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의 삶도 함께 무너졌다.
그가 신뢰했던 임금이자 개혁의 동반자였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동안 다져온 모든 기반을 한순간에 흔들어놓았다.
이후 조정은 노론 벽파 중심의 보수 세력으로 재편되었고, 남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정약용과 그의 가족을 ‘서학(西學)’을 받아들인 자들이라는 이유로 탄압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사실 정약용 가족에게 관심이 갔던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일 것이다.
올해 인도철학 강의를 들으며 인도의 사상과 세계관이 얼마나 깊고 치열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카스트 제도라는 신분 질서에 묶여 있고, 그것을 순리로 받아들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불평등을 순리로 받아들인다는 말 앞에서 나는 멈칫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조선 후기까지는 분명한 계급사회였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의 고통스러운 희생 속에서, 서학(천주교)은 점차 평민과 민중에게로 퍼져 나갔고 이후 동학의 평등사상과 민중 항쟁으로 이어지며 우리는 마침내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학은 신분을 초월한 인간의 존엄을 강조했고,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며 민중의 삶 속에서 그 사상을 실천하려 했다.
그리고 훗날,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들은 그 사상을 들고 일어섰다.
그들의 실천은 민중 속에서 다시 피어난 평등의 씨앗이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정약용과 그의 가족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쓰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이름을 남긴 사람들보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마음 한켠이 시리게 아파왔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등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이 뿌린 사상의 씨앗은 땅속에서 조용히 자라났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뒤,
김대건 신부라는 이름으로 그 뜻이 피어났다.
조선 최초의 사제였던 그는,
서학의 사상을 삶과 죽음으로 증명한 인물이었다.
신분과 출신을 넘어,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믿음을 지녔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그분들의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말로 내게 들려왔다.
사실 세계사 속 종교의 모습, 특히 십자군 전쟁을 떠올리면 충격이 크다.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잔혹한 전쟁들, 그것이 과연 구원의 길이었는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종교는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기도 했다.
나는 그 양면성 속에서 흔들렸지만, 정약용의 가족이 보여준 믿음과 실천은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삶과 신념이 하나 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시대의 벽 앞에서 질문했고, 저항했고, 희생했고, 끝내 시대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약종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다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은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에 입교했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였다.
하지만 그가 품은 신념은 누구보다 깊었다.
도교에 심취해 있던 그는 서학을 접한 뒤,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평등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서학을 단순히 외래 종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삶의 근본을 바꾸는 계기로 삼았다.
신유박해 당시 그는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며 순교의 길을 걸었다.
교리서적 등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운반하다가 적발되었고, 천주교 박해의 부당함을 항변하다 서소문 밖에서 이승훈,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순교했다.
그의 아들 정철상 역시 같은 해에 참수당하며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죽음은 학문보다 믿음을 앞세운 사람의 단단한 내면을 보여준다.
이승훈 — 가족에서 시작된 믿음의 길
정약용의 자형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세례자였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였다.
그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 내 서학 확산의 물꼬를 텄다.
정약용 형제들이 서학과 접하게 된 데는 이승훈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이가환의 외조카였으며, 서학 모임의 중심인물이었던 이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이승훈은 단순히 신앙을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흔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유박해 당시 그는 체포되어 정약종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가 걸어간 길은 단순한 믿음의 실천이 아닌, 조선 사회에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심은 결단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가족의 비극이었고, 동시에 조선 지식인의 좌절이었다
이벽 — 새로운 세계관의 이론가이자 실천가
이벽은 조선 초기 천주교 신앙의 형성과 전파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서학을 사상과 신앙의 차원에서 모두 이해하고 실천했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기도 했던 그는,
가족 간의 인연 속에서 서학이 퍼지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이벽을 비롯해 정약종,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등은 모두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성호학파 출신이었다.
이 다섯 사람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성조로 불린다.
그들은 성호의 실학 정신을 바탕으로 서학을 접했고, 그 안에서 인간 평등과 새로운 세계관을 발견했다.
이벽은 신유박해 이전 칩거하던 중 사망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배교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라고 말하며 아들을 지키고자 했다.
이벽의 삶과 죽음은 당시 지식인들이 어떤 각오로 새로운 사상과 마주했는지를 보여주는 강렬한 사례였다.
권일신 — 배움과 신앙을 가르친 실천가
권일신은 양근(현 경기도 양평군)에서 활동한 천주교 창립 성조 중 한 명이다. 성호학파의 일원으로 성리학에 바탕을 두었으며, 이후 서학을 접한 뒤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다른 창립 성조들과 마찬가지로, 양반뿐 아니라 평민과 천민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치며 계급을 초월한 신앙 실천을 펼쳤고, 이는 후일 천주교 박해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구속되었고, 노모의 간청으로 배교함에 따라 감형되었지만 유배지로 이동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장독이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형은 권철신이며, 그는 실학자 안정복의 사위이기도 했다.
그 또한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권일신의 삶은 글로만 남은 철학이 아니라,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지식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권철신 — 이론을 넘은 신념, 실천의 사람
권철신은 양근(현 경기도 양평군)에서 활동한 인물로, 천주교 창립 성조 중 한 명이다. 세례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였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서 학문을 익혔고, 24세에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다.
성리학에 정통했으나 정통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이후 서학을 접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 후에는 '서학교리 연구회'를 열어 교리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고, 이벽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용하고도 깊이 있는 실천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신유박해 당시 그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하였다.
그는 다른 창립 성조들과 마찬가지로, 신앙과 실천을 함께한 삶을 살았다.
이가환 — 당대 제일의 천재, 정치 보복을 당하다
이가환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증조부가 성호 이익이고, 정조의 총애를 받던 대표적인 남인이었다.
박학다식하고 동서양 학문에 밝아, 정조는 그를 통해 실학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생전에 ‘오회연교(五悔筵敎)’를 통해 이가환을 재상으로 등용할 뜻을 비쳤고, 이는 노론 벽파의 강한 반감을 샀다.
그는 권철신과 함께 남인계 실학을 이끌었고, 정약용은 그들의 학문에 자연스레 영향을 받았다. 정식으로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서학을 접하고 일정 부분 공감해 왔다.
그러나 1791년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자,
그는 교리를 비판하는 『경세문(警世文)』을 발표하며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학과 거리를 두려는 시도였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그가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그는 권철신과 함께 모진 고문을 받았고, 단식한 지 6~7일 만인 1801년 3월 24일 옥사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목을 벤 뒤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다. 이는 정조 사후, 실학을 주도하던 남인과 개혁 세력이 노론 벽파에 의해 철저히 제거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가환의 죽음은 정약용에게 깊은 슬픔과 충격으로 다가왔고, 곧이어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정약용에게 있어서는 시대와 사상의 붕괴를 목도한 고통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옛이야기가 아니었다.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 보복의 칼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날카롭다.
정약전 — 자연을 스승 삼은 실학자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은 대과에 급제한 엘리트였지만,
일찍부터 과학과 기술, 실용적 지식에 관심이 많았다.
서학의 사상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신념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는 이익의 제자 권철신에게 학문을 배웠다.
신유박해로 인해 그는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우이도를 거쳐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그곳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조선의 바다 생물과 민중의 삶을 기록했다.
그의 글에는 과학과 생명에 대한 존중, 그리고 서학의 영향이 은은히 흐른다.
정약용 — 침묵 속에서 시대를 기록한 사람
정약용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한때 감옥에 갇혔고,
이후 장기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는 단지 한 사람의 유배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조가 추진하던 개혁과 신념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을 지켜본 증인이었고,
누구보다 많이 배웠고, 누구보다 깊이 상처 입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조정은 그의 이름을 기록에서 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공부하고, 기록하고, 다시 써 내려가며 그 질문에 답하고자 했고,
그렇게 위기를 기회로, 고난을 자신을 만드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지켜낸 것은 단지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등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삶은 단지 신앙이나 사상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거센 물결 속에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한 사람, 한 가족, 한 시대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믿음을 실천했고, 고통을 감내했고, 침묵 속에서도 기록하며 시대를 지켜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등은 단지 제도나 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피로 쓰인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고통 속에서도 신념을 지킨 이들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일이,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