 삼고 비의(批議)로써 보강하고 공안으로써 증거가 되게 하였으며 모든 것을 상정하여 옥사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 백성들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게 나의 뜻이었다.
『경세유표』에는 부패한 제도를 바로잡으려는 굳건한 개혁하려는 의지가, 『목민심서』와 『흠흠신서』에는 백성들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다산은 현실 정치의 장벽과 이해관계에 가로막히지 않고, 제도의 원형을 경전 속에서 찾고 그것을 현실에 맞게 새롭게 세우려 했다.
그에게 개혁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지속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일이었다.
부패하고 경직된 관제, 불합리한 세금 제도, 형식뿐인 과거제 등 당시의 병폐를 바로잡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경세유표』는 조선 후기의 ‘국가 개조 청사진’이라 할 만하다.
『목민심서』에는 백성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과 함께, 그 마음을 지켜낼 구체적 실천 지침이 담겨 있다.
율기(律己)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봉공(奉公)으로 직무를 공익에 두며, 애민(愛民)으로 백성을 돌보라는 세 가지 기(紀)는, 오늘날 공직자의 윤리 강령으로도 손색이 없다.
여섯 전(典)은 행정 각 분야의 세부 지침서 역할을 하고,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진황(賑荒)’ 편까지 두어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일을 행정의 마지막 항목으로 삼았다.
다산은 고금의 이론을 살펴 간위(奸僞), 곧 간사하고 거짓된 행정을 폭로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이는 관료 사회의 청렴성을 회복하고, 행정의 목적이 백성의 행복에 있음을 분명히 한 선언이었다.
『흠흠신서』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형사 사건, 곧 옥사(獄事)에 관한 지침서다.
다산은 재판을 맡은 관리들이 무지와 편견으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도록, 경전과 역사에서 근거를 찾고(경사 經史),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비의 批議) 보강하며, 실제 판례를 통해(공안 公案) 판단하게 했다.
그는 모든 상황을 가정해 조목조목 기록했고, 옥사를 맡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이 책을 읽게 하여 백성의 억울함이 사라지길 바랐다. 이는 ‘형벌은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실천으로 구현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경세유표』의 제도 개혁 정신, 『목민심서』의 청렴한 행정, 『흠흠신서』의 공정한 재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산초당에서 피어난 실학의 열매는, 한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의 사회에도 길잡이가 된다.
부패와 불신, 권력 남용이 끊이지 않는 지금, 다산이 남긴 이 세 권의 책은 ‘어떻게 나라를 세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여전히 힘 있는 답을 들려준다.
다산의 따뜻한 인품이 느껴지는 자찬 묘지명 마지막 단락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네가 너의 착함을 기록한 것이
여러 장이 되는구나.
너의 감추어진 잘못을 기록하다 보면
책으로는 못다 적으리.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와 육경을 안다고 했으나
그 행한 것을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널리 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지 않겠는가.
너의 분운紛紜함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창광猖狂을 거두어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다산이 말한 분운(紛紜)은 마음이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혀 본래의 중심을 잃는 상태를 뜻한다.
세속의 일, 벼슬과 명예, 끝없는 잡념이 실타래처럼 얽히면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이런 혼란과 산만함을 스스로 걷어내야 한다고 경계했다.
창광(猖狂)은 절제를 잃고 제멋대로 날뛰는 태도를 가리킨다.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면 판단은 흐려지고 행동은 무모해진다. 젊은 시절 권력의 중심에서 개혁을 추진하던 그는, 스스로도 때로는 이러한 기세에 휩쓸렸음을 되돌아보았다. 그래서 삶의 끝에 남긴 이 당부는 곧 자기 자신을 향한 당부이기도 했다.
이 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이 있다.
리더라면 권력을 사사로이 쓰지 않기 위해,
공직자라면 직위를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쓰기 위해,
시민이라면 혼탁한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분운(紛紜)과 창광(猖狂)을 날마다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감정에 휘둘려 남을 제멋대로 판단하거니 비난하는데 더 급급하다.
오늘의 정치와 사회에서도 분운과 창광을 잃은 모습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본질을 놓치는 결정,
감정과 인기몰이에 휩쓸린 채 방향을 잃는 선택,
이익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원칙들 모두가 그 예다.
하루를 돌아보며 쓸데없는 분주함 속에 길을 잃지는 않았는지,
감정에 휩쓸려 무모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지 묻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 작은 성찰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품격이 되고 한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된다.
다산은 생의 끝까지 자신을 향한 성찰을 거두지 않았다.
그 엄정한 눈길이 있었기에, 그의 학문과 글은 한 시대를 넘어 오늘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래서 다산의 글은 옛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깨우고 바른 길로 이끄는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