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평등을 향한 길

퇴계에서 정약용까지

by 닌자

조선은 철저한 신분 사회였다. 양반·중인·상민·천민의 구분은 삶의 모든 영역에 깊게 스며 있었고, 태어날 때 정해진 신분이 곧 삶의 한계를 의미했다.

오늘날 우리는 ‘계급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평등은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누군가의 사유와 실천, 그리고 희생의 결과다.

그 사상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 이황에서 시작해 성호 이익, 그리고 정약용과 그 가족에게 이르는 긴 여정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에 대한 믿음을 품었다.


퇴계 이황 — ‘이(理)’ 중심의 사유, 인간 본성의 평등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학문과 덕을 함께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의 학문은 엄격한 성리학 질서 안에 있었지만, 사유 깊숙한 곳에는 인간 본성의 존엄과 평등을 인정하는 시선이 깔려 있었다.

그가 주창한 사단칠정론에서 ‘사단(四端)’은

인(仁) —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의(義) —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과 악을 미워하는 마음)

예(禮) — 사양지심(辭讓之心, 서로 사양하고 겸손한 마음)

지(智) —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을 뜻한다.

퇴계는 이 사단이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양반과 상민, 심지어 천민이라 하더라도 하늘이 부여한 본성의 가치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에게 사단은 이(理)에서 비롯된 순수한 선의 발로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를 품고 태어난다고 본 것이 핵심이었다.

반면 칠정(七情)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기쁨(喜), 분노(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욕망(欲)이라는 일곱 감정을 말한다.

퇴계는 칠정이 기(氣)에서 발하며 선과 악이 뒤섞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단은 본성의 순수한 선함을, 칠정은 기질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감정을 대표한다고 구분했다.

1559년, 그는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엄격히 구분했지만,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 모두 이와 기가 함께 발한다고 보았다.

논리적으로는 기대승이 우세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퇴계의 구분법은 도덕 수양과 교육에서 강력한 설득력을 가졌다.

그는 학문이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지방 서원과 서당을 세워 가난한 이들도 학문을 접할 기회를 주었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문보다 학문적 성취와 인품을 우선시했다.

비록 신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조선 사회의 견고한 질서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퇴계가 강조한 인간 본성의 평등과 도덕 수양의 길은, 율곡 이이의 제도 개혁 구상으로 이어졌고,

다시 성호 이익의 실학적 비판 속에서 한층 구체화되었으며,

훗날 정약용의 사상과 실천에까지 닿았다.


율곡 이이 — 이기일원론

율곡 이이(1536~1584)는 퇴계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기호학파의 대표 성리학자였다.

그 역시 성리학의 이기론을 바탕에 두었지만, 퇴계가 ‘이(理)’를 중심에 두었다면 율곡은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그에게 ‘기(氣)’는 현실을 움직이는 동력이었으며, 선한 본성(이)을 현실에 구현하려면 기를 다스리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수양에 머물지 않고 국가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그가 제안한 10만 양병설, 인재 등용 개혁안 등은 모두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적 방안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

율곡의 개혁안은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과 격화된 당파 싸움 속에서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대규모 병력 유지나 제도 전면 개편은 재정과 행정 체계를 흔드는 일이었기에 반대가 컸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도덕적 이상을 제도와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학문의 흐름을 잇게 했다.

성호 이익 — 사상의 다리

성호 이익(1681~1763)은 퇴계와 율곡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나, 두 사람의 학문을 계승하면서도 보다 실천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날카로운 사회 비판가였다. 양반 신분이었지만 농민과 서민의 삶을 깊이 살폈고, 불합리한 세금 제도와 불평등한 토지 분배를 비판했다. 또한 모든 백성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평등이란 추상적인 도덕이 아니라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백성을 위하지 않는 학문은 무의미하다”는 확신을 가졌고, 이 정신은 훗날 정약용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약용과 가족 — 사상의 실천

정약용은 성호의 학문적 정신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인간은 하늘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접했다. 형 정약종은 이 신념을 지키다 순교했고, 이승훈·권철신 등과의 연대 속에서 평등사상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정약용의 저술 속에서도 평등 정신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목민심서』에서는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고, 법은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경세유표』에서는 제도의 개혁을 통해 모든 백성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학문은 권력과 부를 위한 장식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도구이자 사회를 바꾸는 힘이었다.



생각해 볼 문제

조선의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오늘의 사회에서도 다른 형태의 ‘계급’이 자라고 있다.

경제력과 교육, 주거의 차이는 삶의 기회를 가르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은 다시 넓어지고 있다.

평등의 뿌리를 잊는 순간, 역사는 또다시 불평등을 재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기회가 누군가의 고난과 실천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평등은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 아니다.

퇴계, 아니면 그 이전부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누군가가 지켜온 사유와 행동, 그리고 희생의 결과다.

그 유산을 지키고 확장하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그 시대를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을 이해하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사유와 실천의 흐름은, 다음 이야기에서 마주할 정약용의 시대적 갈등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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