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을 하늘에 비유하며, 신분제 차별을 부정하고 평등을 강조한다.
19세기 중반 조선은 안팎으로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부패한 관리와 무거운 세금, 삼정(三政)의 문란이 백성을 짓눌렀고,
외부적으로는 서양 세력과 일본이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는 이미 제 기능을 잃었으며, 백성들의 삶은 끝없는 피폐로 내몰렸다.
이런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한 것이 동학이었다.
창시자 최제우(1824~1864, 호 수운)는 경주 출신으로, 1860년 4월 5일 경주 용담에서 도를 닦던 중 신비한 체험을 했다. 그는 이 깨달음을 한글로 지은 「용담가」에 담았고, 이듬해인 1861년에는 「안심가」와 「교훈가」등을 지어 널리 전하며 포교를 시작했다.
이 사상을 그는 시천주(侍天主)라 불렀다. ‘하늘님을 모신다’는 뜻으로, 여기서 하늘님은 멀리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한 하느님이었다. 시천주는 인간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이 서로 통하고,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뜻하며, 이러한 경지를 자각하여 길이 잊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이 사상은 후대에 제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근대적 교리로 정식화되었다. 그리고 1905년,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했다.
이는 교리를 현대화해 민족 자주정신과 사회 개혁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종교 활동을 넘어 교육·출판·계몽·독립운동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인내천 사상을 신분·성별·빈부를 초월한 평등 이념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동학의 가르침은 곧 기존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백성, 여성, 천민, 심지어 외국인까지도 하늘이 부여한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주장.
하늘을 섬기는 일은 곧 사람을 섬기는 일이며, 이는 신분제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급진적 평등 선언이었다. 이렇게 태동한 동학사상은 단순한 신앙을 넘어, 현실의 억압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힘이 되었다.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백성이 세상의 주인임을 자각하게 만든 사상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유·불·서학 등 기존의 사상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새 시대를 위한 개혁과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한민족 고유의 신앙을 바탕으로 민중의 정신을 결집시킬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의 사상은 인간 존엄과 평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에 전해진 서학(천주교) 사상과도 일정한 공통점을 지닌다.
처음에는 포덕(布德, 덕을 널리 펴는 일)과 교화 중심의 도덕 운동이었지만, 점차 신앙 체계와 의식이 갖추어지면서 ‘동학’이라는 새 종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당시 조정과 지배층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다.
민중을 하나로 모으고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사상은 반란의 불씨로 여겨졌다.
1863년, 흥선대원군 집권 초 사상·종교 탄압이 극심하던 시기, 최제우는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 혐의로 체포되어 대구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사라졌지만, 사상은 꺼지지 않았다.
민중 속으로 스며든 평등사상
최제우가 처형된 뒤에도 그 정신은 제2대 교주 최시형 신도들을 이끌었다.
가난한 농민과 피지배층이 동학을 받아들이면서, 신분과 성별, 빈부를 넘어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공동체가 형성됐다. 이런 평등의 씨앗은 조용 퍼져 나갔고, 각지의 접소(接所)와 신앙 모임 속에서 굳건히 뿌리내렸다.
1894년, 결국 이 정신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했다. 그 도화선은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났다. 탐학과 수탈을 일삼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농민들이 봉기했고, 이를 진압하려는 과정에서 동학 세력이 결집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과 “척양척왜(서양과 일본을 물리침)”를 외치며 항쟁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그들의 외침은 단순한 세금 감면이 아니었다.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모든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라.”
이는 제도와 권력의 근본 변화를 요구하는 평등의 실천이었다.
1905년, 제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종교 조직으로 재정비했다.
그는 종교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교육·출판·계몽 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19년, 손병희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기독교·불교 지도자들과 연대해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에는 ‘조선은 자주민임’을 천명하는 동시에, 모든 민중이 평등한 세상을 향한 동학·천도교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이로써 최재우가 시작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가르침은, 종교를 넘어 조선 민중의 자각과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이어졌다.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 했다.
그러나 두 사상은 한 줄로 꿰어낼 수 있을 만큼 닮아있다. 정약용은 법과 제도를 고쳐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정치를 주장했고, 동학은 그 정신을 제도 바깥에서 민중의 힘으로 실천했다. 차이가 있다면, 정약용의 길은 학문과 제도를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고, 동학의 길은 민중 스스로 세상을 바꾸려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길 모두 사람의 존엄을 하늘에 견주는 가치를 최우선에 두었으며,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넘어 이어진 사상적 유산이었다.
정약용이 설계한 개혁은 군주의 의지와 관료 집단의 실행력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당파 싸움과 보수적 성리학 체제 속에서 그의 구상은 끝내 전면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반면 동학은 제도권의 울타리를 넘어, 억눌린 민중이 스스로 깃발을 든 사건이었다. 비록 무력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들의 외침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역사 속에 깊이 각인시켰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울려 퍼진 ‘백성 존엄’의 목소리는 조선 후기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함을 알리는 신호였다. 시대와 방식은 달랐으나, 두 흐름은 결국 하나의 뿌리로 이어져, 조선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경제력과 학벌, 지위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기준들은 결국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사회의 벽을 더욱 높이고 있다.
동학이 남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은 19세기 조선의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여전히 학력·직업·재산·출신에 따라 사람을 나눈다.
학교에서는 더불어 사는 법보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산다’는 경쟁을 먼저 배운다.
그리고 그 경쟁은 학교를 넘어 사회로 이어져, 관계마저 승패로 재단하게 만든다.
게다가 거짓 뉴스의 홍수 속에서 진실은 흐려지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길을 잃었다.
동학의 평등 정신은 한 시대의 이상이 아니라, 매 세대가 새롭게 세워야 할 현실의 과제다. 정약용에서 동학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그 길, 그 길을 계속 걸어갈지 멈출지는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일의 세상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떤 사람들과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 누구와 함께 걸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