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따뜻한 사람들 속에서 태어났다

by 닌자


따뜻한 인연

조선 후기, 나라의 기틀은 흔들리고 있었다. 성리학은 현실과 멀어진 채, 형식과 의례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 새로운 학문이 움트고 있었다. 현실을 바로 보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실사구시의 정신이었다. 유형원과 이익 같은 선구자들이 그 길을 열었고, 정약용에 이르러 더욱 깊고 넓게 뿌리내렸다. 무엇보다 실학은 차갑고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따뜻한 인연 속에서 길러진 학문이었다.

이 흐름은 정약용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801년, 정약용은 신유박해 이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강진으로 옮겨졌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떨어지고, 벼슬에서 쫓겨났으며, 친구들은 순교하거나 흩어졌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은 시기였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그는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지켜보며 조용히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진에 도착한 약용은 처음에는 강진 읍성 동문 밖에 있던 주막에서,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았다. 이후 그곳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이고 4년간 머물렀다. 그 무렵엔 관리들의 감시도 한결 누그러져, 강진 부근 나들이가 묵인되었다.

이후 백련사 혜장 스님의 주선으로 보은산방(고성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과 혜장스님은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 났고, 유가의 경학자와 불가의 수도승이라는 입장 차이도 있었지만, 나이와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친밀한 만남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약용은 산과 들에서 나는 약초와 열매를 차로 달여 마셨다.

아래 시 결명소는 혜장스님에게 차를 보내 달라고 청하며 지은 작품으로, 차에 대한 두 사람의 우정이 은은히 배어있다.


결명소

정약용

요즈음 차를 탐하였고

아울러 약으로도 삼았다오.

책 속 오묘한 법을 읽어

육우 다경 3편을 통달하였고,

병든 중에도 씩씩하게 마셔

마침내 노동(盧仝)의 일곱째 찻잔을 비웠소.

비록 정기를 쇠약하게 한다지만

기모경의 말을 잊지 않아

막혔던 응어리가 시원하게 사라졌으며

마침내 이찬황(李贊皇)의 차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오

아침에 꽃처럼 다려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시냇물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하오.

다연에 차를 갈면 잔 구슬 눈처럼 휘날리고

산골 화로엔 자순(紫筠) 향기가 피어나지요.

불 피우고 새샘물 길어

뜰에 앉아 백토루(白兎盧) 차맛을 음미하면

어여쁜 자기 그릇과 홍옥다완은 화려함은 비록 노공(盧公)에 미치지는 못해도

돌솔 푸른 연기는

담백함과 소박함이 한비자(韓非子)에 가깝다오.

게 눈, 고기 눈

예 사람 취미에 부질없이 깊이도 빠졌구려.

용단차(龍團茶) 봉단차(鳳團茶)

궁에서나 보는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고

이 때문에 병이 다 났으니

애오라지 차를 구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오.

듣자 하니

고해 세상의 진량(津梁)으로

가장 중한 단나(檀那) 보시는

명산의 고액(膏液)

차한 덩이 슬쩍 보내주시는 일이라오

목마르게 바라는 마음 잊지 마시고

아끼지 마시고 베풀어주소서.

다산정약용 291p재인용/ 윤동환/다산문화원 기념사업회


정약용은 차를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마음과 몸을 돌보는 길로 삼았다.

시의 말미에 혜장 스님이 지닌 귀한 차를 “아끼지 말고 베풀어 달라”라고 유머러스하게 청하며, 차를 중심으로 나눈 두 사람의 따뜻한 우정과 차가 주는 위안을 함께 전하고 있다.


이후 정약은 잠시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지내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47세이던 1808년 봄, 윤단의 산정이 자리한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훗날 ‘다산초당’이라 불리게 된 그곳은 그의 학문과 인연이 가장 깊게 뿌리내린 공간이었다.

다산초당은 강진읍에서 30리쯤 떨어진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에 있었다. 사방이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다산은 그곳에서 꽃과 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쪽 암자를 수리해 천여권의 책을 쌓아두고 저술을 이어갔다.

그를 이곳으로 모신 윤단과 윤규로는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자 했다.

다산초당에서 함께 공부한 제자는 기록에 남은 것은 18명이다.

그리고 강진 읍내 동문 밖 주막집에서 배운 제자도 여섯 명 있었는데 손병조, 황상, 황경, 황지초, 이청, 김재정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 스승의 곁에서 생활을 돌보고 글을 필사하며, 실학의 정신을 함께 키워간 동반자였다.


다산 초당이 자리한 마을은 그의 외가인 해남윤씨의 집성촌이었기에, 정약용은 이전보다 훨씬 더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귀양살이가 아니라 호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벼슬할 때 지은 시는 처량하고 기운이 막혀 있었으며, 장기에 유배되었을 때는 더욱 어둡고 비통했다. 그런데, 강진에 온 이후의 작품은 탁 트이고 막힘이 없는 뜻을 담은 것이 많아졌고 기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로는 근심이 거의 없어졌다.

다산정약용 293p재인용/ 윤동환/다산문화원 기념사업회


약용을 돕는 일에 이웃마을 윤서유 부자의 도움도 컸다.

1802년, 강진에 유배된 직후 윤서유의 아버지 윤택광은 술과 고기를 준비해 다산을 위로했다. 차가운 유배지 생활 속에서 받은 이 따뜻한 마음은, 그를 향한 감시의 벽을 조금은 누그러뜨려 주었다. 이 인연은 훗날 정약용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이 인연을 맺고 혼례를 올리며 더욱 깊어졌다.

절망의 땅에서 싹튼 정은 그렇게 삶과 학문, 가족을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정’을 가장한 범죄가 넘쳐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기에 다산의 삶이 더욱 빛난다. 그 신뢰가 지켜질 때 어떤 결실이 맺어지는지를 몸소 보여준다.



작은 서원에서

사람들은 정약용의 유배를 떠올릴 때, 먼저 고난의 세월을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 역경의 시간 속에서 다시 피어났다.

다산초당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었다. 그곳은 다시 공부하며, 마음을 굳건히 다지는 공간이었고, 새로운 세대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배움터였다.

바로 그곳에서 정약용은 이곳에서도 학문과 저술의 꽃을 피웠다.

그의 집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근본을 다시 세우려는 치열한 사유의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다산초당은 ‘작은 서원’이기도 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중에는 후일 이름을 떨친 인물들도 있었다.

또한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의 인품이 묻어나는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다음은 1818년, 제자 윤종진(호:순암)에게 보낸 편지다.


사랑스런 윤 씨 아들,

청수함이 고운 죽순 같구나, 글 읽는 소리 크고도 낭랑하고, 시 짓은 글자 밝고도 아름다워라

민땅 끝에서 주자(朱子)가 태어나듯, 귀족의 아들도 양의와 똑같구나

지루한 베갯머리 긴긴밤이 싫은데, 봉창문 끝끝내 맑으려 않는구나

외로운 마을에 개 한 마리 짖어대니, 희미한 달빛아래 그 누가 지나는가

성긴 머리털 희어진 지 오래인데, 나그네 회포만 속절없이 쓸쓸하구나

묵어진 동산에 울어대는 베짱이, 공연히 배짱배짱 무슨 베를 짰는가

몸(身)은 실(室)과 같고 신(神)은 주인과 같다.

주인이 진실로 덕행이 있으면 비록 머리를 다치는 낮은 집에 살아도 오히려 존경과 사랑을 받고, 주인이 진실로 재주가 없고 의지가 약하면 비록 누대를 높이 세우고 마루가 널찍한 곳에 살지라도 오히려 남들에게 경멸과 업신여김을 당하니 이치가 그러하다.

신동(信東)아! 부모의 늙은 기운을 받고 태어나서 신체적인 바탕이 가늘고 작으며, 나이가 15세 이상 되었어도 미숙하고 어리다.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혼과 마음이 너의 몸의 주인이 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당연히 옛 거인인 장적교여(長狄橋如)문서나 거무패(巨無覇)와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씩씩하고 자신 있는 기백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없게 된다.

너는 너 자신을 업신여기지 말라. 뜻을 세우고 마음과 힘을 쓰되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나, 재량, 역량, 위망 등이 출중한 사람이 되기를 기약하여라. 하늘은 진실로 너의 몸체가 작다 하여 서네가 이루고자 하는 덕을 막아서 못하게 할 수 없다.

대체로 재주가 없고 의지가 약한 사람은 마음이나 힘을 10배나 노력해야 한다. 항상 충실하고 순후 하며, 꾸밈이 없고 진실하며, 정이 도탑고 꾸밈이 없으며, 지극히 성실하도록 힘써라. 그렇게 하여야 겨우 보통사람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할 수 있다.

너는 죽을 때까지 마음에 새기고 한마디의 말, 한 번의 행동에 함부로 사회 기풍이 경박하더라도 스스로를 업신여기지 말라.

나는 이로서 네게 호를 내리고자 하니 순암(淳庵)이니라

1818년 다수(茶叟)


이 편지에는 정약용이 제자를 향한 애정과 삶의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다.

유배 속에서 그가 깨달은 지혜는 분명했다.

몸은 약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은 반드시 주인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뜻을 세우고 덕을 쌓는다면 출신과 조건을 넘어설 수 있다.

의지가 약하다면 열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업신여기지 말고 성실함을 지켜야 한다.

정약용은 이러한 삶의 지혜로 제자의 자존감을 북돋우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스승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길잡이이자 함께 성장하는 벗이었다.

정약용의 편지는 제자 한 사람을 향한 당부에 머물지 않는다.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묻는다.

“너의 정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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