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사람을 위한 공부

by 닌자

시대가 요구한 공부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리며, 송대 주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와 제도를 이끌어온 핵심 사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학문은 점차 경직되었고, 사상과 제도의 유연함을 잃은 채 현실과 괴리된 관념적 학문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주자학의 폐단이 더욱 심화되어, 국가 쇠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신분 질서는 견고했다. 양반을 정점으로 중인, 상민, 천민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개인의 삶은 태어난 신분에 따라 크게 제한되었다. 배움과 출세 역시 양반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현실을 외면한 성리학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일에 나아가 올바름을 구한다’는 이 학문은, 공허한 이론보다 현실에 도움이 되는 지식과 실천을 중시했다.

한편 이 시기는 나라 안팎의 전쟁과 기근, 인구 증가, 상업과 화폐 경제의 확산으로 사회 구조가 크게 흔들리던 때였다. 지방의 향약과 서원은 변질되거나 무너졌고,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다. 신분제는 여전히 견고했지만,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중인과 부농층이 등장하며 질서에 균열이 생겼다. 여기에 서학(西學)과 같은 새로운 사상이 평등과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었고, 일부 학자들은 책 속의 도리만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정약용이 추구한 공부 역시, 관념에서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는 요청과 맞닿아 있었다.


학문의 뿌리 — 성호 이익의 정신을 잇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조선 후기 중농학파의 대표 학자로, 농업 중심의 경제 정책과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그의 학문은 당대의 학풍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에서 출발했다. 그는 당시의 학자들이 겉으로만 경전을 외우고 성인의 도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현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탐구하지 않는 태도를 비판했다. 형식과 틀만 남은, 죽어있는 껍데기뿐인 학문을 이었다. 성호는 이를 두고 “떡의 모양은 잘 형용할 수 있지만 떡의 맛은 실제로 알지 못한다”라고 비유했다.

먼저 그가 비판한 학문 풍토의 가장 큰 원인은 과거 시험 중심의 학문 구조였다.

글을 외우고, 이론을 반복하는 데 익숙한 공부는 실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학문은 점점 현실과 멀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입시 중심 교육과도 닮아있다.

성적을 위한 공부, 점수로만 평가되는 사고는 지식의 깊이나 삶과의 연결성을 가로막는다.

성호의 통찰은 18세기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형식에 갇힌 지식과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사유에 대한 비판은, 성호가 강조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학문’의 기초가 되었고, 이는 정약용의 학문 태도와 글쓰기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성호의 사상을 좀 더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노비 제도의 뿌리와 폐해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우리나라 노비법은 기자(箕子)의 “남의 재물을 도둑질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기자는 성인이니, 생각이 원대하고 지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오늘날의 법처럼 대대로 노비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자신만 노역(奴役)을 하게 하여 부끄러움을 주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호사설 163p/ 최석기 옮김/ 한길사

그는 또 노비 제도가 인간의 가능성을 짓밟는 제도적 장벽임을 지적하며, 이렇게 통탄했다.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천하 고금에 없는 것이다.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토록 괴로움을 당한다.(…)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된다면, 안회(顔回)와 백기(伯奇) 같은 사람도 그 행실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관중(管仲)과 안영(晏嬰) 같은 인물도 그 지혜를 쓸 수 없어서, 끝내 노둔하고 미천한 하등의 인간이 될 따름이다. 더구나 남의 집에서 종노릇 하는 자는, 학대를 당하면서 괴로운 일에 시달려 살아갈 길이 없으니, 천하에 이처럼 곤궁한 백성이 다시없을 것이다.

성호사설 242p/ 최석기 옮김/ 한길사

나는 이 대목에서, 성호가 불평등의 현실을 얼마나 냉철하게 바라보았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의 시선은 제도와 법의 겉모습에 머물지 않았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평생 노비로 묶여 지낸다면, 그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이는 한 개인의 삶을 짓누를 뿐 아니라, 결국 나라의 힘을 갉아먹는 길임을 성호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러한 성호의 비판적 시선은 정약용에게 단순한 학문적 영향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유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후 서학(西學, 천주교)의 평등사상에도 비교적 빠르고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서학은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성호의 사상과 맞닿은 ‘사람 중심의 사유’였으며, 조선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비록 그는 박해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배교의 길을 택했지만, 서학이 품고 있던 평등과 인간 존엄의 사상은 이후 그의 제도 개혁과 실천적 글쓰기 속에서 여전히 사유의 자양분으로 살아 있었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중앙 행정 제도 전반을 분석하며, 무엇이 백성을 위한 제도이고, 무엇이 불합리한지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 제안들은 단순한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정치 운영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까지 고심한 결과물이었다.

이어지는『목민심서』에서는 지방 관리가 백성을 대할 때 가져야 할 윤리와 자세를 상세히 풀어냈고, 『흠흠신서』에서는 형벌 제도의 인도적 개정을 시도하며, 법이 인간을 헤치지 않도록 다듬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처럼 정약용의 실천적 저작들 뒤에는, 바로 이와 같은 성호의 ‘현실을 직시하는 앎’의 태도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형식에 갇힌 지식이 아닌, 백성을 위한 제도와 삶을 바꾸는 사유야말로 진정한 공부라고 믿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글을 쓰고 제도를 설계하며 현실을 바꾸고자 했다.


개혁의 토양 — 정조의 뜻을 잇다

성리학의 형식주의와 관념적 학문을 깨뜨리고자, 조선의 한 임금이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그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 역시 아버지를 잃은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바로 그 해, 태어난 정약용.

이 두 사람의 삶은 애초부터 고통과 개혁이라는 공통된 운명을 품고 있었다.

훗날 왕위에 오른 정조는 기득권 세력이 배제된 소론과 남인 계열의 유능한 인제들을 과감히 등용했다.

체제공, 안정복 등은 그 중심에 있었고, 이는 실학과 개혁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토양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실제 삶과 동떨어진 학문 이론만을 중시하고,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성리학의 폐단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 모순을 바로잡고자 나타난 것이 실사구시의 학문, 그리고 실학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정조라는 특별한 군주가 있었다.

정조는 성리학의 겉껍데기를 걷어내고, 공자의 정신을 다시 세우려 했다.

그에게 공자는 단지 경전에 봉인된 성현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세상을 바꾸려 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했다. 이는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뽑아 규장각에 두고, 정조가 직접 경서와 시사를 강론하며 국가 경영의 실무를 맡기는 제도였다. 이 제도를 통해 정약용을 비롯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유구, 이희경 등 당대의 걸출한 인재들이 발탁되었다. 이들은 고전 경학뿐 아니라 농업·상공업·외교·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학문과 개혁안을 연구했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배워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려는 북학파와 실학파의 흐름 속에서, 초계문신제 인물들은 정조 개혁정책의 핵심 인재 군이 되었으며 서로의 연구와 사유를 자극하는 지적 공동체를 이루었다. 정조는 여기에 더해 문체반정을 통해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글쓰기를 장려했다.

이러한 학문과 글쓰기의 지향은, 현실을 향한 비판과 개혁을 중시한 성호 이익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었다. 성호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공부, 곧 ‘눈 뜬 지식’을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정약용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그는 이를 유배지에서도 놓지 않았다.

성호가 제기했던 노비제 문제, 불공정한 제도,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이상은 정약용의 실천적 글쓰기의 바탕이 되었다.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실사구시 학자들은 변화의 흐름을 이끌었고, 그중에서도 정약용은 성호의 비판 정신과 백성을 향한 시선을 누구보다 깊이 이어받았다.

정조 역시 같은 지향을 품고 있었다.

그가 원한 유학은 사람을 위한 학문, 정치를 위한 도덕, 백성을 위한 제도였다.

정약용은 이 뜻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공부란, 곧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유배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고, 글을 쓰며 자신을 세웠다.

그가 공부한 것은 단지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바꾸는 실천, 세상을 향한 사유의 힘이었다.

성호 이익이 그에게 눈먼 현실을 꿰뚫는 비판의 안목을 주었다면,

정조는 그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정약용의 공부는 철저히 현실을 위한 앎, 그리고 사람을 위한 사유였다.

그에게 공부란,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되었고, 결국 남을 품을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우리가 오늘, ‘공부’를 다시 생각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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